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츠부르크에서 아침, 점심을 보내고 오후에승차한 기차의 하차 역은 로텐부르크였습니다. 둘 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이 길은 독일의 7대 가도 중 로만티크 가도(Romantische Strasse)라고 불리는 길의 초입부입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로텐부르크 남쪽 오스트리아 국경에 접한 퓌센까지의 300여 km가 풀코스 로만티크 가도입니다. 로맨틱을 달고 있는 길의 이름이지만 과거 로마인이 다닌 길이라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에서 밀라노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 길을 거쳐 그들의 속주였던 게르마니아 북부까지 통행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엔 상인들이 북유럽 한자동맹의 도시인 함부르크, 뤼벡, 브레멘 등을 이 길을 통해서 교역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은 로마인과 상관없이 로맨틱한 길을 뜻하는 낭만 가도(Romantic Road)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길에 위치한 도시들은 모두 낭만적인 정경을 선사하니까요.
1998년 배낭여행 때의 일입니다. 뷔르츠부르크를 출발한 기차는 로텐부르크 거의 다 가서 한 번 갈아타야 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거쳐 퓌센으로 이어진 로만티크 가도 주선이 아닌 간선의 작은 기차로 갈아 탄 것입니다. 유레일 패스를 이용한 배낭여행에서 버스로 치면 마을버스 같은 허름한동네기차를 갈아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어둠이 내릴 때 도착한 로텐부르크, 역부터 걸어서 어둠 속 영화의 성문 같은 입구를 지나 다행스레 곧바로 나타난 예약한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바로 뻗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뭔가의 신비한 기운과 소리에 잠을 깨 일어나서 본능적으로 창 쪽으로 발을 옮겨 좌우 날개형 목조 창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제 입에서 저도 모르는 탄성이 쏟아졌습니다. "와우!"
독일 로만티크 가도의 완벽한 중세 도시 로텐부르크 (출처, pixabay)
중세의 아침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배낭여행객의 필수품이었던 노란 표지의 가이드 북을 통해 도시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는 갔으나 이런 정경이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 이전 가 본 유럽의 도시들 중에도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많았으나 로텐부르크는 그곳들과 달랐습니다. 순도 100프로 중세의모습만이 보였기에 그랬습니다. 제 눈앞엔 시원스레 펼쳐진 고색창연한 지붕의 행렬 끝에 성벽과 망루가 보이고 그 너머로 산과 하늘이 이어졌습니다. 제 눈 바로 아래 골목길엔 노새인지 당나귀인지 구별 안 가는 가축이 끄는 달구지가 정차해 있고, 그것을 몰고 온 마부가 식품점이 있는 1층에 신선한 야채를 납품하며 주인과 뭔 말인지 모를 독일어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우나 시끌벅적한 중세가 살아있는 풍경 속에 저를 깨운 것은 그들의 대화보다 먼저 들린, 그 가축의 덩치에 비해 유난히 커 보이는 워낭 소리였습니다. 아마도 달구지는 성 밖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끌고 온 것이겠지요. 그의 경작지가 있는 드넓은 장원의 모습은 그 후 2시간도 채 안 되어서 성문 입구 반대편의성벽 망루에 올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적군 침입 시 망루 위 병사가 부는 나팔 소리를 듣고 그곳에서 밭일을 하던 농부들이 황급히 성안으로 뛰어 들어오곤 하지요.
당시 제가 묵은 숙소는 성문 입구에서 광장으로 진입하는 메인 통로에 위치한 민박집으로 1층은 식품점이고, 2층은 식당과 주인 숙소, 3층은 객실 숙소가 있는 올드 하우스였습니다. 묵은 방도 트러스트형 목조 지붕 아래 나무 침대가 놓여있어 마치 다락방과 같은 구조로 정겹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렇게 어젠 늦은 밤에 입성을 하였기에 안 보이고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아침이었습니다. 현재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깊은 잠에 빠진 저는 밤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해서 중세의 아침에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낮에 돌아본 로텐부르크는 현대식 호텔이나 건물은 하나도 없는 완벽한 중세의 성벽 도시였습니다. 위에서 제가 로만티크 가도를 '로마인의 길'이 아닌 '낭만적인 길'로 해석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 입증되는 이런 순간의 기분, 그 낭만의 근거이자 핵심은 바로 그때 제가 느낀 '중세(Medieval Period)'라는 시대 요소일 것입니다.
서구 역사에서 중세의 기나 긴 시간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힘들 것입니다. 역사는 대개 그 시간을 천년 암흑의 시대라고 칭하곤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다른 시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발전과 진보가 없던 시대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는 서구 사회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영향을 1순위로 꼽습니다. 인본보다는 신성을 우선시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세가 그러하니 그 이전과 이후는 인본의 시대이고 광명의 시대일 것입니다. 중세 이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가 그러했고, 중세 이후 그것을 부활시키자는 르네상스 시대가 오면서 인류는 신 아래에서 억눌렸던 잃어버린 인간 본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저의 로텐부르크 하룻밤 여행담에서 보듯 그런 중세임에도 우리는 중세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론 더 나아가 동경까지 하기도 합니다. 중세는 아름답고 낭만적이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봉건제도 하에 멋진 기사와 그의 정신인 기사도,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왕비와 공주, 또는 영주 부인 등과의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던 로만티크 가도 끝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 같은 아름다운 고성도 그런 아련한 판타지를 더욱 자극하곤 합니다. 실제로 그 성은 현대에 와서 꿈과 동화의 대기업인 월트 디즈니의 심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 중세 주인공들의 사랑은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이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적대적인 가문 간의 사랑,원탁의 기사 랜슬롯과 기네비어 왕비 간의 불륜을 다룬 <킹 아더>와 같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전사와 이슬람 여인과의 사랑을 다룬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적과의 동침과 같은 비극적인 사랑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음악과 미술의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화된 중세의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프랭크 딕시, 1884
그런 중세의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엔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올림포스 산상의 신들이 다 철수해서인가 대신 중세의 영웅들을 돕거나 방해하는 마술사나 요정, 괴물 같은 존재도 감초로 등장하곤 합니다.신화적이고 전설적인 흥미 요소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내에 신학적 해석에 따라 분파한 다수의 수도원과 수도사의 생활도 중세를 규정짓는 주요 문화로 등장합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청빈과 금욕 등으로 고통스러운 영성 생활을 이어갔을 텐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에선 그 또한 중세를 경건하고 신비롭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합니다.
그리고 중세에 살았던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등의 왕족과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귀족과 그들의 배우자인 귀부인들이 만들어 낸 실제 역사도 그런 중세적인 환상을 부추기는 데에 한몫을 합니다. 물론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에도, 그리고 더 미루어 현대에도 그런 왕족과 귀족은 있지만 중세만큼의 드라마적인 요소는 약해 그들을 바라보는 흥미로움은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백마 탄 왕자'의 이미지는 중세의 왕자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왠지 고대의 왕자는 거칠어 보이고 근대의 왕자는 계산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민주화된 입헌군주국인 현대의 영국이나 모나코 등에도 왕자는 있지만 그런 동화적인 이미지는 역시 또 안 맞아 보입니다. 우주선이 뜨는 시대에 말을 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롤스로이스, 또는 요트를 탄 왕자'라 해도 백마 탄 왕자를 이기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백마 탄 왕자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중세의 여인들에게 안성맞춤인 왕자였습니다.
보시듯 이렇게 중세를 대하고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그리고 모순까지는 더 아니더라도 앞뒤가 좀 안 맞아 보입니다. 그렇게 인간을 억누르고 발전도 없던 암흑의 시대에 대해 이렇게 이중적으로 환상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천년씩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누른 시대였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유한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기억들은 뜰채 아래로 떨어져 잊혀지고 뜰채 위에 얹어진 좋은 기억들만 남아서 그런 것일까요? 페스트 창궐, 마녀 화형, 고문 기구, 영주의 초야권, 드라큘라 백작 등 갑자기 중세의 네거티브한 요소들도 떠오릅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고딕 양식을 꼽습니다. 통상 "중세 풍이다", "중세 스타일이다"라고 할 때 1번으로 호출되는 양식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강하게 반영되어 바벨탑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을 향해 찌를 듯 반듯하게 솟은 뾰족한 첨탑과 실내에 빛을 최대한 들이기 위해 창을 크게 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대성당의 건축 양식입니다. 독일 쾰른의 시커먼 대성당과 비엔나의 슈테판 대성당 앞에서 경이롭게 그 건축물을 올려보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뾰족한 첨탑을 자랑하는 중세 고딕 양식의 쾰른 대성당 (출처, pixabay)
고딕 양식은 수도원 건축이 주를 이루었던 로마네스크 양식과 화려한 르네상스 시기 사이인 12세기에서 15세기까지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양식엔 중세를 경멸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딕(Gothic) 양식은 말 그대로 고트(Goths)족이 세운 건축물의 양식이라는 것인데 이 고트족은 야만인을 상징하기에 그렇습니다. 고트족이 5세기 말 로마 제국과 함께 아름다운 고전 문화를 멸망시켰기에 그런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중세 시작과 함께 이루어진 민족의 대이동 시 다른 종족인 반달(Vandals)족은 그보다 더해 아예 문화파괴주의를 반달리즘(Vandalism)이라 할 정도로 초기 중세인들은 야만의 대명사로 불리었습니다. 아마 반달족의 확실한 후손이 살아있다면 종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이 명칭을 바꾸는 소송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문명과 문화유산은 그들이 파괴한 것처럼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문헌 상에서 고딕은 1514년 교황 레오 10세의 지시로 바티칸 궁전을 보수하던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의 작업 리포트에 처음 등장합니다. 르네상스의 뾰족한 첨탑 대신 둥근 돔을 선호했던 16세기 르네상스기의 예술가들이 이렇게 중세의 건축물을 비하하느라 야만족인 고트족을 소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중세의 건축물들을 상스럽고 천박한 기형물로까지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것이 중세인들이 멸망시키고 파괴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화롭고 이성적인 문화였기에 의도적으로 더 미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고딕 양식의 어원이 된 동고트족은 12세기 고딕 양식이 출현하기 훨씬 전인, 서로마 멸망 후 100년도 안 된 6세기에 이미 멸망을 한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대성당들이 그들 고트족이 지은 건축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 근대로 접어들며 르네상스 시기 내내 찬밥 신세였던 중세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이탈리아에선 르네상스의 큰손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어지며 후원이 멈추고, 프랑스에선 인간의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달라지고, 그리고 바다 건너 영국에선 산업의 혁명이 일어나 문명이 달라지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바야흐로 18세기 이런 격동의 시기를 거쳐 19세기 근대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문학과 예술 사조로는 낭만주의가 발흥하던 시대였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이 중세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긍정적인 평가에 앞장선 것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중세에 대해 낭만적으로 느끼듯 당시 그들도 중세는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일단 근대의 중세 추종자들은 르네상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르네상스의 주도자들이 당시 그렇게 중세를 폄하했지만 르네상스는 엄연히 오랜 시간 동안 고고하게 흘러오며 정중동의 발전을 해온 중세라는 토대 위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를 대표하는 고딕 양식도 일정한 법칙 하에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 낸 결과물로 간주하였습니다. 근대인들에게 고딕 양식의 건축물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부활, 중세의 명예회복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부자들은 이제 고딕 양식으로 저택을 새로 짓거나 기존 집을 중세풍으로 치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대륙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전 세계에 걸쳐서 교회 건물이나 대학교 건물 등도 중세의 고딕 양식을 표본으로 삼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가 19세기 말 이 땅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획일적으로 채택한 뾰족한 첨탑 위 십자가나, 천주교 성당 내 실내를 신비롭게 밝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러한 고딕 양식을 따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딕 양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창문 인테리어인 스테인드글라스 (출처, pixabay)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반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중세를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제를 지탱해온 여러 질서 중 종교 질서는 중세가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하나로 똘똘 뭉친 신앙과 그 신앙이 인간의 이성보다 앞서던 시대였기에 계몽가나 지식인들은 설 자리가 없던 중세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인간은 신의 품 안에서 편히 살았으나 르네상스의 인간은 교만으로 타락 속에 살았다고까지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중세의 종말이 에덴의 추방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그래서 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지도자 로렌초 메디치 사후 집권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수도사는 '허영의 소각'을 통해 중세로의 귀환을 추진하기도 하였습니다. 반혁명론자들이 이런 중세에 대한 향수를 느낀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고대 이교도가 지배한 공화제를 지지한 것도 반혁명론자들이 왕정만 존재했던 중세를 그리워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양을 치고 농사를 짓던 농부들을 도시의 노동자로 변신하게 하였습니다. 말이 변신이지 그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생활이 나아지지 않은 그들에게 로봇처럼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작업 방법과 살인적인 노동 시간은 그들로 하여금 중세를 그리워하게 했을 것입니다. 중세는 수공업의 시대이고 길드가 성행했던 시대였으므로 숙련도에 따라 자유로운 노동이 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새벽부터 밤까지, 아이들까지 온 가족이 쉴 틈이 없었던 그들은 중세 장원의 목가적인 모습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착취한 노동이나 식민지를 통해 부를 쌓은 신흥 자본가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생활을 따라 하며 중세 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19세기를 알차게 살며 낭만주의를 완성한 바그너의 작품들은 중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는 중세 북구의 신화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중세 켈트인의 전설을, <로엥그린>은 독일 중세의 영웅을, <탄호이저>는 중세 음유 시인을,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은 중세 성배의 이야기를 작품화시켰습니다. 이렇게 보면 바그너는 가히 중세 바라기, 또는 중세 빠라 해도 무방하다 할 것입니다. 이 정도로 그의 주요한 모든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이 중세이니 말입니다. 그의 다른 작품 중에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 아니면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바그너 외에도 근대의 많은 예술가와 문학가들은 중세를 지향하는 작품들을 쏟아 내었습니다.
음악과 미술의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화된 중세의 로맨스 <트리스탄과 이졸데>, 존 덩컨, 1912
오늘날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중세 취향이야"라고 할 경우 그 말을 나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당신은 우아한, 고상한, 귀족적, 낭만적 등과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이니까요. 이렇듯 중세의 명예는 현대에 와서 완벽히 회복되었습니다. 꼭 중후장대한 건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예술과 문화와 상업적인 방면의 경박단소한 영역까지도 중세를 지향하는 복고주의는 어딜 가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당장 지금 제가 두드리고 있는 반듯한 이 글의 서체도 고딕체입니다. 여행에 있어서도 제가 방문했던 로텐부르크와 같은 중세 도시나 고성 투어는 관광객들에게 그곳이 어디이든 1순위 방문 지역으로 손꼽힙니다. 중세를 카피한 것이 아닌 라이브로 그 매력적인 현장을 볼 수도 있거니와 중세의 아련했던 낭만적인 숨결까지 느낄 수도 있는 곳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12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최고 걸작인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3년 전인 2019년 불이 났습니다. 귀중한 중세의 고딕 유산이 파괴된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그 성당은 지금 열심히 복구 중에 있습니다. 최대한 중세의 원형을 살려 복원되겠지요. 그렇다 해도, 아무리 현대 건축 기술이 발달했다 해도 그 안에 공기와 온도, 그리고 눈. 비. 바람이 만드는 지나간 중세의 시간까지 넣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성당이 전처럼 중세의 고풍스러운 맛까지 느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래도 그 성당이 제 모습을 찾으면 파리에 가는 것을 제 버킷 리스트에 추가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거 파리 여행 시 짧은 체류 시간으로 인해 그 걸작을 보지 못하고 왔으니까요. 제가 만약 이렇게 중세 고딕 양식에 대한 글을 과거 파리 여행 전에 썼더라면 그곳 체류 시 어떡하든 노트르담 대성당을 먼저 방문했을 것입니다. 아, 문학에서 바그너처럼 19세기를 알뜰히 살다 간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도 배경은 중세 시대였네요.
중세의 대표적인 고딕 유산인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출처, pixabay)
※ 본문 중 영국과 프랑스의 중세와 고딕 양식 부활 부분은 <예일대 지성사 강의>(프랭크 터너 지음, 서상복 옮김, 책세상 펴냄) 제 5강 내용을 참고하고 인용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