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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08. 2022

일본 근대화의 기수 - 1

프롤로그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국을 한수 아래로 봐왔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그렇게 봐왔습니다. 나름 서로 그것을 인정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역방향으로 일본은 우리를 한수 아래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조선을 한수 아래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인 중국과는 비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후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우리도 따돌리고 중국도 따돌렸습니다. 이런 반전은 일본이 가장 먼저 근대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근대화를 이루었고 선진국이 되었을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주요 인물 중심으로 10개의 토막으로 나누어 5회에 걸쳐 써보렵니다. 제 좁은 시각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근대화는 1853년 일본 앞바다에 출몰한 검은 배에서 출발합니다. 그 배를 보고 각성한 사상가와 행동가들이 근대화를 위한 이론을 정립하고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유신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 사카모토 료마 - 삿초동맹 / 유신 3걸 - 개혁과 갈등 / 폐번치현 - 야마구치현 하기 / 요시다 쇼인 - 존왕양이론, 정한론 / 군국주의자들 - 태평양전쟁 / 더글라스 맥아더 - 연합국 최고사령부 / 일본 근대화 - 미국 / 일본 선진화 - 미국]



1. 후쿠자와 유키치 - 탈아론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가 되었고 가장 먼저 선진국이 된 국가입니다. 통상 사가들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을 그 시작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을 한수 아래로 보고 침략과 약탈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우월감과 자신감은 당시 아시아의 대국인 중국의 청나라와 1894년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인 1904년 유럽의 대국인 러시아에게도 승리하며 절정에 달합니다. 전쟁의 이름은 청일과 러일이지만 둘 다 조선을 놓고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일어난 남남끼리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연이은 승전보로 장식하며 대망의 20세기를 축제 무드로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의 눈에 아시아의 국가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이후 혁명으로 새로 일어난 소련 정도가 그들의 경쟁국으로 보여졌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서세동점으로 서양의 제물로만 여겨졌던 동양의 동쪽 끝, 거기에서도 바다 건너 섬나라인 일본이 구미 열강들과 동등한 테이블에 앉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사실 러시아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캐나다만 들어가면 그로부터 100여 년 후인 지금 선진국의 대표 격이라 불리는 G7과 같은 멤버라 하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탑 선진국의 리스트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계몽 사상가로 사학 명문 게이오 대학을 설립한 교육가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에 게재한 탈아론(脫亞論)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요약하면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조선은 어차피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어 국토가 분열될 것이니 일본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문명대국인 서구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중국의 개화를 기다려 함께 가기엔 여유가 없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이웃나라라고 특별히 대우하지 말고 서구 국가들이 대하듯 일본도 그렇게 대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을 가리켜 동방의 나쁜 친구(惡友)들이니 이제 그들을 사절하자며 그의 탈아론은 끝을 맺습니다.


일본의 탈아론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 1835~1901


한마디로 일본은 이제 아시아의 일원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국가의 일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었던 아시아의 인접 국가들은 어차피 서구 열강의 먹이가 될 터이니 남이 먹기 전에 일본이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대로 이후의 역사는 실제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탈아론을 주장하기 1년 전인 1884년까지는 김옥균을 비롯한 조선의 개화파가 벌인 갑신정변의 조력자였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정변이 실패하고 조선이 다시 청나라로 기울자 더 이상 함께 가기 힘들다고도 단정해서 내린 선언입니다. 그렇다고 갑신정변이 성공했다 해서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공했다면 일단 만주국 같은 일본의 괴뢰국가를 한반도에 세웠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전까지는 조선을 침략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힘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일본 보수 우익의 시조이자 메이지 유신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1850년대 이론적으로 정립한 정한론은 현실 정치에선 유신 3걸 중 한 명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3년 조선을 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유신 3걸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등의 반대에 의해 정한론은 꺾였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 선진국을 견학하고 온 그들이 유신 상황에서 지금은 내치에 전념해야 할 때라는 주장을 편 것이 더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 사이고 다카모리의 죽은 정한론이 12년 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아시아를 벗어나자는 더 확대된 탈아론으로 진화되어 부활한 것입니다.


물론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정벌 불발로 실각 후 실권을 잡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 하에 1874년 대만을 정벌하고, 1875년 운요호로 조선의 강화도를 공격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정한론의 서막을 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침략의 전초 단계이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한 것과 같은 전면 전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실직한 사무라이(侍)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서도 조선 침략을 주장했습니다. 그 300여 년 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2. 대정봉환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간단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천하를 통일한 후부터 그간 사무라이들이 갖고 있던 정권을 1867년 본래 주인인 천황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보다 간단히 성사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새로 에도(도쿄)에 터를 잡은 막부(바쿠후, 幕府)의 지도자 쇼군(將軍)이 최고 실력자였습니다. 막부는 야전 지휘관의 장막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정치적 권력까지 가진 쇼군의 정부를 칭합니다.


당시 천황은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 거주하며 상징성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도쿄에 거주하는 일본의 천황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칼 찬 무사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일본을 지배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은 변해 칼이 아닌 신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서구 열강들이 일본 앞바다에 출현해 문을 열라고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1853년 에도 앞바다에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 함대의 출현은 그들을 꽤나 놀라게 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재들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흑선 함대의 출현을 이전과는 다른 국가적인 위기라고 본 선각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무라이의 캡틴인 쇼군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로는 격변의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 보고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기치 하에 무사계급이 차지한 정권을 천황에게 다시 돌려주자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추진합니다. 존왕양이, 왕인 천황을 옹립해서 오랑캐인 서양의 외세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과는 다른 것입니다. 절대 권력자인 중앙 막부의 쇼군에서 그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방 행정 구역인 번(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로, 그리고 그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급무사와 그 아래 하급무사로 연결된 봉건주의 시스템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천황 중심의 강력한 왕정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외세와 맞서 싸우고 물리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에서 '간단히'란 표현을 썼듯이 생각보다는 쉽게 성공하였습니다. 고려말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의 첫 왕 이성계에게 마지못해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곱게 정권을 넘기듯 마지막 쇼군인, 아니 마지막 쇼군이 되어버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큰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에 순순히 응한 것입니다. 264년 전 그의 선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두견새가 울 때까지 집요하게 기다리며 전설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장구한 인내 끝에 쟁취한 권력을 그렇게 허망하다면 허망하게 내려놓은 것입니다.


대정봉환에 응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1837~1913


그렇다고 막부와 존왕양이파 간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정봉환 과정에서 중앙 막부의 사무라이들과 혼슈 끝 조슈번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가 창설한 민병대 간 2차에 걸친 전쟁인 조슈정벌(長州征傠)이 있었고,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도쿠가와 가문에 끝까지 충성을 맹서한 막부군과 반막부군 간에 일어난 보신전쟁(茂辰戰爭)이 있었습니다. 막부 잔존 세력들은 북쪽 바다 건너 홋카이도까지 밀려나 야경이 아름다운 항구 하코다테에 1869년 에조 공화국이란 일본 최초이자 마지막인 5개월짜리 공화국가를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크기에 비해선 미미한 충돌이었습니다. 저로선 메이지 유신에서 이점이 가장 놀랍습니다. 쇼군은 전국의 정권과 군권을 쥔 총사령관이니 죽기 살기로 반대파를 제외한 전국 모든 번들의 다이묘와 그들 휘하 군사들을 소집해 끝까지 존왕양이파와 크고 집요하게 붙을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과거 전국시대 말 천하 패권을 놓고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이 둘로 갈라서서 일전을 벌인 그의 선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서군 간에 벌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과거 역사에서 숱하게 보았고, 오늘날에도 보듯 정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변모한 메이지 천황, 1852~1912


1867년 30세의 젊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세로 부상한 존왕양이론자들의 설득과 권유로 대정봉환에 응했습니다. 교토에서 소환한 17세의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정권을 넘긴 것입니다. 이로써 1603년 세워진 일본 세 번째 막부 정권인 도쿠가와 막부가 끝남과 동시에, 1192년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시작되어 700여 년을 이어온 일본의 막부 체제는 영원히 열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일본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엔 국가의 위기 앞에서 소탐대실 않겠다는 실리를 앞세운 냉정한 일본의 국민성도 한몫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시대적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 마지못해 내려놓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거기에 마지막 쇼군의 판단 미스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새 시대 천황 체제 하에서 2인자로 자리를 지킬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도 대정봉환 직전 교토에서 마지막 쇼군인 그가 당시 그곳에 체류하던 40여 개 번의 중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격렬한 토론 끝에 대정봉환을 결정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라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일전을 준비 중이던 삿초동맹의 반막부파들이 쇼군의 대정봉환 결정을 의심하며 허탈해할 정도였으니까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20세기 초 사면되어 공작 작위를 받고 유유자적 삶을 즐기며 당시로는 천수인 76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그를 타도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20세기 전에 모두 요절한 것과는 대조적이라 하겠습니다.


대정봉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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