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책의 이야기입니다. 그쪽 분야에 워낙 문외한이다 보니 뭘 쓰기엔 잡히는 것도 없고 소감도 없어서 오늘까지 그냥 왔는데 그 책의 경이로움만은 여전히 살아있어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사전 정보 없이 일반 역사책으로 알고, 그것도 제목으로 상상되는 이런저런 잡학의 역사가 기록된 책이 아닌가 하고 집거나 구매한다면 일단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낭패감을 안고서라도 앞에 책이 있으니 일단 책장을 넘겨 목차를 훑어보고 좀 읽어 나가기 시작하면 그 신박한 경이로움에 찬사를 아니 보낼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역사책이!" 하는 탄성과 함께 말입니다.
역사책은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봐 온 그런 범주의 히스토리가 아닌 다른 역사입니다. 그렇게 역사의 주체와 대상도 참신하지만 제 기준에선 끄집어낼 게 그렇게까지 많지 않을 것 같은 그 역사에 작가가 등장시키는 소재의 방대함과 서술의 꼼꼼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빌 브라이슨(Bill Bryson)이라는 저자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역시 세계는 넓고 고수는 즐비합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보다도, 그리고 국사보다도 더 우리 삶에 착 달라붙어 있는 역사입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작가 빌 브라이슨, 1951~
이 책을 읽기 전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가까운 변호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분을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것은 꼭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만이 아닙니다. 제가 배울 것이 많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자기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시선이나 본인의 감정적 요소에 별로 좌우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한 삶의 길을 가십니다. 감정은 본인의 영역이니 그렇든 말든 상관없지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사회생활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선별적으로 골라서 일을 해도 경제적으로 문제없는 삶이 이어진다면 그 또한 별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제 거실에서 TV를 스쳐 지나가다 보인 화면 속 어떤 연사가 얘기하기를 꼭 일치하진 않지만 그런 류의 사람들은 평생 본인이 원하는 음식만을 먹으며 살 수 있는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늘 혼자서 밥을 먹거나, 먹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아, 그 형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재미와 과장을 더 한 말일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그 장면이 떠올라 이렇게 씁니다.
여기에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눈치를 보거나 별로 영향을 안 받는다는 것이지 배려를 안 하거나 손해를 끼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형님의 그런 강단 있는 모습이 좋아서도 제가 그분께 호감을 느끼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그 형님을 넘사벽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독서량입니다. 많이도 읽으시지만 이해가 안 된다 싶은 책이 번역서라면 원서를 구입해서라도 읽습니다. 그리고 원전이 있는 영화는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연출자의 편견이나 생략을 피하기 위해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감상하십니다.
한마디로 피곤한 분이시지요. 하지만 놀랍지 않습니까? 과거 중세나 근대의 천재들이 고대의 인문학 서적을 제대로 깨우치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했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분은 지금 라틴어는 아니고 일본어를 도전 중에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늘 그러하듯이 그날 그 형님과의 만남도 즐겁고 유익하게 흘러갔는데 어느 시점 이 글 제목에 올라와있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란 책을 이야기하며 저보고 읽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보고 늘 책을 안 읽는다고 꾸짖는 분이십니다. 저는 단번에 자신 있게 "No!"라고 대답하며 읽기는커녕 작가도, 책도 다 금시초문이라 했더니 저를 지극히 한심하게 쳐다보며 저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일독을 강하게 권고하셨습니다. 저는 대충 심드렁하게 그러겠노라 대답을 하고 그날 자리를 파하고 귀가했는데 집도 도착하기 전에 득달같이 카톡이 하나 날아왔습니다.
그 형님께서 그 책을 주문해서 선물로 배송한 것을 알리는 톡이었습니다. 제가 안 읽었다는 것을 못 참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혹여 대답해놓고도 안 읽을까 싶어 그렇게 강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위하거나, 또는 못 믿거나 한 마음에서 지갑을 여신 것이겠지요. 아마 못 믿는 마음이 더 크셨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 수중에 그 책이 들어왔고 독서까지 하였는데 차일피일 미루던 그 인증 독후감을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봄볕이 길게 치고 들어온 우리집 앞 카페, 2022, 3, 22
저는 지금 이 글을 우리집 앞 카페에서 시작하였는데 창으로 길게 들어온 봄볕이 너무 좋습니다. 가는 마지막 겨울이 이미 와있는 봄을 시샘하여 마지막이라면 좋을 꽃샘추위를 뿌리고 간 다음날이라서인가 그 춘광이 훨씬 밝고 따뜻하게 느껴지네요. 제가 독후감이라면서 이렇게 계속 번외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것은 뜬금없이 갑자기 보인 봄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아직도 쓸 내용이 잡히지 않아서도입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저이지만 빌 브라이슨이 쓴 이 역사에 대해서는 제가 워낙 무지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나 봅니다.
세상은 한 세계(One World)라지만 그 안엔 대개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해있습니다. 북반구&남반구, 대륙&대양, 동양&서양, 낮&밤, 생물&미생물, 동물&식물, 남자&여자, 자본주의&공산주의, 보수&진보, N극&S극, 코카콜라&펩시콜라, 맥도널드&버거킹.. 등 이렇게 세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 마리 말이 달리는 것이 아닌 두 마리 말이 달리며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마케팅에서도 등장하는 법칙이고 용어(two-horse race)입니다. 그렇게 돼야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쳐 넘어지지 않고 둘 다 앞으로 잘 나아갈 것입니다. 학문도 크게 보면 문과와 이과 두 개가 있지요. 인류는 이 두 개의 학문을 고래로부터 발전시켜 오늘의 현대문명을 이루었습니다. 그 두 개의 학문이 이룬 문명은 크게 보면 문과는 정신문명이고 이과는 물질문명일 것입니다.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이과의 역사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과학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그 범위가 워낙 방대해 우리 고등학교 학력고사 시 이과 전공과목인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을 모두 통합한 역사라 하겠습니다. 전 문과 출신이라 그 수업들 중 시험에 필요한 하나만 선택해서 들었지만 이 책은 이과생들이 배웠던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수능 세대 이전 학력고사 세대는 그렇게 대입 시험을 치르었습니다.
세상의 절반, 이과의 역사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003 출간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총, 균, 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우리가 알던 기존의 역사책과는 다른 역사를 쓴 작가들입니다. 통상 역사라 하면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다루며 군주와 영웅, 전쟁과 평화 등의 서사시가 주로 등장하는데 이 책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책들을 처음 대했을 때에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일단 그 책을 쓴 "이 인간들은 뭐지?" 하는 마음이 우선 들었습니다. 그렇게 방대한 인류 문명의 역사를 많은 데이터와 함께 한 줄로 꿰어 두꺼운 책에 담았으니까요. 천재의 재능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노력에 대한 경이감이 든 것입니다. 데이터 서치와 조합, 그리고 추출은 재능으로만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시간적인 노력도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그랬습니다.
<총, 균, 쇠>보다는 히브리 대학의 교수인 유태인 유발 하라리 쓴 <사피엔스>가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그만큼 경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문과였던 제가 무지한 과학 분야의 역사이다 보니 제게 어느 정도는 익숙한 <사피엔스>와는 다른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사피엔스>가문과 전체의 역사라 하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이과 전체의 역사라 할 것입니다. 그 책들은 마치 그 작가들이 지구라는 같은 학교를 다니며 문과 1등인 유발 하라리와 이과 1등인 빌 브라이슨이 각각 쓴 것처럼 보입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서문부터 흥미롭게 시작합니다. 제가 이 책을 펴게 된 것을 환영한다며 그 환영의 이유가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 언제일지도 모를 아주 먼 옛날 미세한 원자에서 출발하여 38억 년 전 생명체를 이루고, 그것이 진화되어 포유류가 되고, 또 진화하여 인간으로 되어 그 인간 중의 후손인 제가 존재한 것일 텐데, 그러려면 그 옛날 첫 생명체부터 대대로 제 선조의 친가와 외가가 건강하고 매력적이어서 짝짓기에 계속 성공하며 살아남아야 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니, 그 어려움을 뚫고 온 저를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눈길을 끄는 시작 아닙니까? 그러면서 작가는 이 책은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책이라고 밝힙니다. 그다음 본문 책장을 아니 넘길 수밖에 없는 서문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현생 인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시 지구엔 오늘날 우리와 유사한 생명체인 영장류 6종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중 사피엔스가 그들을 다 물리치고 승리해 지구에 단 한 종인 우리 인간만 생존해있다고 말입니다. 당장 우리 곁에 알짱거리며 노니는 개만 해도 다양한 크기와 모습으로 400여 품종이 있는데 말입니다.
세상의 절반, 문과의 역사 <사피엔스>와 후속편인 <호모 데우스>
반면에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서문에서 감지되듯 인류 훨씬 이전 우주의 생성부터 지구의 출몰, 생명체의 시작과 진화 등을 거쳐 현대 과학에 이르는 역사를 총망라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치면 첫 편 창세기의 첫 장에서 6일 동안 하나님이 열심히 작업하신 세상과 인간 창조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그 이전 단계부터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이 책이 출발하여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모든 과학적인 원리와 법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간 우리가 들어왔던 유명 과학자들과 그들이 발견하고 발명한 성과와 무슨무슨 법칙 등이 시대별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학술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적절한 예를 들어 풀어 주고, 거기에 양념으로 작가의 유머 감각까지 뿌려 넣어 저와 같은 문외한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적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영국의 <더 타임스>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로 꼽힐 정도로 작품 속에서 유머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만큼이나 작가 빌 브라이슨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인이 된 그는 포탈에 이름을 치면 바로 확인되듯이 꽤나 많은 책을 저술한 다작 작가입니다. 그런데 타 작가들과 다른 것은 그가 쓴 책들의 일관성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과학 교양서인 이 책 이외에도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 산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나를 부르는 숲>,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바디: 우리 몸 안내서>, <고독한 이방인>, <빌 브라이슨의 성가신 단어 사전>, <작은 섬에서 부친 편지>, <모국어>.. 등 거의 산만하다 할 정도의 다양한 장르와 주제의 많은 책들을 쓴 그였습니다. 생존 작가이니 지금도 새로운 소재의 어떤 책을 쓰고 있을지 모르지요. 그가 쓴 책들의 제목이나 비평가의 여러 서평으로 봤을 때 굳이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아이덴티티가 있다면 그것은 유머일 것입니다. 미국식과 영국식이 믹스된 그만의 독특한 유머로 인해 그가 쓴 어떤 장르의 책을 읽어도 책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독자는 즐겁고 유쾌하게 독서를 할 듯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그의 이력 중 또 놀라운 것은 영국의 더럼대학 총장을 6년 간(2005~2011) 엮임 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 기자 생활을 하며 작품을 쓰던 그가 대학 총장이 된 것도 놀랍지만 그 학교가 더럼대학이라는 사실은 더 놀랍습니다. 그 학교는 영국에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잉글랜드 북부의 대학교입니다. 당연히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명문입니다. 영화 <킹스맨>에서 초 엘리트들이 지원한 킹스맨 지원자 중에 더럼대학 출신이 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렇듯 종횡무진한 삶을 산 빌 브라이슨은 전형적인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라 할 것입니다. 천재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천재도 그 재능과는 별개로 방대한 데이터 수집을 위해 시간이 투입되는 노력을 이야기했듯 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이 책을 쓰기 위해 그는 무려 3년간 공부를 했다고 하니까요. 아, 무려가 아니네요. 빌 브라이슨 그니까 그 짧은 시간 안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누구든 이 책을 처음 읽게 되면 그 방대함에 이렇게 저와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는 양성자도 모르고 단백질도 몰랐고, 쿼크와 준성은 더더욱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런 것들을 밝혀내는지가 궁금하고 흥미로워 공부를 시작하고, 책을 썼다고 합니다. 공부하며 모르는 것은 세계 각국의 대학, 박물관, 연구소, 도서관, 국립공원, 천문대 등의 석학과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하여 답을 얻어 내었습니다. 천재에 더해진 대단한 열정이고 노력입니다.
2003년에 이 책이 세상에 나왔으니 1951년 생인 그가 52세에 완성한 책입니다. 우리 나이로는 지천명인 50세 뒤늦은 나이에 복잡하고 어려운 이과에 도전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입니다. 그리고는 2년 후 더럼대학 총장이 되었네요.
오래간만에 읽은 과학 관련 서적입니다. 이 책을 선물해준 그 형님의 지적대로 책을 잘 안 읽는 제가 그나마 어쩌다 읽는 책은 주로 인문학과 예술, 역사 등에 치우친 편독이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왠지 미세하나마 균형을 맞춘 느낌입니다. 자전거는 두 바퀴로 가고, 새는 두 날개로 날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온전하게 책의 내용을 습득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머리가 지금보다 잘 돌아갔던 과거에도 흥미 없고 약했던 이과 학문의 기량이 지금 생성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독서의 기쁨 중 하나는 중도 포기 없이 완료했단 것만으로도 뿌듯함과 성취감이 오기도 하는데 이 책의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인 빌 브라이슨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딱딱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간 이과의 역사를 넘치는 유머와 위트로 술술 풀어놔 책의 마지막 장까지 고민 없이 오게 하였으니까요. 그런 이 책을 선물해주신 그 형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