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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18. 2022

이유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

살다 보면 이유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이 간혹 발생하곤 합니다. 안 생겼으면 좋을 일이지만 그런 일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이 빈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요. 그 일 중 어떤 일은 그 이유를 파헤쳐 이유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일은 끝내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은 채 묻히기도 합니다. 또는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과거의 이유가 드러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유가 드러났을 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알게 되어서 더 나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아니 안 것만 못한 것이지요. 그래도 누구든 몰랐던 이유를 알면 답답했던 속은 후련하다 할 것입니다.


대개 연인 사이에 한쪽이 이별을 통고할 때 그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있어선가 대개 이유까지는 안 밝히려 하니까요. 전 다행히 과거 그런 경우에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친절한 그녀들은 제가 인지할 만한 사인을 주고 떠나갔으니까요. 남녀 사이에선 다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남자는 여자가 화를 내거나 울 때 그 이유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사실 저 포함 거의 모든 남자가 모른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반면에 남자는 여자가 기뻐할 때나 웃을 때의 이유는 아주 잘 캐치합니다. 참 이상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여자에게 그렇게 해주기 힘들어서가 또 문제가 되곤 합니다. 그래서 남녀관계는 이래저래 힘이 드나 봅니다.


전 이유를 모르고 지나간 일중에서 다른 모든 일은 잊고 살지만 두 가지 일은 지금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기억하고 산다기보다는 잊히지 않고 산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하나는 20대 초반 군대 입대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대한의 늠름한 남아답게 당시 후암동에 있던 병무청을 직접 찾아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군대를 문의하였습니다. 이유는 윗 단락에서 설명드린 어떤 그녀와의 이별로 가능한 한 가장 빨리 그녀가 있는 이 세계를 떠나야만 했기에 그랬습니다. 실상은 이렇게 절대 늠름한 것과는 거리가 먼 현실 도피처로서의 군입대를 추진한 것입니다. 당시 대학 2학년을 마칠 때이니 입대 적령기이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가 할 줄 아는 분야의 특기병 모집이 바로 있어 전 즉시 지원을 하고 입대 전형에 따라 시험을 치르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합격 동기들과 같은 날 입대를 하여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도 같이 받은 우린 같은 날 퇴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만 다른 열차 칸에 배정된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내려야 할 곳은 서울시 용산역이고 근무가 예정된 자대는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있는 부대였습니다. 입대 전 우린 국립묘지 내 그 부대에서 필기와 실기 시험도 같이 치르었습니다. 결국 훈련소 동기들은 용산역에서 먼저 모두 내리고 저만 경기도 의정부역까지 가서 하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둑해진 용산역에서 내려 제 열차 칸 창문으로 몰려와 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주던 친하게 지냈던 동기 형들이 생각이 납니다. 당시 그들의 얼굴은 지금도 떠오르는데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인연이 길게 가기에는 한 달여간의 훈련소 생활만으로는 너무 짧았기에 그렇습니다.  


결국 저만 의정부역에서 내린 것입니다. 위수 지역으로 보면 육군본부나 수방사를 지나쳐 3군 지역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 무섭게 저는 행정반으로 찾아가 저에게 닥친 인생의 위기에 대해 어필을 하고 시정을 요구하였습니다. 처음엔 심드렁하게 절 대했던 행정 현역병은 저의 진지한 태도에 사태를 파악하겠노라 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나온 그는 저에게 제 말이 맞다 하며 행정상의 착오로 육본 예하 부대인 3군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필하는 저에게 안타깝게도 이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겁먹은 신병 입장에선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이상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는 기가 찬 일입니다.


입대 전 합격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육본의 담당 인사계가 육군에 이만한 부대는 없으니 오기 싫음 안 오고 다른 군대를 가도 좋다고 했던 부대였습니다. 당시 제가 군에 연줄이 있는 분이 계셨다면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렸을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저는 3군 자원으로 분류되어 그 와중에 또 하필이면 3군 중에서 최고 전방인 철원으로 자대를 배치받아 그곳에서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부대에선 흔치 않게 71로 시작하는 지원 군번을 달고서 말입니다. 제가 전에 쓴 글인 '역(逆) 귀소본능'에 등장하는 저의 추억이 서린 부대입니다. "폭양이 내려쬐는, 백설이 휘날리는, 아아아아 울고 넘던 성동 고개.." 이렇게 이유를 모르는 사연을 안은 채 의정부에서 M60 트럭 뒷자리에 실려 이런 부대 군가를 부르게 될 철원의 백골부대까지 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월이 흘러 40대 중반 본부장으로 재직하던 회사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사장의 호출을 받은 저는 사장실로 올라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렵게 흘러나온 사장의 일성은 "미안하지만 함께 가기 힘들게 되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10시경이었습니다. 위의 20대 때처럼 하늘이 노랗게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실 기가 막힌 통보였습니다. 예고도 없었고 예상 징후도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저는 마치 준비된 자였던 것처럼 "예 알겠습니다"라고 사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속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임원은 파리 목숨이라지만 6월이라 인사 시기도 아니어서 속으로라도 "이유가 뭔데요?"라는 질문이 올라올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다음 일어난 일은 저를 좀 혹스럽게 하였습니다. 진행하던 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인수인계를 마치겠다는 저에게 사장은 "그건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당장 정오 전까지 정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시간 안에 정리.. 저의 당혹은 그래도 제가 몸 담았던 회사가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글로벌 시장에서도 맹활약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군이라는 팩트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 말에서도 저는 또 이유를 제기하지 않고 "예"라 대답하고 바로 사장실을 나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아주 이상할 정도로 순조로운 퇴사였습니다. 아마 사장은 나가는 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론 "휴우~" 하고 안심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런 통보를 하는 일을 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자리라는 것을 잘 알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저는 제 인생에서 이유를 모르고 지나간 일이라 하면 이 두 가지 일을 꼽습니다. 이것이 적은 것인지 많은 것인지는 타인과 비교해본 적이 없고 이런 통계는 당연히 없을 것이기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일의 차이는 첫 번째 20대의 군 입대 시 자대 배치 일은 제가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전히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 40대의 회사 퇴사 건은 알려면 그 이유를 알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대 때 일은 휴가 시 훈련소 동기들이 있는 서울 동작동 그 부대를 찾아가 담당 인사계로부터 미안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기차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말은 안 했지만 무언가 말 못 할 진짜 이유가 있었겠지요. 요즘 시대라면 있을 수 없는 20세기의 덜 투명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40대 때 회사 일도 역시 무언가 말 못 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업 내 이런 일은 투명해진 대한민국의 21세기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니까요. 대신 벼락 해고 통보 후 2시간 안에 방을 빼라는 일은 이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겠지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전선에 나간 군인 주인공이 애인에게 보낸 편지는 숱하게 답장이 오지 않습니다. 실상에선 오는 편지가 훨씬 더 많은데 희소성을 중시하는 경제의 원칙대로 문학이나 예술은 희귀한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주인공은 회신이 없음에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댑니다. 답장이 없는 이유로는 대개 그녀의 심적, 물적 변화로 편지가 배달되지 않거나 그녀가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수취 불능한 변화는 그녀가 이사를 갔든, 다른 남자에게 갔든, 아니면 안타깝게 죽었든 등이 이유가 될 것입니다. 많이들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추호의 변화가 없음에도 답장이 없는 것은 그가 보낸 편지들이 누군가에 의해 차단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로채기의 범인은 주로 그녀의 부모인데 그것은 그와의 연애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수많은 키스 신으로 유명한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엘레나의 리얼 키스 신


지금 이 순간엔 그렇게 안달 난 피해자로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가 우선 떠오르네요. 그의 첫사랑이자 그때까지 유일한 사랑인 엘레나와 이유 모를 만남 약속이 깨진 채 군에 입대한 토토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못 만났습니다. 그래도 후에 개봉 된 감독의 디렉터스 컷 버전에서 먼 훗날이나마 영화감독으로 출세를 해서 고향 시실리에 돌아온 토토가 그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첫 개봉 시 그렇게 사라진 엘레나를 궁금해하지 않은 관객은 없었을 테니까요. 물론 토토는 훨씬 더 궁금했겠지요.


고향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그녀를 닮은 딸을 목격한 토토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엘레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기쁘게 말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재회한 날은 젊은 시절 그가 그녀와 헤어진 이유를 모른 채 답답하게 살아온 지난한 날들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약속이 어긋난 이유를 엘레나가 이야기해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대개의 첫사랑이 그러하듯 그것으로 또 끝이었습니다.


<시네마 천국>에서 이유를 모르고 헤어진 채 먼 훗날 재회한 토토와 엘레나


생각해보면 세상만사 그렇게 된 이유가 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불을 땠으니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 이유를 애써 반드시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숨겨진 이유의 대부분은 알아서 기분 좋은 일보다는 기분 나쁜 일이 더 많기에도 그렇습니다. 대개 좋은 일은 드러내려 하고 나쁜 일은 감추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되돌려질 일이 아니라면 기분 나쁜 이유를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삶은 그 지점을 통과해 더 나아갔으니까요.


물론 착오나 실수에 의해 잘못된 것이 이유라면 그것은 바로 잡아야겠지요. 그리고 착오나 실수를 넘어 잘못된 일의 이유가 악의 개입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라면, 그래서 손해까지 발생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정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지나간 이유를 파헤치는 정정 과정은 그것이 정의이고 정당함에도 당사자의 노력과 희생까지 요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굳이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고 한 다른 이유는 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의 이유를 모르고 지나가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달라지지 않기에도 그렇습니다.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해는 다음날 여전히 떠오르고 사람들은 어제와 변함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니까요. 우리가 겪은 일은 설사 이유를 모르더라도 이런 변함없는 세상에 녹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움직이듯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자연스레 계속 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20대와 40대 때 이유를 모르는 나름 큰일들을 겪었지만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 안엔 지금은 잊힌 이유를 모르고 지나 간 숱한 작은 일들도 함께 녹아 있을 것입니다.


20대 때 제가 군생활을 철원이 아닌 서울에서 했고, 40대 때 나온 그 회사를 제가 더 다녔다 해서 지금 제 인생이 유의미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유를 모른 채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기에 삶에서 험한 순간을 대하는 제 맷집이나 자세는 더 좋아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퇴직당한 회사는 심플하게 생각하면 오너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나와야 하는데 그 시간이 앞당겨져 저의 창업이 좀 더 빠르게 진행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삶에서 이유의 인지 여부는 지구의 대륙 이동설에 의해 우리가 사는 위치는 같아도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못 느끼고 살듯 그 정도의 작은 차이만이 존재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감춰진 이유만으로 살아온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꺾이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이유 발생 시점인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 수도 없습니다. <시네마 천국>의 토토도 엘레나와 재회하며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젊은 시절 그때에 불발된 만남의 이유를 알아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해도 결국은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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