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대엔 그 물결을 먼저 타는 인물들이 출현합니다. 평화 시기엔 영웅호걸이 등장하기 힘들지요. 우리가 그나마 알고 있는 일본 역사 속 인물들은 전국 시대의 3인방이 활약했던 그 시기의, 그리고 그때 세워진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킨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인물들일 것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 유신 3걸 - 개혁과갈등 /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정한론 /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 최고사령부 / 일본 근대화 - 미국 / 일본 선진화 - 미국]
3.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람들, 그들도 사무라이였습니다. 구체제 하에서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각자 그룹을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부릅니다. 후대에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되어지는 호칭이지요. 이들 중 대다수는 개혁과 혁명의 뜻을 품은 하급무사들이었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유신 3걸을 비롯해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 유신의 불을 점화하고 일본 전역을 돌며 들불처럼 퍼져 나가게 한 이는 사카모토 료마라는 이상가입니다.
사카모토 료마, 그는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일본 1천 년 역사 중 가장 존경하는 영웅 1위로 뽑힌 기적의 인물입니다. 그때 그의 밑으로 상위권에 순차적으로 뽑힌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나카 수상 순이며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당한 이토 히로부미도 9위에 랭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덜 알려진 그가 1위로 뽑힌 것은 의외라 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은 오늘날 일본을 있게 한 결정적 분기점인 메이지 유신을 있게 한 그를 단연코 1등이라 생각하나 봅니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그의 방에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로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1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사카모토 료마, 1835~1867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비쥬류 지역인 시코쿠의 도사번 출신으로 그의 고향은 오늘날 고치현에 해당됩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에도 유학 중 앞바다에 떠있던 미국의 흑선함대를 보게 됩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놀랐던 많은 일본인들 중 가장 예지력과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흑선 목격은 일본이 구미 선진국과 같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막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더욱 강하게 만든 일로 그는 그때부터 왕정복고를 위한 대정봉환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것의 평화적 해법으로 그는 각 지방 번의 실력자 다이묘들을 찾아다니며 막부정권 종식의 필요성을 집요하게 설득합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을 뭉치게 한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킵니다. 조슈번은 오늘날 혼슈 끝 야마구치현, 사쓰마번은 그 아래 규슈 끝 가고시마현의 옛 지명입니다. 이 두 번은 중앙 막부와도 각을 세웠지만 그 이전 조슈번은 1863년과 1864년 서구 연합국과의 시모노세키전쟁(下關戰爭)에서, 사쓰마번은 1863년 영국과의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에서 패해 그 신문명과 신무기의 뜨거운 맛을 경험해 누구보다도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렇게 중앙 막부와는 별개로 외세와 전쟁까지 치를 정도로 강성 지역이었는데 특히 조슈번은 그 이전부터 막부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됩니다.
삿초동맹(1866)으로 대정봉환을 성사시킨 주력 3개 번
그 틈을 사카모토 료마가 비집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도 강 대 강의 동맹이라 쉽지 않았으나 설득의 달인인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역사적인 삿초동맹을 맺게 됩니다. 이 사건이 역사적이라 하는 것은 삿초동맹으로 인해 대정봉환의 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 둘의 연합은 중앙 막부가 긴장할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이미 이전 두 번에 걸친 중앙 막부의 조슈정벌에서 조슈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가 창설한 민병대에게 2전 전패를 당해 신세를 구긴 막부였습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민병대는 철저한 신분제 하에 사무라이들로만 구성된 기존 막부의 군대와 달랐습니다. 막부 체제 하에선 무사 계급만 군인이 될 수 있었지만 그의 군대는 이런 계급과 신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전국시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군인이 될 수 없던 일반 농민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가 전투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도시락을 까먹으며 동군 이겨라, 서군 이겨라 하며 응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카스기 신사쿠의 군대는 일반 하급 사무라이들과 자원한 농민, 상인 등의 하층민들을 섞어 평등하게 구성된, 그래서 기병대(奇兵隊)라 불린 당시로선 일본에서 가장 앞선 신식 군대였습니다. 사쓰마번은 이들이 조슈정벌에서 막부에게 연거푸 승리한 결과를 보고 조슈번과 손을 잡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카스기 신사쿠의 사전 정지 작업과 사카모토 료마의 본 작업으로 역사적인 삿초동맹은 성사되었습니다. 대세가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삿초동맹의 한 축인 사쓰마번엔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란 걸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축인 조슈번엔 또 한 명의 유신 3걸인 기도 다카요시와 조슈정벌의 승리를 이끌어 낸 다카스기 신사쿠가 있었습니다. 유신 3걸은 나중엔 조선 정벌과 대만 정벌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되고 세이난전쟁(西南戰爭)까지 치르지만 메이지 유신 초기에 국정을 이끌고 근대화 정책의 기틀을 세우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폐결핵으로 유신 1년 전 대정봉환을 목전에 두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였던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유신 4걸이라 불렸을 인물입니다.
기병대를 창설하여 조슈정벌을 승리로 이끈 다카스기 신사쿠, 1839~1867
이렇게 지역도 다르고 개성도 강한 인물들의 연합을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어 낸 것입니다. 삿초동맹 이후에도 그는 여러 다이묘들을 찾아다니며 대정봉환을 향한 치밀한 작업과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 수립에 골몰합니다. 근대적인 일본 해군의 창설, 양원제 의회제도 등이 모두 그의 아이디어였습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꼼짝 못 하고 무혈로 정권을 넘기게 하게끔 작업을 이어간 것입니다. 1867년 교토에서 대정봉환을 굳힌 쇼군의 마지막 회의에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종용한 인물도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인 도사번 출신의 중신이었습니다. 그는 사카모토 료마의 조언대로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없었다면 일본이 양분되어 도쿠가와 막부파와 존왕양이파 간 대규모 유혈 전면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사건이 무혈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피를 한 방울도 안 흘렸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대정봉환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대로 차곡히 밟아 간 사카모토 료마의 작전은 성공하였습니다. 1867년 10월 그를 비롯한 존왕양이파가 열망하던 대정봉환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교토에 머물던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입성해 이듬해인 1868년 4월 완전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그때인 1867년 11월 반대파로 추정되는 자객에게 암살되어 유신의 시작은 못 보고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습니다.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드라마 ‘료마전’에 출연한 료마(후쿠야마 마사하루), NHK 2010
4. 유신 3걸 - 개혁과 갈등
이렇게 264년 간 사무라이 정권을 이어오던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내고 유신은 멋지게 성공하였습니다. 일본은 이제 근대화의 새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삿초동맹 시 사쓰마번의 주축이었던 유신의 1등 공신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간에 균열이 생기고 둘 간엔 돌아올 수 없는 강까지 건너게 됩니다. 1877년 발발한 근대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천황의 절대 신임을 얻어 정치와 군사에 모두 능한 실력자였습니다. 그는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이 고향 친구이자 혁명의 동지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 출신인 기도 다카요시 등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자 고향인 가고시마현으로 낙향해서 사학을 운영했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은 그였기에 그의 학교는 매우 번성하였습니다.
정한론으로 실각한 유신 초기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 1828~1877
그런데 그를 따르던 하급무사 집단인 사족들이 유신 후 사무라이의 특권을 잃게 되자 반정부 거병을 한 것입니다. 유신 정부의 실권자 오쿠보 도시미치의 폐도령(廢刀令)에 의해 사무라이들의 칼 휴대가 금지되고, 녹봉 지급도 중지된 데다가 그들의 본거지인 가고시마의 무기들을 정부군이 반출해가니 이에 분노한 그들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주군으로 앞세워 죽기 살기로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과거 막부 때부터 골칫거리였던 열도 서남권에서 일어난 세이난전쟁(西南戰爭)의 발발입니다. 그러나 그사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을 사족들이 감당하기엔 힘이 부쳤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라스트 사무라이답게 할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후유증이 사라진 것입니다. 세이난전쟁은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배경으로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최후의 내전 세이난전쟁(1877) 기록화
남은 유신 3걸 중 2인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에게도 갈등이 생깁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함께 서구를 견학했던 이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몰아낸 정한론에는 함께 반대했지만 개혁 방향에선 이견이 있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기도 다카요시는 다분히 이상적인 개혁가인데 반하여 오쿠보 도시미치는 행정력을 갖춘 실무형 개혁가라서 그랬습니다. 출신지도 조슈번과 사쓰마번으로 나뉜 이 둘은 평생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둘 간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이러한 그들의 성향이 유신 초기의 정책 수립과 집행엔 이익이 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상호 견제로 이상과 실제가 조화된 개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둘은 결정적으로 대만 정벌에 이견을 보여 갈라서게 됩니다. 결국 오쿠보 도시미치의 뜻대로 일본은 1874년 대만 정벌을 강행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국사책에도 등장하는 류큐국이 오늘날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게 하는 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휘 아래 운요호 공격을 빌미로 조선 침략의 시작인 강화도 조약도 1876년 체결했습니다. 조선에겐 불평등 조약으로 20여 년 전 에도 앞바다에 뜬 미국의 흑선이 일본 막부를 상대로 한 압박과 같은 매뉴얼대로 조선에게 한 것입니다. 가히 냉철한 행정가 오쿠보 도시미치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결별 후 다시 만나게 된 그 둘은 한때 유신의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전쟁 진압엔 함께 앞장을 섰습니다.
유신 1기를 총 지휘한 오쿠보 도시미치, 1830~1878
이상적인 개혁가 기도 다카요시, 1833~1877
기도 다카요시는 1877년 그 전쟁 중 병으로 사망했고 오쿠보 도시미치는 진압 1년 후 1878년 사쓰마번의 사족에게 암살을 당해 죽습니다. 세이난전쟁에서 할복 자결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복수를 그의 추종자가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신 3걸이라 불리며 일본 근대화를 연 주축 3인방은 1년 사이로 모두 죽고 유신 2세대 정치인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 주도 세력은 사쓰마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의 죽음으로 삿초동맹의 또 한 축인 조슈번 출신의 인물들로 채워집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승계한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