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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29. 2022

낭만적인 것과 낭만주의

Romantic vs Romanticism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리..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답은 끝에 나오는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낭만가객 최백호씨의 연약하고 힘겹되, 그래도 절대 끊어질 것 같진 않은 그의 목소리가 누에에서 명주실이 이어지듯 낭랑하게 들리는, 어떨 때 들으면 마치 그가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의 대표곡 <낭만에 대하여> 가사의 일부입니다. 그는 마치 "낭만은 이런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듯 마지막 가사에서 그렇게 종지부를 찍습니다.


최백호씨는 1995년 이 노래를 발표했는데 당시 40대의 그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고 "내 첫사랑도 어디에선가 지금 저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이 시(가사)를 썼다고 합니다. 다소 덜 낭만적인 <낭만에 대하여>의 배경이긴 합니다. 하지만 낭만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낭만에 대한 이야기엔 전혀 낭만스럽지 않은 낭만들도 등장하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세상에 나온 이 노래는 원작자의 심경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 우리 대한의 40대 이상의 남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그때부터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너도나도 이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낭만가객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첫사랑인 그녀가 지금 설거지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며 부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회상하는 낭만은 그녀와 함께 했던 과거에 머물러 있었을 테니까요.


Romantic Couple (출처, pixabay)


우리가 "낭만적이다" 또는 "로맨틱하다"라고 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있습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로 이때 그들은 그 오묘한 분위기에 빠져 행복감을 느끼며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주변이 아무리 복잡해도 그것이 의식되지 않는 그들 둘만이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광장이든, 식당이든, 지하철역 등에서 평소에는 할 수 없는 행동인 뽀뽀와 포옹을 영화 카메라 돌아가듯 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둘은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이브가 되어 둘만의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의 힘입니다.


그렇고 보니 낭만적인 분위기는 주로 남성 쪽에서 연출하는 경우가 많네요. 그것의 절정은 결혼을 허락받는 프러포즈의 순간일 것입니다. 최대한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그가 얻고자 하는 그녀의 오케이 대답을 얻어내야 하니까요. 야생 동물의 왕국에서도 숱한 종(種)의 수컷들이 암컷과의 성공적인 짝짓기를 위해 그것에 앞서 암컷 앞에서 그의 기교와 재주를 발산하곤 합니다. 암컷의 경계를 풀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여성도 남성의 환심을 얻기 위해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낭만적이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모자라도 안 되고 남아도 안 되는, 그 선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미건조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그 선을 넘어가면 남녀상열지사가 되어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다 된 것 같아도, 괜한 말 한마디에, 또는 서투른 행동 하나로 그것은 실패의 영역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흔한 말로 기분이 잡치고, 산통이 깨지고 해서 그간 공들인 작업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낭만적이라 하는 것은 고도로 민감한 감정의 영역에 놓여 있기에 그렇습니다. 드라이즘(?)과 에로티시즘 사이 어딘가 좁은 곳에 말입니다.


Romantic Mood (출처, pixabay)


언어 예술을 하는 문학가든, 공간 예술을 하는 미술가든, 그리고 시간 예술을 하는 음악가에게 있어 그들의 위대함이라 하는 것은 기능적인 아트(art) 능력에만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움직여야 할 대상이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문학이나 예술 이전에 인간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의 경우 그는 소년 시절 그의 천재성을 발견한 메디치의 손에 이끌리어 그의 집에서 3년간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그가 배운 것은 회화나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메디치는 그 가문 산하의 인문학자들에게 라틴어,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그리고 역사, 신학 등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인문학적 배경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메디치, 과연 위대한 자라 불리는 로렌초 메디치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러했듯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상의 위대한 작가는 역시 또 위대한 인문학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영역 중 우측에 위치한 우뇌의 감성적인 영역을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까다롭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감정을 때론 순하고 말랑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끌어올리곤 합니다. 그들 중에 낭만주의(浪漫主儀, Romanticism)라 불리는 그룹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의 작품이 주는 감동이 위에서 설명했듯 미묘한 인간의 짧은 감정선에 딱 걸쳐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낭만적인 것과 낭만주의는 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좀 다르게 해석이 되고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낭만적이다의 낭만과 낭만주의 작가들이 만든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서의 낭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단 낭만적(romantic)이다는 것은 대개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우리 일상의 남녀의 직접적이든, 간접적인 감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예술에서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난 사조로 억눌려있던 인간 본연의 진실을 자유롭고 거침없이, 그리고 폭넓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세기경 시작된 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의 키워드는 형식, 조화, 규칙, 균형, 절제, 완성미, 도회적, 귀족적 등입니다. 여기에서 고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일컫습니다. 과거 그 시대의 아름다운 문학이나 예술성을 따르자는 사조입니다. 반면에 이어서 18세기경 일어난 낭만주의는 위의 고전주의에서 열거한 단어들을 모두 정확히 반대로 하자는 사조입니다. 정형화되어 숨 막힐 것만 같은 통제에서 벗어난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감정을 표출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전주의 시대에 정치 사회 쪽에서 함께 유행했던 계몽주의 사상도 낭만주의를 일어나게 하는데 한몫하였을 것입니다. 계몽주의는 이성과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니까요.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이다"(출처 두산백과). 이 글은 1798년에 발간된 낭만주의의 대가 워즈워스가 쓴 <서정시집(Lyrical Ballads)> 서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 서문은 낭만주의의 문학 선언이라 불릴 정도로 낭만주의 시의 텍스트가 되었는데 워즈워스는 콜리지와 함께 이 책을 공동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이 선언 안에 "인간의 가장 진실되고 원초적인 감정인 남녀 간의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은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보고 낭만주의 시집 서문을 쓰라고 하면 이렇게 쓸 것 같은데 말입니다. 워즈워스는 그의 작품 <무지개>에선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뛰노니.."라 했지만, 저라면 "그녀를 보기 100미터 전부터 내 마음은 뛰노니.."라고 썼을 것입니다. 그래야 낭만주의 아닌가요?


영국 낭만주의 문학 선언문 <Lyrical Ballads>, 1798


또 다른 영국의 유명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해 1823년 그곳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더니 유명인이 되었다는 그입니다. 바이런은 낭만적인 사랑을 펼친 로미오처럼 그의 연인 줄리엣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불의함을 참지 못해 그 열정으로 전쟁에 나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생전엔 수려한 외모로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던 그였습니다. 퇴고가 필요 없는 천재 시인이었던 그였기에 그의 사랑은 매우 낭만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시가 되었을 테니까요.


우리나라에선 20세기 초 문예지 <백조>의 동인이었던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나도향 등을 낭만주의 작가로 분류합니다. 이들 역시 낭만적인 사랑을 다룬 작가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와 <뽕>, 그리고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정취는 느끼기 힘듭니다. 박종화의 시 <사의 찬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정의하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감정을 토해낸 작품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미술의 들라크루와와 제리코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회화에서는 더 극단적인 인간의 감정이 표출됩니다. 그들이 다루었던 소재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혁명, 고통, 광기, 폭력, 소외, 죽음 등으로 인간의 격정이 폭발하는 장면을 주로 표현하였으니까요. 낭만주의 문학에서 그나마 보여준 서정성이 미술에선 아예 사라진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자리에 격정적인 문학적 상상력이 채워졌습니다.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인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서는 문학적인 서사적 연출이 돋보입니다. 1816년 난파한 메두사호에서 생존자들은 뗏목에 의존하여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는데 이 실화를 제리코는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실제 뗏목을 만들어 오랜 시간 모의실험을 거쳐 이 그림을 완성하였으니까요. 당시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사체를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이 그림은 생존 욕구에 대한 인간의 끝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낭만주의 작품에서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낭만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메두사호의 뗏목>, 제리코 (1791~1824)


프랑스 7월혁명을 소재로 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들라크루와는 위의 바이런이 참전했던 그리스 독립전쟁을 소재로 한 아래 <키오스섬의 학살>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에게해의 키오스섬 주민은 터키에게 침략을 당해 90프로가 죽거나 끌려갔었습니다. 전쟁 중인 1824년, 들라크루와는 위의 제리코와는 달리 그 학살을 상상하여 그림으로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작품에선 딱히 학살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은 주인공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포인트라 할 수 있는 피해자인 인간의 고통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도 폭력적이기보다는 화려하고 멋지게 그려 넣었습니다. 사실과는 다른 문학적 상상력이 가득한 낭만주의자의 작품입니다.


<키오스섬의 학살>, 들라크루아 (1798~1863)


음악에서의 낭만주의는 서술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미술이나 문학은 눈에 보이거나 줄거리가 있어 학계에서 정의하는 낭만주의를 대입하고, 이 글에서 제가 얘기하는 낭만적인 것의 잣대를 말이 되든 안 되든 들이댈 수 있으나, 소리에만 의존해 주관성이 강한 음악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서입니다. 그리고 음악의 낭만주의는 문학과 미술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복잡하기도 합니다. 그 전에 출현했던 음악가들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바로크는 비발디, 바흐, 헨델, 이후 출현한 고전주의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그들 이외에도 훨씬 많은 음악의 대가들이 있지만 음악을 모르는 문외한에게도 잘 알려진 음악가는 이들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전주의에 이은 낭만주의는 잘 알려진 음악가만 해도 그 수에 있어서 이전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많습니다. 19세기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음악가를 낭만주의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슈베르트, 슈만, 리스트, 베버, 멘델스존, 비제, 파가니니, 오펜바흐, 베를리오즈, 브람스, 쇼팽, 요한 슈트라우스, 바그너.. 등이 그들입니다. 스펙트럼이 넓은 모든 작곡가들이 낭만주의 안에 다 모여 있습니다. 낭만주의의 정의대로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음악으로 만든 음악가들입니다. 이들이 만든 음악 중엔 위의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와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의 음악도 당연히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이나 쇼팽의 피아노 독주곡 등은 듣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한 감정이 생기니까요. 앞에 이성이 없어도 말입니다. 다행스레 이성이 있다면 와인과 함께 이런 류의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면 그 자리는 더욱 로맨틱해질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속세의 낭만적인 것과 일치하는 것이 문학과 미술보다 많은 낭만주의 음악입니다.


듣거나 보기만 해도 낭만적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소재적인 측면에서도 위의 작곡가들의 음악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트리스탄과 이졸데>, <진주조개잡이> 등은 낭만적인 사랑을 기초로 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극으로 끝나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들을 수 있는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과 바그너의 <로엥그린>의 곡들 또한 즐겁고 낭만적인 배경의 음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시리즈는 설명 안 해도 충분히 낭만적인 음악입니다.


하지만 이들 낭만주의 음악 안에도 낭만적인 것과 거리가 먼 인간의 격정과 투쟁, 전쟁, 죽음, 신화, 민족 등이 등장하곤 합니다. 위에 열거한 낭만적인 곡들에도 낭만적인 사랑에 수반되는 배신과 음모 등이 거의 다 들어가니까요. 또한 파가니니와 그를 오마쥬한 리스트의 음악은 그 빠른 속도감만으로도 낭만적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3박 4일에 걸쳐 16시간이나 연주되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그 긴 연주 시간만으로도 역시 또 낭만적이기 힘들 것입니다. 북구 신화를 소재로 한 바그너의 독창적인 음악극입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선 헬기들이 평화로운 베트콩 마을에 폭격을 가할 때 이 음악 2부 <발퀴레>의 전주곡인 <발퀴레의 기행>이 폭음과 함께 크게 터져 나옵니다. 헬기에 탄 미군 지휘관이 베트콩을 위해 준비했다며 심리전의 일환으로 헬기 안에서 그 음악을 크게 튼 것입니다. 영화 속 베트남인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죽어갑니다.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 바그너를 좋아했던 히틀러가 특히나 좋아했던 음악이었습니다. 이럴 경우에 이 음악은 감히 낭만적임을 논할 수 조차 없는 낭만주의의 음악이 됩니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등장하는 북구 신화 속 <발퀴레>, 한스 마그르트 (1840~1884)

    

지금까지 평소 제가 그간 가져왔던 의문 중 하나인 "언어상으론 같은 낭만적인 것과 낭만주의는 왜 다르게 사용되고 이해되고 있을까?"에 대해 정리해보았습니다. 일단 지극히 주관적인 글임을 밝힙니다. 사실 낭만주의에 대해선 문학과 음악, 미술 등의 워낙 방대한 예술의 영역인지라 저의 짧은 지식으론 원천적으로 해석과 해결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많은 작품들을 제가 다 볼 능력도, 분석할 지력도 안 되니까요. 그런 부족함으로 제가 아는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을 논하였습니다. 물론 학술적인 글은 더더욱 아닙니다.


정리해보니 로맨티시즘(romanticism)과 로맨틱(romantic)의 차이는 낭만이라 하는 인간의 감정 전체와 낭만적이라 하는 그 감정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낭만주의는 학술적인 영역에서, 낭만적은 일상의 영역인 남녀 관계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같게 쓰고, 다르 게 해석되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언어적으로 그렇게 어긋나게 대입되는 경우가 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적인(classic) 것과 고전주의(classicism)의 의미가 일치하듯 사실적인(realistic) 것과 사실주의(realism)는 일치하는데 말입니다.


For 낭만주의자가 아닐지라도 언제까지나 낭만적인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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