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Mar 31. 2022

누가 이 아버지와 아들을?

아버지와 아들 by 투르게네프

요즘 흡사 주말부부처럼 주중엔 안 보이다가 주말이면 나타나는 개성 강한 주말부자(週末父子)가 있으니 그들은 KBS1 TV의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입니다.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과거 같은 그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과 같은 소재의 다른 제목입니다. 이번엔 드라마의 포커스가 아버지보다는 아들에게 많이 가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같은 소재의 역사적 사실을 같은 방송국에서 또 드라마로 방영하는 것을 보면 그 역사적 사실의 중요도를 떠나 그만큼 시청자에게 흥미를 끄는 요소가 크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시청률을 견인하는 그 흥미 요소는 바로 '아버지와 아들'일 것입니다. 인간사의 영원한 테제이니 유인력이 클 수밖에 없는 소재입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도 이미 많이 봤고, 뻔히 다 아는 아버지와 아들 이성계와 이방원의 이야기지만 요즘 그 드라마를 또 보고 있어도 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를 보면서 많은 아버지들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안 계신 제 아버지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우리 역사상 그들 부자만큼 시끄러운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씨 조선만 보더라도 당장 위의 태종은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자 그의 아들 양녕대군과 갈등을 겪어 그를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후기로 가면 아버지 영조의 서슬 퍼런 분노로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아들 사도세자도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둔 그의 아들 정조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와 아들 트라우마에 시달린 피해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대원군과 척을 져 페이스를 잃고 망국의 군주가 된 무능한 그의 아들 고종도 있습니다.


현재 방영 중인 KBS1 TV 주말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아버지와 아들


이렇듯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이임에도 종종 갈등과 충돌로 인해 파국까지 가는 상황이 연출되곤 합니다.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수컷 맹수들과 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이는 서양도 예외는 아닙니다.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 오현제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장에서 아들인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합니다. 실제는 그 야전에서 병사했지만 그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맞습니다. 코모두스 황제가 육현제로 못 이어가고 그의 아버지 대에서 오현제가 끊긴 것은 그가 그만한 지도자의 자격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역대 오현제는 아들에게 상속을 안 하고 뛰어난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자격이 안 되는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서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결국 그의 생은 암살로 마감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리스 비극 중 <킹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살해를 다룬 소포클레스의 연극입니다. 어렸을 때 신탁에 의해 왕궁 밖에서 자란 테베의 왕자 오이디푸스가 자라서 왕인 아버지를 몰라보고 살해한 후 왕으로 추대되어 왕비인 생모와 결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벌일 수 있는 비극의 끝판왕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아버지를 몰라 본 두 눈을 뽑고 평생 유랑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오늘날 현실에서도 아들이 아버지를 해하는 이런 류의 사건이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유전자라선가 서로 당기고 흡수하기보다는 밀어내고 부딪히는 속성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적대적이고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남아의 현상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불렀습니다. 반대의 경우는 역시 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왕 아가멤논과 그의 딸 엘레트라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근거로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부르지요.     


요즘 갑자기 이 사람이 궁금해졌습니다. 정확히는 더 궁금해졌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입니다. 집에 이 분의 책이 있습니다. 제 아들이 중학교 때 서점에 데리고 가서 제가 사춘기 때 읽었던 책들이라며 "너도 읽었으면 좋겠다"며 사준 여러 책 들 중 하나입니다. 헤르만 헷세, 앙드레 지드, 칼릴 지브란, 오 헨리 등 이런 대가들이 쓴 우리 중학교 시절 탐독했었던 그런 책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서가에 꽂힌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 제 눈에 띈 것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저는 그 책을 알고는 있지만 읽지는 않았던 책인데 왠지 제목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그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 그 책도 사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와서 예정에 없던 그 책도 아들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물론 제 아들의 아버지이자, 제 아버지의 아들이기도 한 저도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구매를 한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젤 무서운 나이가 중2라는데 그 책 안엔 제 아들이 아버지인 저를 대함에 있어 뭔가의 도움이 될만한 갈등 해법 같은 것이 있을 것만 같기도 했습니다. 투르게네프가 책 제목을 잘 지은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잊고 지내며 최근까지 왔습니다. 책은 여전히 깨끗했습니다. 부전자전으로 아들도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년이 된 아들은 2년 전 책장 정리를 하며 그 사이 혹시나 하며 <아버지와 아들> 독서 여부를 묻는 제게 그는 애당초 읽을 생각이 없었다고 큰 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리고 요새 누가 그런 책을 읽느냐며, 그건 아빠 세대 때나 읽었던 책이라며 더 이상의 대화를 피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계속 권고한다고 언성을 더 높여봤자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 간 갈등이 심화될 것 같아 더 이상 대화 진도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인 저도 그 책을 그때까지 읽지 않았으니까요. 투르게네프에게 죄송했습니다.    


이반 투르게네프, Ivan Turgenev, 1818~1883 / 일리야 레핀 유화, 1874


그런데 드디어 제가 그 책을 읽은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책도 무릇 때가 되어야 읽나 봅니다. 최근 저는 니체 관련 글(<니체 vs 19세기 유럽 개화기의 여성 작곡가>)을 쓰며 <아버지와 아들>보다도 집에 더 오랫동안 숙성시켜 두었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고 그 글에서 밝혔습니다. 그 글에 투르게네프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 니체 글에 등장한 19세기 여성 작곡가 중 한 명인 프랑스의 폴린 비아르도의 연인으로, 아니 꼭 투르게네프가 그녀의 연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관계였지만, 여하튼 그가 그녀를 평생 사랑했다는 내용으로 그를 짧게나마 등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잊고 살던 그가 다시 급 궁금해진 것입니다. 그 글에선 폴린 비아르도의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이제 투르게네프가 주연으로 등장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의 대표작 <아버지와 아들>을 읽어야 했습니다. 투르게네프, 기뻐하십시오.


대다수의 독후감들은 이 책을 가리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제목에서 유추되듯 아버지와 아들로 대표되는 신구 세대 간 갈등을 다룬 소설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저도 읽기 전엔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지레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에게도 독서를 권했던 것이고요. 하지만 저의 독후 일감으론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최소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갈등이나 충돌은 없습니다. 오히려 등장하는 두 가족의 부자 간 사이는 그 반대로 너무나도 좋습니다. 물론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로 그런 내용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19세기 중반 당시 러시아 사회의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신구의 시대적 갈등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것이 등장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인지상정 성격의 보편적인 심리와 행동이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고, 그 아들과 친구, 그 아들 친구와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과 연인, 아버지와 연인, 아들 친구와 연인, 아들 친구와 친구 부모 등 이 소설엔 아버지와 아들만큼이나 많은 양자들이 출연합니다. 그들 간 통상적인 로맨스처럼 남녀의 사랑도 나오고, 같은 세대인 친구 간 우정과 갈등도 등장하고, 아버지와 큰아버지 간의 형제애도 나옵니다. 이렇게 러시아 귀족 패밀리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사가 주로 나오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소소하게 묘사됩니다. 톨스토이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광대하고 화려한 러시아의 빅 스케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주로 묘사한 말단 인간의 힘겨운 생활과 범죄, 영혼 세계 등도 할애되지 않습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 사이에 껴서 사는 귀족의 이야기와 그들과 얽힌 평민의 일상적인 인간사를 마치 드라마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르카디라는 대학 졸업생 아들과 그의 대학 친구인 바자로프, 이 둘이서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져 펼쳐가는 소설입니다. 처음엔 아르카디가 주인공이었지만 끝날 땐 바자로프가 주인공입니다. 소설의 엔딩은 아르카디는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바자로프는 죽음이라는 새드엔딩으로 마감됩니다. 아르카디는 그가 좋아하는 여성과 결혼에 성공하지만, 바자로프는 그가 좋아하는 여성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대지주인 아르카디와 소지주인 바자로프 모두 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좋습니다. 특히 아르카디는 상처한 아버지가 그 몰래 하녀의 어린 딸과 동침하여 사생아를 낳았음에도 그 어린 동생을 축복해주고 아버지와 자기보다도 어린 그녀와의 재혼을 적극 지지합니다. 큰아버지도 그녀를 좋아하지만 동생의 여자이기에 동생과 그녀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고 해외로 떠납니다. 부자 간은 물론 형제 간에도 우애가 좋은 아르카디의 집안입니다.


투르게네프 묘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렇게만 끝나도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이렇게만 끝났다면 투르게네프의 이 소설이 오늘날처럼 에지 있게 평가받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일반 소설이 명작이 되려면 무언가 불편한 요소들도 들어가야 합니다. 통상 비평가들이 얘기하는 러시아의 신구세대 간 갈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이 아닌, 아르카디의 친구인 바자로프와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의 갈등은 그나마 이 작품을 긴장과 위기 속으로 몰고 갑니다.


어른인 파벨은 귀족주의, 슬라브주의, 지주, 부르주아, 보수, 예술, 전통 등을 상징하고, 젊은이인 바자로프는 허무주의, 유물주의, 실용, 진보, 인텔리겐차, 과학 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르카디가 바자로프를 그의 집에 손님으로 처음 들였을 때부터 매사 거세게 부딪칩니다. 큰아버지 파벨의 입장에선 조카 아르카디가 어디서 이상한 장돌뱅이 같은 놈을 하나 집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결국 귀족으로서 명예를 중시하는 큰아버지 파벨은 사사건건 지지 않고 맞서는 바자로프에게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그에게 권총 결투를 신청합니다. 권총 결투로 사망에 이른 투르게네프의 선배 작가 푸시킨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바자로프는 이것마저 가장 봉건적인 방법인 기사도 정신을 흉내 낸 것이라며 친구의 큰아버지를 비꼽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구 세대 갈등의 끝판인 결투가 나와도 그 주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 결투의 결정적인 이유가 바자로프가 친구 아르카디의 아버지의 여자를 별생각 없이 건드린 것에도 기인하기에 그렇습니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작품 속 결투 / 일리야 레핀, 1899


큰아버지인 파벨 입장에서 보면 자기 동생의 사생아를 낳은 여자이지만 그도 관심을 두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온 바자로프가 그런 그녀에게 진심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 키스하는 장면을 그가 목격하고야 만 것입니다. 이렇듯 파벨은 질투와 형제애가 섞인 복합적인 분노로 인해 결투를 신청한 것이지 신구 갈등 만으로 결투를 신청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을 파헤치다 보면 이렇게 그 끝엔 드러내기 힘든 인간의 본성이 나오곤 합니다. 대개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보다 더 큰 이유로 특정 사건에 작용하곤 합니다.


그전부터 바자로프, 파벨, 그리고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콜라이는 죽은 하녀의 딸인 페니치카를 두고 미묘한 행각들을 벌여 왔습니다. 이렇게 실제 생활에서도 충분히 있음 직한 다면적인 인간사를 글로 자연스레 보여주고 있기에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그런 생생한 리얼리즘이 신구세대의 갈등이라는 큰 주제를 작고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자란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서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유학한 것도 영향이 있겠지만 프랑스의 메조소프라노 오페라 가수이자 작곡가인 폴린 비아르도에 푹 빠져 일생을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 근처에서 산 그였습니다. 남편이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 남편은 그것을 알면서도 투르게네프가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폴린 비아르도 곁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그녀보다 먼저 죽은 그는 그의 유산을 모두 그녀에게 남겼습니다. 그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그의 순애보입니다.


투르게네프의 뮤즈 폴린 비아르도, Pauline Viardot, 1821~1910


러시아 문학의 국내 권위자인 고려대 석영중 교수는 그녀의 칼럼(<석영중 길 위에서 만난 문학>, 2021, 6, 18, 동아일보)에서 투르게네프에게 연민의 정을 보냅니다. 그가 러시아 문학에서 처한 처지는 위치를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워낙 아우라가 강한 두 작가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사이에 껴서 허겁지겁 힘겹게 그들을 따라가는 3인방 중 말석인 그였습니다. 그래서인가 <아버지와 아들> 소설 속 부잣집 지주 아들인 온순한 아르카디는 그를 연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는 투르게네프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보다 더 위대하고 드라마틱한 인생 장편 소설을 썼다고 평합니다. 184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빌리야의 이발사> 무대에서 폴린 비아르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무려 40년이나 그녀만을 일편단심 사랑하며 따라다녔으니까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를 연상하게 하는 투르게네프의 헌신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이츠도 평생 모드 곤이라는 민족주의자 한 여성만을 사랑하였으니까요. 그가 시를 발표할 때마다 그 사랑을 대놓고 절절하게 써서 공개 고백하듯 이어 간 사랑이었습니다. 차이는 모드 곤은 상처한 독신녀이고 폴린 비아르도는 유부녀, 그리고 예이츠는 결국 늙어서 결혼은 다른 여성과 했지만 투르게네프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없는 기이한 사랑을 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녀들도 참..   


독일 바덴바덴의 폴린 비아르도 살롱, 투르게네프도 그녀를 따라 1863년에서 1870년까지 바덴바덴에 거주


인류의 절반인 남자는 한 아버지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역시 또 아버지가 될 것이고 또 인류의 절반이 될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되기도 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아버지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시절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도 그 누구도 내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또 생각나는 내 아버지는 지금 제 나이 때 이렇게 봄이 오면 아들인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버지와 아들> 3장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한 시구가 나옵니다. 작가인 투르게네프가 의도를 가지고 인용한 것이겠지요. 소설 속 아버지 니콜라이가 상트페테르브르크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 막 돌아온 아들 아르카디를 마중 나가 그를 만나자마자 기쁨에 들떠 반기며 낭송해주는 시입니다. 이때 아들은 어리둥절해합니다.


봄이여, 봄이여, 사랑의 계절이여!

네가 찾아오면

어찌하여 이다지도 외로운지!

얼마나..


(출처 : <아버지와 아들> / 투르게네프 지음 / 최현 옮김 / 하서출판사 펴냄)


연강원(두산연수원)의 봄,  2019.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