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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Apr 23. 2022

Peace.. 우크라이나!

전 세계 역사상 요즘처럼 우크라이나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침략국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공산주의의 원조 러시아인데 국력이 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우크라이나가 예상과 달리 선전을 벌이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거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역사책에서 그렇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던 국가였으니까요. 그들을 침공한 러시아는 차르로 대변되는 제정 로마노프 왕조와 레닌의 볼셰비키 공산혁명 등의 역사적 사실로, 그리고 톨스토이와 차이코프스키 등의 문학과 음악의 예술적 자산으로 많이 알려진데 반하여 우크라이나는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오히려 우크라이나란 국가보다는 요즘 키이우로 이름을 정정한 키예프란 도시가 더 귀에 들리곤 했습니다. 마치 접경 국가인 벨라루스의 민스크란 도시처럼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저에게 우크라이나에 관한 몇 가지 단상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 속 최초의 우크라이나는 중학교 인문지리 교과서에 등장했던 비옥한 흑토지대였습니다.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와 함께 시험에 잘 나왔던 세계 3대 곡창지대라는 필수 암기 사항에 그곳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지금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곡물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든 그 우크라이나의 평원입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요즘 그런 경제뉴스가 나올 때마다 '유럽의 빵'으로 지칭되곤 합니다.


비옥한 우크라이나의 평원 (출처, 한경DB)


당시 우크라이나는 1922년 러시아의 레닌이 주창해서 결성된 소비에트 연합이라 불리는 소련의 한 공화국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미국과의 우주전쟁 등 냉전을 오랫동안 펼쳤던 그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된 후 펼친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1991년 해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슬라브계 국가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비롯한 발트해 3국, 그리고 코카서스 3국과 중앙아시아의 탄 브라더스 등 15개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합체에서 탈퇴해 독립국가가 된 것입니다. 러시아는 어차피 소련의 종주국이었으니 구체제인 소련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소련의 해체는 러시아를 제외한 14개 국가들이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동독은 이보다 1년 전인 1990년 서독에 흡수 통일되었습니다.


이렇게 소련이 해체되고 올림픽 등의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크라이나란 국가명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장대높이뛰기 세계 챔피언인 부부카의 앞뒤에는 그의 국가 우크라이나가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스포츠 영웅이었던 그는 당시 적수가 없어 인간새라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연합체인 소련 시절에도 당시 인기를 끌었던 미스 유니버스를 비롯한 세계 미인대회에선 우크라이나란 이름으로 그 나라의 여인들이 참가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미스 우크라이나!" 이런 호칭으로 말입니다. "미스 소비에트연합!"이라 들린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소련인 러시아, 벨라루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미녀도 그렇게 개별 국가명을 띠에 두르고 TV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미인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서인가 한때 우리나라에선 우크라이나를 기억되게 하는 우스개 소리도 유행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가면 김태희가 밭을 갈고, 한예슬이 물을 긷는다고 말입니다. 제 기억 속 우크라이나의 단상엔 그런 미인과 결혼하러 우크라이나로 입국하던 어떤 남자도 떠오릅니다. 비행기에서 제 곁에 앉았던 대한의 남자입니다. 1995년 문민정부 시 세계화 교육의 일환으로 각 기업에서 직원들을 선발하여 배낭여행을 보내주었는데 그때 전 중부 유럽의 관문인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입국하는 여행 일정을 짰었습니다. 당시 항공료를 아끼기 위해 국적기가 아닌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탔었는데 옆자리에 저와 같은 배낭객과는 달리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저보다 젊은 남자가 앉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인즉슨 그는 우크라이나의 신부와 국제결혼을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키이우행 비행기를 갈아탄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데다가 저보다 영어가 더 서툴러 제가 불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우크라이나로 간 그 총각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우크라이나 역사엔 그 나라의 역사를 바꾼 몇 번의 역사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8, 9세기에 걸쳐 북부 스칸디나비아에서 루스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내려와 동슬라브족이 살고 있던 오늘날 키이우에 정착해 루스 카간국이라는 국가를 세운 것입니다. 이들은 흔히 바이킹이라 불리는 자들이고 역사는 이 루스라는 어원에서 러시아가 나왔다고 봅니다. 이들이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라루스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3국은 어느 누구도 이것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침략자인 바이킹의 후손임이 싫은 것입니다. 이들은 슬라브족을 그들의 기원으로 꼽고 있습니다. 이후 루스 중 블라디미르 대공(1세)이라 불리는 걸출한 영웅이 그 지역을 통일하여 980년 정상 국가로서의 키이우 공국을 출범시킵니다. 그는 기독교인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여 키이우 공국을 유럽의 문명사회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 슬라브족의 넓은 땅에서 키이우 공국의 전성시대를 열어 갑니다.


키이우 공국의 전성시대를 이끈 블라디미르 대공의 세례식 (출처, 위키피디아 )


두 번째 역사적 순간은 13세기 몽고의 침입이라 할 것입니다. 3차례 몽고의 침략으로 1237년 키이우 공국은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러시아와 벨라루스 등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도 시간이 흐르며 독자적인 민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들 중 17세기경 코사크라 불리는 용맹스러운 농경 군사공동체는 우크라이나의 주류 집단이 됩니다. 코사크는 자유로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몽고의 침입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었던 모스크바가 커지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중심이 키이우에서 북쪽 모스크바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키이우를 비롯한 그곳이 본래 러시아 땅이니 정당한 공격이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러시아 편에 붙은 벨라루스도 마찬가지 입장이겠지요. 슬라브 3국이 모두 같은 키이우 공국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몽고로 인해 키이우는 역사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이후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에 치이며 고난의 역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우크라이나의 고통은 극에 달합니다. 또 한 번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바꾼 순간입니다. 비옥한 흑토지대인 그곳을 스탈린이 그냥 놔둘 리가 없습니다. 저항성이 강한 코사크의 후예 우크라이나의 민족의식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인위적인 기아 정책을 실시합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먹어야 할 식량을 공출이란 미명 하에 빼앗아 가서 그들을 굶어 죽게 만든 것입니다. 그로 인해 1933년 세계 3대 곡창지대가 있는 그 나라에서 800만의 인구가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식량은 군사대국으로 가는 소련의 군대를 먹여 살렸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주류 집단인 코사크를 표현한 <자포지아 코사크의 답신>, 일랴 레핀(1844~1930)


2022년 현재 1991년 말 소비에트연합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다시 소련의 직계 후손인 러시아에게 복속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흑해의 따뜻한 휴양지 크림반도는 2014년 주민투표로 이미 러시아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지금 세계가 주지하다시피 필사적인 쟁으로 러시아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싸움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에게 조금도 지지 않으며 서방에게 그들의 투쟁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행하는 방법 중 하나가 각 나라의 의회로 화상 연설을 송출하여 우크라이나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에도 얼마 전 그는 화상으로 다녀갔습니다. 충분히 그들에게 도움을 줄만한 국가로 판단했기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말입니다. 아직 종전이 되지 않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전쟁 중인 젤렌스키 대통령을 박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전 세계에서 꼴찌로 박대했습니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 20퍼센트도 안 되는 고작 50여 명의 의원만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그 듣는 태도 또한 불량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의 화상 연설에 국가 정상까지 참석한 나라들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세계적인 망신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시 유력 후보자의 박대에 이어 이번엔 국회의원들이 그를 박대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화상 연설, 2022. 4. 11


아마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참으로 이상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쉬워서 도움은 요청하지만 정나미가 확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국가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이 두 번이나 그를 무시했으니 말입니다. 영토로 보면 우리보다 6배나 큰 나라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와 자국인 우크라이나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경제 수준과 정치인을 비교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타계한 기업의 총수가 1995년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하였는데, 지금 기업은 1류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초1류가 되었는데 정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든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제가 관여하는 인문학교실에선 작은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교육자인 한 인사로부터 <역사에서 길을 찾다>란 강의를 듣는 자리였는데 그 강의 전 우크라이나의 사상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미니 콘서트를 연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작곡가인 스코릭의 <Melody>, 쇼팽의 <야상곡>과 <마주르카>,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가> 등의 피아노 연주가 고요하되 힘 있게, 그리고 다소 무겁고 비장하게 그날 그 공간을 채웠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위한 미니 콘서트, 2022. 4. 21


아름다운 강연장이지만 어두운 투명 통창 아래 놓인 피아노에 적막하게 앉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에서 영화 <피아니스트>의 명배우 애드리안 브로디가 연상되었습니다. 폴란드의 나약한 유태인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침략한 독일군 장교의 강요로 어두운 밤 비슷한 배경의 피아노에 앉아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했던 그 모습이 말입니다. 그에겐 죽음을 내놓고 한 연주였지만 피아노가 연주되는 그 순간만큼은 침략자도 방어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음악의 힘이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감정이 제게 왔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우리 국회 연설에서 느낀,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우리 몫이었던 그 심경이 다소나마 씻긴 것입니다.


우크라이나는 2월 24일 푸틴의 공격 명령으로 침공이 시작되어 2달여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긴 전쟁으로 그들의 고통이 장기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최근 세계적인 석학인 놈 촘스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세력권인 남부 돈바스 지역에 고도의 자치권을 주고 이 전쟁을 끝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궁에 빠진 상황에서 핵을 포함한 더 크고 긴 비극을 막으려는 현실적인 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모쪼록 이 전쟁이 당사자인 양국과 그들을 지원하는 전 세계국이 합심하여 현명하고 슬기로운 결정 안을 도출해 조속히 종결되기를 기원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바꿀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우크라이나 지도, 붉은 지역은 러시아 세력권


아래는 지난 음악회에서 연주된 우크라이나 국가의 가사입니다. 1863년 만들어진 곡인데 그 가사가 그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뿐 아니라 국민의 행동까지 일치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이 시를 쓴 추빈스키는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로 당시 불어 닥친 슬라브 민족주의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합니다. 그들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Peace..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는 사라지지 않으리

형제들이여, 운명은 또다시 우리에게 미소짓도다

적들은 아침 태양 아래 이슬처럼 사라지리라

형제들이여, 우린 지배하리라,

자유로운 우리 조국의 땅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리라,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보여주리라,

우리 형제들이 코사크의 혈통임을



※ 우크라이나를 위해 흔쾌히 피아노 연주에 응해주신 피아니스트 구자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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