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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22. 2022

일본 근대화의 기수 - 3

메이지 유신 후 승자들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삿초동맹의 멤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이 대거 출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최후의 승자가 가려집니다. 이제 그들은 대륙을 탐하고 눈을 돌려 바다로까지 뻗어 나갑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 유신 3걸 - 개혁과 갈등 /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정한론 /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 최고사령부 / 일본 근대화 - 미국 / 일본 선진화 - 미국]



5.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오늘날 야마구치현은 조슈번을 승계한 지역이라 했습니다. 현(県)은 우리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명으로 일본엔 지금 47개의 현이 있습니다. 막부 체제 하에 있었던 크고 작은 많은 번들이 현재의 현으로 메이지 유신기인 1871년 재편된 것입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가 주도한 이른바 폐번치현(廢蕃置県), 대대로 지방 토호인 번주인 다이묘가 지배했던 번을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이 지배하는 현을 설치한 것입니다. 그 이전 1869년 폐번치현의 선제 작업으로 각 번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영지와 영민을 천황에게 귀속시키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실시한 터였습니다.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영주의 힘을 빼낸 것입니다. 그렇게 막부 시기의 번은 모두 새로운 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중 조슈번이었던 야마구치현 이 지역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도쿄나 교토, 오사카에서 떨어진 본토 혼슈 끝 지역인데 이 끄트머리 땅에서 일본을 통치하는 만인지상인 총리가 무려 9명이나 나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는 101대 총리인데 역대 모든 총리 중 21대가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총리 점유율 21퍼센트로 다른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기록입니다.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도 이곳 출신인데 그는 4대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했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지 않았으면 몇 대를 더했을지도 모릅니다. 강성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본적지와 지역구도 이곳이며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도 이곳 출신입니다. 물론 삿초동맹의 파트너인 더 아래 규슈 완전 끝 사쓰마번이었던 가고시마현 출신들도 야마구치현만큼은 아니더라도 메이지 유신 초창기 정부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조슈번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천하의 모든 다이묘들이 그의 아들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양분되어 벌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리 편 서군 대장인 모리 데루모토가 패전해 밀려나 거주한 번입니다. 그 전투에선 바로 전 임진왜란 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같은 편이었던 다이묘들이 파가 나뉘어 서로 적으로 맞섰습니다. 우리에게도 알려진 임진왜란의 좌우 쌍포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도 서로 적으로 칼끝을 겨누었으니까요. 이렇게 어느 한 편으로 줄을 서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를 가린 세키가하라 전투 기록화, 1600


서군인 모리 데루모토의 주군 히데요리는 이 전투의 패배로 대세가 넘어간 이후 벌어진 최후의 일전 오사카 전투에서 패해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일본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후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 집중하며 수하 다이묘들을 확실히 장악했더라면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 막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정 명령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출정하지 않고 힘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리 데루모토는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실 그는 서군 대장이었지만 바지 사장 성격이었고 실질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수는 그 아래 이시다 미츠나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영지와 녹봉이 대폭 축소되어 그곳으로 쫓겨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조슈번은 대대로 중앙 막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차별로 인해 반골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조슈의 인재들이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에 1등으로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264년에 걸친 와신상담의 결과입니다.


야마구치현에서 모리 데루모토가 자리 잡은 곳은 하기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지금도 인구가 4만여 명 밖에 안되니 여전히 작은 도시입니다. 모리 가문은 그때부터 하기에서 터를 잡고 막부의 허락 하에 작은 성을 짓고 그곳을 지배하며 살았습니다. 이 마을이 바로 이 글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야마구치현 하기시 전경, 2018
하기시에 있는 모리 가문 성터


4년 전인 2018년 저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맞아 1년 내내 성대한 행사로 시끌벅적한 이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무너진 모리 가문의 성터도 가보았습니다. 과거 조선인이라면 요즘은 부관페리라 부르는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의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그곳에 갔을 것입니다. 하기는 야마구치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모노세키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으니까요. 하기시는 우리나라 도시 중 울산시와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깝다는 연으로 1968년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하기의 야외 공연장에서 우리나라 민속 공연의 모습이 보여 신기해서 가서 봤더니 울산에서 온 공연단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서 경성(서울)까지 60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듯 야마구치현은 일본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전초적인 최전방 지역이었습니다. 물론 과거에 대륙의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도 이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곳, 조슈번이라 불렸던 야마구치현에서 정한론이 발생합니다. 정한론이 이곳에서 발생한 것이 일본 역사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런 지정학적 위치도 그 주요 요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는 야마구치현의 하기라는 마을이 아니라 이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였습니다.



6.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 정한론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학교입니다. 말이 학교이지 우리로 치면 동네 서당과 같은 작은 사숙입니다. 그 사숙의 운영자가 이 글 앞에서 등장한 요시다 쇼인이라는 선구적 사상가입니다. 설명드린 대로 그는 오늘날 일본 보수 우익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일본 대망론인 정한론과 일본 근대화의 공통 과제였던 존왕양이론을 정립한 인물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상적 체계뿐만이 아니라 미국 문물을 직접 견학하고자 에도 앞바다에 떠있던 흑선에 몰래 잠입해 밀항을 기도하다 실패해 처벌을 받을 정도로 실행력도 있는 자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산실인 요시다 쇼인의 사숙 쇼카손쥬쿠
존왕양이론과 정한론의 이론을 정립한 요시다 쇼인, 1830~1859


무엇보다도 그가 한 일 중 가장 손꼽히는 일은 그의 쇼카손쥬쿠에서 양성한 제자들이었습니다. 불과 1년여에 걸친 교육이었지만 그 리스트를 보면 면면이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대개 우리에겐 나쁜 사람들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 막부군의 조슈정벌 시 기병대를 창설해 격퇴한 수제자 다카스기 신사쿠

- 삿초동맹, 유신 3걸로 조슈를 대표한 기도 다카요시

- 한일합병 침략의 원흉, 조선 통감,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

- 군국주의의 아버지, 조선 사령관,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

- 타이완 총독, 총리, 가쓰라테프트 밀약의 대표 가쓰라 다로

-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 조선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 명성황후 살해를 기획한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 공사

..


보시듯 메이지 유신의 주요 공신들과 일본 근대화 시기의 주요 인물들이 요시다 쇼인의 교육으로 양성된 제자들이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에 구원이 있어 존왕양이에 앞장선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인물들이 일본의 47개 현의 하나인 야마구치현에 집중되고, 거기서 하기라는 조그만 동네에 있는 쇼카손쥬쿠라는 조그만 학교의 한 스승 밑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름뿐이었던 허수아비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준 주축 세력이니 끼리끼리 해먹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보직의 중요도로 볼 때 그런 큰일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특정 지역의 인물 집중화로만 보면, 흡사 과거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밑에서 양성된 르네상스기의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시다 쇼인은 1859년 예상보다 훨씬 젊은 나이인 29세에 사망했습니다. 막부 고위층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후 처형당한 것입니다. 조슈번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을 죽인 막부에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직접 가서 보니 쇼카손쥬쿠는 정말 조그만 사숙이었습니다. 학교 정원이 모두 다 출세를 해야 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쇼인이 가르친 제자는 90명 남짓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베 전 수상의 고조부인 오오시마 요시마사 육군 대장도 그의 제자였습니다.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 동학혁명 시 고종이 거주하는 경복궁에 침입해 조선 정부를 친일 내각으로 바꾸어 청일전쟁을 유발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95년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의 기획 하에 그 궁의 안주인인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둘 다 쇼카손쥬쿠의 같은 스승 밑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베 전 수상은 공개적으로 이런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인 기병대 대장 다카스기 신사쿠도 그 리스트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합니다. 그의 바디 & 소울의 뿌리인 조슈번이라 불렸던 야마구치현을 꽤나 사랑하는 아베입니다.


쇼카손쥬쿠 내부에 전시된 요시다 쇼인과 주요 제자들


이렇게 조슈번의 하기 마을 쇼카손쥬쿠에서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대로 일본의 근대화는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1세대 제자들이 그가 주입한 존왕양이론대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여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고, 그 힘으로 2세대 제자들은 그의 정한론에 따라 섬나라 열도에서 벗어나 조선과 중국, 궁극적으론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까지 정복을 하였으니 말입니다. 나쁜 힘이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36년간 크나 큰 아픔을 준 한일합병을 하고, 순서에 의거하여 대륙으로 눈을 돌려 만주사변을 유발해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남진을 하며 난징학살 등 몹쓸 짓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885년 후쿠사와 유키치가 주장했던 탈아론대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분 하에 아시아의 대표(?)로 유럽 열강들이 2차세계대전 중 동남아 식민지 국가들을 돌 볼 여유가 없는 틈을 타 그곳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2차세계대전 추축국으로 참전해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킵니다. 결국엔 그들이 만난 역대 최강인 미국 본토까지 공격하면서 세계를 깜작 놀라게 한 일본이 됩니다. 1941년 12월 아름다운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태평양함대를 선전포고 없이 선제 공습한 것입니다. 일본의 그 공격은 과거 그들의 선배대로부터 대대로 쌓여오던 미국이라는 콤플렉스가 제거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90여 년 전 에도 앞바다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끼게 한 미국의 흑선 함대였었는데 그 미래의 함대를 박살낸 것입니다.



※ 위의 글은 브런치와 동시에 인터넷  언론사 뉴스버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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