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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07. 2022

두고오는 이별이 떠나보내는 이별보다 더 슬픈 것을

이렇게 칸이 꽉 찬 긴 제목을 달고 보니 작고한 김광석님의 명곡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가요 제목이 떠오르네요. 실은 이 노래를 생각하고 올린 제목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언뜻 느끼기엔 내용을 떠나 이 제목을 단 저부터도 "내가 나도 모르게 패러디를 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방금 검색도 해봤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장의 전개가 비슷하고 마지막 운이 같아서 그렇게 느껴졌나 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만 있던 제목을 막상 저렇게 글로 활자화시키니 눈으로 확인되는 문장에서 오는 서정성이 더해져서 그렇게 느껴졌나 봅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는 아닌데 말입니다.


덕분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노래의 가사를 처음으로 제대로 감상하였습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익숙한 김광석님의 이 음악이 자동으로 은은하고 쓸쓸하게 제 귀에 지원이 되었지만 제대로 가사까지 알게 된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제가 청음이 안 좋아서 노래든 어학이든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또 한차례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청음에 능한 친구들은 노래를 몇 번 들으면 가사를 따로 안 외어도 자동으로 외워지고, 외국어도 그렇다는군요. 그런데 전 그런 은사를 받지 못해 늘 귀와 눈이 분리되어 따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음치와 외국어 젬병의 가장 큰 원인이 그 시작점인 귀에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된 사실입니다. 일단 귀에 장애가 있으면 말을 배울 수도,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그것을 극복한 베토벤은 정말 악성(樂聖)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위대한 음악가라 하겠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저의 이 글 제목인 <두고오는 이별이 떠나보내는 이별보다 슬픈 것을>과 같은 이별을 주제로 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보니 구구절절 아름다운 이별시네요. 영어로 가사는 lyric인데 lyric은 본래 서정시를 지칭하니 세상 모든 유행가의 가사는 서정시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 노래의 작사가는 유명 현역 시인이라선가 독자나 청자에게 그 이별의 감성을 더욱 충만하게 다가오게 하는 듯합니다.  


마른 가지에 덩그러니 달린 달이 더 쓸쓸해보이는 양재천의 밤, 2018. 3


너무 아픈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인지 가사를 뜯어보니 이별 후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가 잊히기는커녕 더욱 절절이 생각이 나서 그 그리움은 아픔이 되고, 어느 순간엔 미워하게까지 되니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 얘기는 이별 후에도 지나간 사랑이 계속 사랑으로 기억되려면 이별 후 사랑의 아픔이 없거나, 또는 있어도 약간 있어서 안 아프거나, 적당히 아파야 한다는 것인가요? 누군가 이렇게 질문한다면 그는 참 속 편한 사람이란 소릴 들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랑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그런 사람은 차라리 청음이 안 좋아 가사는 안 들리고 멜로디만으로 은혜를 받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노래에서 너무 아픈 사랑을 준 사람으로 나오는 '그대'는 그녀일 것입니다. 김광석님은 딱히 성을 지칭하지 않고 끝까지 그대라고만 하였지만 이별 모습을 '가을새와 작별하듯', 이별 후 첫 행동이 '술잔 앞에 앉으면', 이별 후 그대 생각을 '지는 별빛 바라볼 때'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남자를 가리켜 가을새나 별빛으로 표현하고, 여자도 이별 후 술을 들이키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이별 감성의 보편성과 지금은 희미해진 그 옛날 저의 경험과 감으로 볼 때 너무 아픈 사랑을 준 그대는 여자가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이 역설적 명제를 쓴 시인도, 노래하는 가수도 다 남자입니다.


생각보다 김광석님의 노래 얘기가 길어졌네요. 이제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두고오는 이별이 떠나보내는 이별보다 슬프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의 글 흐름이나, 이글 제목에서 오도될지도 모를 남녀 간의 서정적인 이별 이야기가 아니니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첫 단락에서 제가 분명히 아니라고도 했지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이별 이야기입니다.

 

세상엔 두 가지 이별이 있습니다. 하나는 떠나보내는 이별이고, 또 하나는 두고오는 이별입니다. 같은 이별이지만 이별 장소에 따라 이렇게 이별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김광석님의 위의 노래는 가사에도 나오듯 떠나보내는 이별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별 중에서 어느 이별이 더 슬플까요? 물론 이별이라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 슬픔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과 그 대상과의 관계의 깊이가 이별의 아픔 정도를 결정하는 것이지 장소가 아픔의 정도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대상의 이별일 경우는 떠나보내는 이별과 두고오는 이별에 각각 슬픔의 정도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와 저의 아들 간에 일어났던 이별입니다. 저는 딸이 부재하기에 딸과의 이별은 있고 싶어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험은 없지만 저의 감으로 볼 때 만약 딸과의 그런 이별이었다면 훨씬 더 슬펐을 것입니다. 물론 그 슬픔이 아무리 크다해도 딸만 있다면야 그 정도를 감내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만 같은 무딸 아버지입니다. 이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지만요.


2017년 11월 중순의 일입니다. 저는 그때 런던에 유학 중인 대학생 아들을 만나러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출발지는 인천공항이 아닌 밀라노 공항이었습니다. 이유는 이듬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때 온에어 할 모 기업의 CF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에서 촬영을 마치고 귀국 길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부모인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딱히 무심한 것도 아닌데 그가 런던에 유학 중 입학식 때도 그렇고 그전까지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나마 처음 방문하게 된 저도 순수하게 아들만을 보러 일부러 갔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겸사겸사해서 밀라노에서부터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비용은 당연히 출장 비용이 아닌 제 개인 비용을 지불해서 주말을 껴서 시도한 방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런 저의 출장이 없었다면 저와 아내는 둘 중 누구도 끝내 아들 재학 중 런던을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 졸업식 때에도 역시 가지 못했으니까요.


런던 테임즈강, 새 단장 중인 빅벤, 2017. 11
150여년 전 강 건너 편, <Reflections on The Thames London>, 존 앳킨슨 그림쇼, 1836~1893


이윽고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절 마중 나온 아들을 만났습니다. 당연히 너무나도 반가운 조우였습니다. 오래간만이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그가 유아기 때부터 어디를 갔었든 헤어진 후 다시 만나는 것은 집이든, 역이든, 공항이든 우리나라 안이었는데 외국에서 아들을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런 이국적인 색다름도 더해진 반가움이라 그랬을 것입니다. 지금 이런 소재의 글을 써서 그런가 제가 최근에 독후감으로 쓴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버지 니콜라이와 아들 아르카디가 만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소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아들을 만나 기뻐하는 부자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설 속 생기발랄한 아르카디의 모습과는 달리 런던에서 만난 아들의 모습은 많이도 찌들어 보였습니다. 마지막 학년 논문을 쓰느라 매우 힘들다고 했던 그였는데 그런 아들의 모습이 삐쩍 가물은 몰골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것과 관계없이 반갑게 만난 부자는 그들 생애 처음으로 둘이서 2박 3일 동안 뭉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3일 간 런던의 이곳저곳을 보여주었습니다. 2년 넘게 거주해온 그였던지라 그 도시의 두 번째 여행자인 저에게 런던 보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도 제가 생각한 만큼 그의 표정이 펴지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선 아들의 찌든 유학 생활이 안쓰러워 짧은 동거 기간이나마 최고로 해주고 싶어 그를 위해 평소와는 다른 식사나 쇼핑 등으로 오버를 했는데 아들은 대개 짜증 섞인 거부 의사를 표명하곤 했습니다. 안 그래도 된다 하며 말입니다.


그런 그가 제 눈엔 아버지 마음을 몰라주는 아들로 보였지만, 그의 눈엔 제가 아들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와 일정을 합의하고 온 방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 스케줄에 맞춰 간 런던행이기에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졸업 논문과 시험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들과 런던에 있던 그 시간은 제겐 마냥 행복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런던 코벤트가든의 거리 공연, 2018. 11


그와 즐겁지만 아슬아슬했던 2박 3일 런던 동거 기간 중 드디어 걱정했던 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 런던 방문이 두 번째인 제가 가장 가고픈 곳은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와 그가 거주하는 기숙사였습니다. 첫 번째라도 그랬었겠지요. 캠퍼스는 제 원대로 런던 시내에 흩어져있는 유서 깊은 그곳들을 아들의 가이드로 거의 다 가보았습니다. 문제는 기숙사였습니다. 아들은 캠퍼스 안이 아닌 시내 테이트 미술관 근처의 사설 기숙사에 머물렀었는데 그가 그곳 방문을 끝내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런던행 비행기를 탈 때부터 그의 룸에 가서 꼭 해야 될 일도 있기에 그곳 방문을 강력히 희망한 것이었는데 그런 제 마음을 잘 아는 아들은 오히려 그래서 더 그의 방 문을 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체류 기간 중 아들은 저와 호텔에서 같이 묵었었습니다.


첫날부터 그 일로 긴장이 더 고조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3일 차 런던을 떠나는 날까지 저는 포기하지 않고 갖은 감언이설로 아들을 설득하고 애원까지 하였으니까요. "아버지가 여기까지 와서 네가 사는 곳을 안 보고 가는 것이 말이 되냐"하며 말입니다. 이윽고 시간은 흘러 저의 출발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선가 그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공항 콜택시 출발 30분 전이 돼서야 그의 방 입장이 허용되었습니다. 대신 제가 아무 말도 안 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 말이라는 것은 그에겐 잔소리라 들릴 말이었습니다. "그러마" 하고 대답 후 그의 방 입장 시 제게 주어진 시간은 딱 30분, 그 시간 동안 전 저의 런던 방문 미션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시급히 해결해야 했습니다


청소였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들의 기숙사 방은 개판이었습니다. 사내아이들 방이 대개 그러하듯 모든 것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고 먼지가 쌓여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개과천선이 안 되었던 그의 청소였기에 그것이 런던이라 해서 나아질 일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전 시간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저의 청소 신공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해진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좁은 방과 화장실이라선가 다행히 그 시간 동안 얼추 물청소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잔소리가 아닌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다음부터는 이렇게 아버지가 시범 보이는 대로 청소를 하라고 조용한 음성으로 어드바이스를 하며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물 묻은 손을 채 닦지도 못한 채 기숙사 앞에 와있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번갯불에 콩 볶듯이 치카치카 청소로 보낸 것이었니다. 이윽고 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런던의 하늘로 이륙을 하였습니다. 그 하늘 저 아래 아들을 홀로 남기고 말입니다.


(출처, pixabay)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3일간 함께 했던 아들의 모습이 계속 제 눈에 밟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아들의 무표정한 모습이 더 밀려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오락물이나 장식품이라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정리 안 된 그의 비좁은 방에, 11월 중순의 차디차게 을씨년스러운 흐릿하고 축축한 런던의 날씨가 오버랩되어, 마치 19세기의 황폐한 런던을 주로 그린 존 킨슨 그림쇼의 잿빛 그림 속 달빛 아래의 인물과 같은 모습으로 덩그러니 서서 제 머릿속에 오는 비행시간 내내 떠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집으로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김광석님이 그대를 떠나보낸 후 술잔을 기울이고, 아픈 사랑을 느끼고, 쓸쓸한 사람이 되고 한 그 지난한 과정을 아들을 남겨두고 오는 런던-서울 간 11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 다 느낀 것 같았습니다. 그 노래에 나오듯 비행기 창밖으로 만추의 가을새가 날라도 가고, 지는 별빛이 보인 것도 같았습니다.  


그때 아들은 제가 떠나자마자 색기와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의 방에 다시 홀로 들어가 구깃하게 말려있는 이불을 헤집고 그 속으로 들어가 누었겠지요. 저를 수발하느라 보낸 3일간의 피로와 시간을 잊어야 그의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역사상 통틀어 화려했던 기간이 가장 긴 유럽의 1등 도시 런던의 어린 이방인으로 그는 그렇게 남은 유학 기간을 외롭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런 네거티브한 생각만 계속 이어진 슬프고 언짢았던 귀국길이었습니다. 아들은 그곳 런던에서 보람차고 재밌는 일도 경험할 텐데 말입니다.


150여년 전 런던의 11월, <November>, 존 앳킨슨 그림쇼, 1836~1893


이렇듯 두고오는 이별이 떠나보내는 이별보다 더 슬프다는 것을 몸소 체감한 아들과의 이별이었습니다. 그전에 고등학교도 기숙학교를 다녔던 그였기에, 그리고 그 후 졸업 후 군대에 가서도 집에서 떠나보내는 이별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그땐 그렇게까지 슬프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가 런던 유학 시절에 방학 기간 중 서울에 와서 돌아갈 때도 역시 또 그렇게까지 슬프거나 안쓰럽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시 또 같은 상황으로 비교해보면 그가 고교 때 기숙학교 재학 시 학교에 면회 가서 그를 두고 올 때가 집에서 학교로 떠나보낼 때보다 더, 그리고 군 복무 시 면회 가서 혼자 두고 올 때가 집에 휴가 와서 부대로 떠나보낼 때 보다 더 이별의 발길이 안 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귀소본능이 있는 인간이기에 집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작용하게 하는 것일까요? 그런 집을 나는 가는데 너는 못 가니, 그래서 그 비교우위로 내가 너보다 더 해피한 상황이라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못 한다는 미안한 마음도 함께 작용해서 말입니다.


남녀의 이별도 그렇겠지요. 이별도 서럽고 슬픈데 낯선 어떤 곳에 홀로 남겨 있다면 그 슬픔은 배가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자의 불편함도 더 클 것이고요. 런던에 연인이 있는데 그에게 날라 가서 이별을 통고하고 두고오는 것과 그가 서울 집에 있을 때의 이별 통고는 같은 이별이라도 아픔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선 연인을 떠나보내도 실연자를 캐어해 줄 다른 사람들도 있고 실연자가 익숙한 환경에서 생활을 이어가니 말입니다. 써놓고 보니 제 말이 맞는 것도 같고 틀리는 것도 같은데 그 답은 두 가지 실연을 다 당해본 사람이 가장 정확히 알 것입니다. 제 아들과 저의 런던 이별이 그러했듯 경험이 답해줘야 할 두 이별의 차이입니다.


아, 그런데 지금 그 아들은 어떻게 됐냐고요? 네, 바로 옆방에서 열나게 게임 중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 괴성을 저지르며 "타다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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