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교향곡은 4악장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향곡들을 대개 다 4악장이지요. 초기엔 3악장의 교향곡도 있었지만 악성으로 추앙받는 베토벤이 4악장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교향곡의 아버지는 하이든이지만 그것을 완성하고 전성시대를 연 음악가는 베토벤인지라 그런 그의 영향력으로 4악장이 정답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다소 생뚱맞게 3악장도 아닌 2악장만으로 구성된 교향곡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잘 알려진 슈베르트의 8번 교향곡입니다. 그 곡은 그렇게 2악장으로만 끝나 <미완성 교향곡(Symphony no.8, 'Unfinished')>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2악장 교향곡을 미완성이라 하니 교향곡은 최소 3악장 이상은 되어야 완성 교향곡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의 이 교향곡은 베토벤의 5번 <운명>, 차이코프스키의 6번 <비창>과 함께 세계 3대 교향곡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슈베르트 사후 후대의 말러가, 그보다도 더 후대인 우리들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알면 상당히 기분 나빠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교향곡에 관한한 한가락하는 그는 4악장도 모자라 그것을 넘어선 5악장 교향곡도 썼으니까요. 그것도 대규모 악기들과 아리아와 합창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부활>로 잘 알려진 그의 2번 교향곡이 그의 그런 스펙터클한 5악장 교향곡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말러는 넘사벽 베토벤을 넘어서기 위해 그런 시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악장 수로 보면 <부활>은 <미완성>의 2.5배이고, 시간으로 보면 <미완성>이 25여 분, <부활>은 90여 분에 달하니 무려 4배 가까이 됩니다. 말러가 보기에 작곡에 공들인 길이와 시간으로 볼 때 슈베르트가 너무 쉽게 교향곡의 금.은.동메달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음악의 문외한인 저의 저급한 생각입니다.
미완성인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천재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지난 토요일 저녁 서울 예술의 전당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일전에 이곳에 글로 소개한 <Only in Vienna> 음악회를 관람하러 간 것입니다. 제가 그 음악회 타이틀 에세이를 프로그램북에 게재한 연으로도 가게 된 자리였습니다. 진작부터 연주 레퍼토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 들은 8중주 실내악은 처음 접하였습니다. 듀엣, 트리오, 콰르텟, 퀸텟 이렇게 5중주까지는 들어봤어도 실내악에서 그 이상의 연주자와 악기는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8중주는 라틴어 수열에 따라 8을 의미하는 옥텟(Octet)이라 불립니다. 실내악으론 9중주 노넷(Nonet)까지 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미니 오케스트라입니다. 악단의 규모만큼 연주가 성사되기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전속 연주자들이 아니고서야 악기별 그 많은 연주자들을 섭외하는 것은 물론 일정을 맞추어 연습하는 것도, 공연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구성만으로도 흥미로운 첫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연주자들이 들려준 8중주의 작곡자는 바로 슈베르트였습니다. 그는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비엔나에서 죽은 순진짜정말 비엔나 토박이였습니다. <Only in Vienna> 타이틀에 최적인 음악가 슈베르트입니다.
<Only in Vienna> 연주회 프로그램북, 2022. 6. 4 서울 예술의 전당
슈베르트(1797~1828), 그는 베토벤(1770~1827)을 존경하였습니다. 베토벤은 독일인지만 비엔나를 주 무대로 35년 간 활동하며 슈베르트와 비엔나를 공유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평생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이었습니다. 베토벤 사망 1년 후 슈베르트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그는 죽어가며 베토벤 이름을 부를 정도로 베토벤 바라기였습니다. 결국 그는 죽어서는 비엔나 중앙 묘지의 베토벤 바로 옆에 묻히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살아서는 베토벤의 명성에 어림도 없던 그였지만 단 한 번 만난 베토벤의 슈베르트에 대한 높은 평가가 그를 사후 악성의 곁으로 인도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40여 년 전인 1791년 같은 비엔나 시민으로, 살아서는 영예를 누렸지만 죽음은 쓸쓸해 시내 밖 공동묘지에 버려져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모차르트에 비해 죽음은 행복한 슈베르트였습니다. 모차르트 그도 30대에 요절해 35세에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만약 베토벤이 1주일 먼저 일찍 죽었다면 슈베르트와 그런 세기의 만남이 되어버린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슈베르트 묘지의 위치도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살아서든, 죽어서든 비엔나를 빛낸 3인방은 죽어서는 셋이 사이좋게 한 자리에 모여 있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 그도 유해는 없지만 나중에 그의 기념 묘비가 이곳 후배들이 있는 자리에 세워졌으니까요. 사필귀정입니다.
비엔나 중앙 묘지 로얄석에 안치된 (좌로부터)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그런데 그 정도로 베토벤을 존경한 슈베르트가 교향곡은 왜 그의 룰을 따르지 않고 2악장으로 종결시켰을까요? 4악장 교향곡은 베토벤이 확립해 교향곡의 텍스트가 되었는데요. 더구나 제가 지난 주말 예술의 전당에서 감상한 <슈베르트의 8중주> 곡은<베토벤의 7중주> 곡을 흠모하고 계승해서 악기를 하나 더 추가까지 하며 작곡했으면서 말입니다.
<슈베르트 8중주(Schubert Octet)>는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호른, 클라리넷, 바순 등 8개의 현악, 금관, 목관악기가 등장합니다. 주요 멜로디는 주로 제1바이올린이 아닌 클라리넷이 진행합니다. 제 귀엔 이런 클라리넷과 함께 더블베이스가 매우 인상적으로 들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그의 <미완성 교향곡>에서도이 두 악기를 주목해오고 있었습니다. 1악장 개시와 함께 묵직하게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더블베이스의 멜로디를 클라리넷이 높게 공중으로 끌어올려 마치 카나리아가 노래하듯이 곱게 연주하는 그 인트로를 좋아해서 그렇습니다. 슈베르트는 클라리넷을 좋아했었나 봅니다. 이렇게 요직을 맡기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의 <8중주>는 6악장이나 되니출연 악기 모두가 개인기를 보여주곤 합니다. 연주 시간도 길 수밖에 없어 교향곡 이상의 60여 분이나 걸리므로 언급한 대로 실내악이지만 미니 오케스트라급 연주가 맞습니다.
긴 연주 동안 부재한 타악기 소리를 메꾸기 위해 종종 더블베이스와 첼로의 피치카토가 베이스 드럼과 팀파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하였습니다. 특히 더블베이스가 더 강력해 보였는데 제가 위에서 더블베이스가 인상적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구간들이었습니다. 격정과 유려함 속에, 때론 반구형으로 마주 보고 앉은 연주자들이 축구에서 티티카카 짧은 패스를 하듯 주제를 주고받으며 연주한 <8중주>의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흘러갔습니다. 훌륭한 앙상블이었습니다. 슈베르트라는 대가의 작곡 능력에 연주자들의 기량이 더해져 그랬을 것입니다. 때론 더 많은 종류의 악기가 여러 대씩 등장하는 오케스트라도 각 악기들이 아무리 다채롭게 연주해도 지루하기도 한데 그날 슈베르트의 <8중주>의 무려 60여 분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연주를 들으며 후반부에 전 그의 <미완성 교향곡>을 떠올렸습니다. "Mr. 슈베르트! 아니, 정작 교향곡은 2악장만 써서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두고 그렇게 안 해도 되는 이 8중주 곡은 굳이 왜 6악장까지 쓰셨나요?"라고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음악의 문외한인 저의 저급한 생각이 또 한 번 발동하는 순간이었고,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발아하는 시점이었습니다. 통상 실내악이나 협주곡이 3악장, 4악장인 것을 고려하면 이 6악장 <8중주> 곡에서 뒷부분 2악장을 뚝 떼어서 <미완성 교향곡>에 갖다 붙이면 4악장 곡이 되니, 그러면 교향곡이나 실내악이나 다 모자람과 남김이 없이 4악장으로 똑 떨어진다고 전 생각한 것입니다. 이미 8개악기의 곡은 완성되어 있으니 오케스트라에서 빠진 몇 개의 악기만 추가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초등학교 저학년의 산수적 생각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슈베르트 정도의 천재라면 그렇게 5, 6악장을 떼어내 갖다 붙여도 별문제 없이 <미완성 교향곡>의 1, 2악장과 어울리게 3, 4악장으로 교정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슈베르트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가 그의 집에 묵을 때 침대보다 키가 크면 발을 잘라 사이즈를 맞추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발을 잡아당겨 늘려서 침대에 맞추었습니다. 침대에 딱 맞추어 살해한 것입니다.전 그렇게 악당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1822년에, 그리고 <8중주> 곡은 그보다 2년 뒤인 1824년 작곡되었습니다.
<슈베르트 8중주>, 2022. 6. 4. 서울 예술의 전당, <Only in Vienna> by Friends of Music
슈베르트의 삶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음악 역사상 그보다 더 불행한 음악가가 있을까요? 시력과 청력을 잃은 대가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 전체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일단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악보를 보는데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끼고 살았습니다. 안경은 우리가 그를 여러 음악가 중에서 쉽게 그를 구별하게 하는 그의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부은 얼굴의 외모도 안경과 함께 그를 타 음악가와 구별되게 합니다. 하지만 같은 안경을 쓰고 있어도 그의 사후 비엔나에서 활동한 같은 오스트리아인인 말러는 그와는 달라 보입니다. 교향곡을 난해하게 만들고 5악장까지 늘리느라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말러는 고뇌하는 지식인과 문화 상류층의 까탈스러운 이미지가 있는데 반하여 슈베르트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부은 얼굴은 그의 영양 상태와 상관이 있습니다. 가난하기에 제대로 먹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곤궁한 경제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그의 작곡에 필수인 피아노를 죽기 1년 전에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주로 기타로 작곡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천재라 아니 부를 수 없는 슈베르트입니다. 기타로 오페라까지 작곡하다니요?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콘탈라>, <악마의 별장> 등 15곡이 넘는 오페라를 썼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베토벤은 <피델리오> 딱 한 곡만 썼지요. 헝클어진 그의 머리는 그가 게으르거나 그가 사는 열악한 위생 환경을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외모로 인해 그렇게 음악에 뛰어난 천재임에도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었습니다. 결혼도 안 했지요. 그래서인가 그의 육신은 어두운 비엔나 뒷골목의 여인에게서 걸린 매독으로 그의 생을 31이라는 숫자에 멈추게 했습니다. 매독은 인류 역사상 생각보다 많은 위인들을 괴롭히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헨리 8세, 이반 4세, 루이 14세 등의 세속 군왕들과 알렉산드로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등의 신의 사도인 교황들도피해 갈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작가 그룹에선 보들레르, 플로베르, 모파상, 마네, 고갱, 로트렉, 하이네 등의 쟁쟁한 멤버들이 그 몹쓸 병의 희생자였습니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존경해 마지않던 베토벤도 젊은 시절 매독으로 고생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유독 슈베르트의 매독만이 후대에 1순위로 불명예스럽게 올라오고 있어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연민하며 보편화(?)시키기 위함도 있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무서운 병이었으니까요. 위의 알려진 인물보다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이 이 병으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15세기 말 이후 역사상 사망 이유가 불분명한 위인들은 이 병이 사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드러내기 힘든 병이니까요. 19세기 초 당시 비엔나 인구는 30여만 명에 달했는데 그중 윤락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2만 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매춘 도시였습니다. 비엔나에서 열린 나폴레옹 전쟁 전후 처리를 위한 세계 최초의 국제회의인 비엔나 체제(1815)의 영향으로 전 유럽의 남성들과 성매매 여성들이 몰려든 결과입니다.
그 체제 하에 슈베르트는 1822년 25세에 매독이 걸렸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불행한 인생에서 더 불행한 인생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흉하게 변해가는 피부, 극심한 두통과 위통으로 죽어가면서도 그는 630여 곡에 달하는 가곡을 비롯해 1000여 개의 다양한 장르의 곡을 그의 일생에 작곡해냈습니다. 31년의 짧은 인생에 1000여 곡, 그의 불행했던 삶과 그 속에서의 다작은 그가 살던 비엔나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부 프로방스의 햇살 아래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 간 고흐라는 남자를 연상하게 합니다.
슈베르트가 남긴 <미완성 교향곡> 3악장 스케치 (출처, Wikimedia Commons)
그가 1822년에 작곡한 <미완성 교향곡>을 그의 생전에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계 3대 교향곡이라 칭송받는 이 명곡은 그의 사망 40여 년 후인 1865년이 돼서야 비엔나에서 초연이 되었으니까요. 다시 돌아가서, 그런데 그렇게 다작 작곡가인 슈베르트가 왜 이 곡은 2악장까지만 작곡하고 멈추었을까요? 여러 자료와 내용을 찾고 둘러보아도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혹자는 1, 2악장을 작곡해놓고 추가 작업을 잊어버려서라고 하고, 아이디어 고갈로 스톱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3악장 작곡을 시작한 흔적은 있습니다. 또 혹자는 병마로 인해 작곡을 멈추었다고 하지만 이후에도 6악장이나 되는 긴 <8중주> 곡을 포함해 왕성한 작곡 활동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보듯 죽음 때문에 부득이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로 남기고 떠난 모차르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슈베르트는 병에 걸린 같은 해에 미완성 교향곡을 썼고 그 후 6년을 더 살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미완성한 교향곡이 그의 삶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그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생전에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육체적으로 아팠고, 음악적으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였으니까요. 그의 사망 7년 후 낭만주의의 대가 슈만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의 천재성에 대한 많은 아티클들이 나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미완성인 채로 죽었다는 것이지요.
슈만의 예언대로 슈베르트는 죽어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완성에 모자랐던 2악장이 채워진 것입니다. 그의 미완성된 교향곡이 오늘날과 같은 위대한 평가를 받고 그는 가곡의 왕으로서 독보적인 음악가가 되었으니까요. 생전엔 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고독하고 쓸쓸한 나그네처럼, 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의 죽음의 유혹 속에 살던 그였습니다. 모르지요. 그가 존경했던 베토벤처럼 그가 50대 후반까지 살았다면 음악의 역사가달라졌을지도요. 무엇보다도 그의 불멸의 명작인 <미완성 교향곡>이 완성이 되어 그 곡엔 다른 부제가 달렸을 것입니다.
※ 내용 중 매독 부분은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 창 출판)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