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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an 01. 2022

눈눈눈눈

12월이 끝나가도록 서울과 수도권은 눈이 잠잠한 편인데 강원과 남부 지방은 눈으로 인한 설화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넘긴 오늘 아침 제주 공항은 눈으로 인해 활주로가 폐쇄되었다는 뉴스까지 방금 접했습니다. 그곳에선 지금 눈 때문에 잡혀있어 동동, 한파로 추워서도 동동 발을 구르고 있을 것입니다. 수은주는 올해 들어 가장 차가운 날씨로 서울 기준 최저 온도가 영하 15.5도를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바야흐로 동장군의 위력을 실감하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크리스마스인 어제까지는 추위도 눈도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추위와 상관없이 얼마라도 좋으니 크리스마스엔 눈이 내리길 기대했었지요. 크리스마스는 뭐니 뭐니 해도 화이트 크리스마스이어야만 한다는 신앙이 우리들 가슴속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큰 눈을 몇 번이나 마주하며, 아니 맞고 살았을까요? 사실 근자엔 서울 하늘 아래에선 그렇게 왕창 떨어지는 큰 눈을 본 적도, 걸을 때마다 푹푹 빠지는 수북이 쌓인 눈을 밟은 적도 제 기억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릴 적엔 내렸다 하면 무조건 풍성하게 느껴졌던 눈인데 말입니다. 그땐 눈이 오면 바로 뛰쳐나가 동네 친구들과 눈밭에서 구르며,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을 굴렸던 기억이 납니다. 경남 거창에 있는 모 고등학교가 첫눈 내리는 날은 수업 중이라도 전교생 모두가 학교 뒷산에 올라 토끼를 잡는다는 것이 화제가 됐던 시대였습니다. 그 학교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상하게 그때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더 추웠던 것은 맞겠네요.


퍼~얼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이렇게 우리 기억 속에 눈은 왔다 하면 풍성하게 왔고 그 눈에 대한 기억이나 인식은 대개는 좋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랬을까요? 어쩌면 눈이 좋게 묘사된 그림, 사진, 영화, 그리고 드라마 등에서의 기억까지 작용해 눈에 대한 기억이 눈이 쌓이듯 좋게만 쌓여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특히 매눈이 오든 안 오든 눈을 등장시키는 하얀 크리스마스는 에 대한 그런 긍정 작용을 강화시키는 결정판일 것입니다. 이것을 포지티브한 과장성이라고 부른다면 우리의 성장기 어떤 시점의 눈은 그 긍정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눈에 대한 포지티브한 과장성이 극대화되는 시기, 첫째는 위에서도 얘기한 어린 시절 동심의 눈입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 눈은 차갑기는커녕 오히려 포송 포송 호호 따스한 기운까지 올라올 것입니다. 추워도 춥지 않은 것이지요. 그들에게 눈은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내려주시니 선한 물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 그치고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고요와 평화, 그리고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일 것입니다. 그 앞에 서있는  어린이는 그 은세계를 망칠까 싶어 감히 그곳에 발자국 찍는 것도 망설이게 됩니다.


폭설로 야기되는 눈사태, 교통마비, 그리고 녹을 때 남기는 지저분한 잔해 등은 아이 세계의 눈엔 보이지 않는 어른 세계의 눈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쌓이기도 전에 하염없이 비와 삽으로 제거했던 제설작업에 투입된 군인들에게서 몇 년 전 동심의 눈으로 봤던 눈을 기대하긴 힘들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눈 다 내린 후 작업하면 될 것을 내리는 중에 계속 반복해서 치우고 치우며 비질과 삽질을 해댔던 저의 군생활이었습니다. 헛수고입니다.


1968년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의 대표작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시마무라는 묘한 사각관계의 남녀 설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허무한 심경으로 '헛수고'란 말을 남발합니다. 도쿄에 사는 시마무라가 찾은 설국은 눈이 많은 니가타현의 에치고 지방이었습니다. 제가 <설국>의 시마무라처럼 헛수고를 되뇌며 제설작업을 해댔던 곳은 겨울이면 에치고처럼 설원이 펼쳐진 철원이었습니다.


영화 ost가 들릴 것만 같은 '러브 스토리'의 한 장면


눈의 포지티브한 과장성은 성장기의 연인에게도 해당됩니다. 대개는 첫사랑을 맞는 나이대일 것입니다. 당시 겨울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눈은 곧 사랑입니다. 하늘에서 선녀님들이 펄펄 쏴주는 사랑의 하얀 축포인 것입니다. 영화 '러브 스토리'의 연인 알리 맥그로우와 라이언 오닐이 그 유명한 ost에 맞춰 눈밭에 쓰러지고 그 속에서 뒹구는 장면은 그런 사랑의 백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눈 오는 날엔 헤어지지 않습니다. 그날은 만남의 날입니다. 비 내리는 날 이별하고 눈 내리는 날 재회하는 청춘입니다.


한쪽에서 "우리 언제 다시 볼까?" 하며 재회 시점을 묻는데 그 시점을 딱히 단정하기 힘들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상대 이성의 대답은 대개 "응? 첫눈 오는 날.."입니다. 저는 그렇게 물은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이것이 실제 그런지, 아님 클리셰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린 지금까지 첫눈 오는 날 재회하고자 하는 숱한 연인들을 봐왔습니다. 실제 재회를 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울러 첫비 오는 날 다시 보자고 하는 연인들은 저도 그렇지만 들어기억들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눈은 우리말 국어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첫아이, 첫돌, 첫날, 첫사랑처럼 첫눈은 관형사인 첫을 붙여서 그 자체로 완전 명사가 되는 몇 안 되는 단어니까요. 우리의 국어사전은 눈처럼 이런 의미 있는 단어에만 합성어로서 첫을 띄지 않고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예로운 첫을 부여받은 단어들이기에 그날은 그만큼 이벤트로서의 가치도 크다 할 것입니다. 첫아이만큼이나 첫눈이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첫비도 실생활에선 별로 쓰고 있지 않지만 눈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인가 붙여 쓰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첫사랑과 대척점에 있는 첫이별을 이렇게 붙여 쓰면 받아쓰기에서 오답 처리됩니다.


제 일생 가장 많은 눈을 본 것은 국내가 아니고 해외였습니다. 2017년 11월 북이탈리아 알프스 중턱 설원에서 업무상 CF 촬영을 진행하며 본 눈이 그랬었고, 그해 초 2월 일본 혼슈 북쪽 끝 아오모리 설국 여행에서 본 눈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산장 호텔을 향해 버스가 올라가는데 제설작업으로 길옆으로 밀어낸 눈이 버스 키만큼 각이 잡혀 올라와있었으니까요. 마치 천정이 없는 터널을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아, 더 전인 1995년 유럽 배낭여행에서 오른 스위스 인터라켄의 융프라우 요흐의 눈도 양으로 치면 당연히 저의 라이프 기록에 들어가겠네요.


북해도 아래 아오모리의 설국 전경. 2017. 2


눈의 양이 워낙 많아 눈들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눈은 불가산 명사이니 그렇게 복수형으로 쓸 순 없습니다. 그래도 그냥 눈이라 부르기엔 양이 차지 않아 눈눈눈눈이라고 불러 봅니다. 생경스럽긴 하지만 사자성어로 쓰니 뭔가 있어 보이고 풍부하게 보이긴 합니다. 제가 위의 경험했던 눈눈눈눈은 당시 업무에 꼭 필요했고 눈으로 인해 그 여행이 즐거웠기에 위의 동심과 사랑의 눈처럼 과장 없는 포지티브한 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자성어 눈눈눈눈을 저보다 먼저 쓴 분이 계십니다. 눈처럼 하늘이 내린 목소리를 가진 가수 들국화의 전인권님으로 '눈눈눈눈'은 그의 노래 제목입니다. 이 노래엔 특이하게 멜로디, 가사와 함께 그림도 따라다닙니다. 대개 노래엔 그림보다는 사진이나 영상이 따라다니는데 '눈눈눈눈'엔 그림이 함께 한 것입니다. 그것도 일반 채색화나 스케치가 아닌 만화 그림이 함께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캐릭터로 유명했던 독고탁을 등장시켜 우리 어린 시절 만화 속 그의 불타는 정의감을 독자인 우리에게도 전수시킨 이상무 화백의 만화가 노래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이상무 화백은 안타깝게도 6년 전 겨울 1월에 작고하셨습니다.

2015년 겨울 전인권님은 12월 이맘때인 연말 공연에 무대 배경 영상으로 쓸 요량으로 이상무 화백께 그림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만큼이나 쓸쓸함이 배어있는 서정적인 그의 노래 '눈눈눈눈' 배경에 이상무 화백의 만화 스타일과 터치가 적합하다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국> 소설의 남녀 주인공인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설국에서 재회하듯, '눈눈눈눈' 노래에선 독고탁 만화의 남녀 주인공인 독고탁과 숙이가 성인이 되어 설국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그전엔 일면식도 없던 두 분이었지만 합이 맞은 거인은 서로 흔쾌히 작업을 하였고, 그렇게 완성된 이상무 화백의 눈 그림을 무대 뒤 영상으로 한 전인권님의 연말 공연도 당연하게 잘 마쳤습니다. 그리고 해를 넘겨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상무 화백예고 없이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에 전인권님은 무대 영상으로만 쓰기로 했던 그의 그림을 우리나라 만화사에 큰 획을 그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노래와 함께 편집을 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계획에 없던 '눈눈눈눈'의 뮤직 비디오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무 화백의 그림은 본의 아니게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성인이 된 독고탁과 숙이 재회하는 이상무 화백의 유작 '눈눈눈눈'


눈이 오는 새벽 옛사랑이 찾아오고

눈 그친 하늘 새벽별 춥게 떠있어

한번 더 키스하고 사랑을 말하고

다시 또 눈이 와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따뜻해진 새 세상..


읊조리듯 잔잔한 전인권 님의 보컬에 이상무 화백의 아날로그 스틸 애니메이션이 오늘 또 보고 들어도 따뜻하게만 느껴집니다. 눈눈눈눈이 훈훈훈훈..

Happy New Year!


https://youtu.be/YHERuSe3nPc




* 눈눈눈눈 이 글은 1년 전 이곳 브런치에 썼던 글을 개보수하여 리뉴얼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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