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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un 19. 2022

컴아웃! 대부도 동춘서커스

빛은 그대로인 태양치곤 열은 그만 못해 봄인지 여름인지 모를 시원한 6월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치 지구 온난화 현상이 대두되기 이전의 한반도와 같은 날씨입니다. 그 쾌적한 날씨를 타고 6월의 둘째 주에 저는 몇 년 만에 서해안 대부도를 다녀왔습니다. 섬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정설이지만 대부도는 좌우로 홍해 바다를 가른 모세의 마른 길이 솟아오른 것과 같은 길고 곧게 뻗은 시화방조제로 연결되어 있어 자동차로 논스톱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저의 고정관념을 깨게 합니다. 저는 안산이 고향이고 취학 전 인천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기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 안산의 행정명은 경기도 시흥시 군자면으로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을 보여주던 곳이었습니다. 그 시골이 1980년대 반월공단으로 개발되며 도시 안산이 되더니, 시화방조제로 대부도를 이어 그 섬까지 안산시로 편입시켰습니다. 대부도는 과거엔 육로로는 갈 수 없었고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섬의 행정 구역은 경기도 옹진군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공항인 인천 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영종이란 이름이 앞서지만 정확히는 영종도와 용유도 두 섬을 이어서 한 섬으로 만든 것입니다. 자연섬 두 개를 붙여서 인공섬으로 확장해 조성한 공항인 것입니다. 공항 배후 영종도의 유명한 을왕리 해수욕장이 과거엔 용유도 을왕리였습니다. 이 두 섬도 과거엔 당연히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그 섬들뿐만 아니라 과거 인천 앞바다에 떴다고 하는 사이다와도 같이 떠있는 무의도, 시도, 신도, 자월도, 영흥도, 승봉도, 장봉도, 제부도, 덕적도, 연평도, 대청도.. 그리고 서해 바다 우리나라 최북단 섬인 백령도까지 이 모든 섬들은 연안부두를 통해서만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름휴가철이면 그 많은 섬들을 오가는 섬 주민들과 섬을 지키는 군인들, 그리고 피서를 떠나는 관광객들로 여객터미널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폭풍이라도 불어 제시간에 배가 뜨지 못할 시에는 연안부두는 아수라장이 되곤 했습니다. 1979년 발표돼 인천을 대표하는 응원가가 된 가수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첫 가사인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은 그래서 틀렸습니다. 그 시절 연안부두엔 언제나 수시로 많은 배들이 오갔으니까요.

 

그 모든 섬들은 당시엔 경기도 옹진군이었는데 지금은 인천시 옹진군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천의 길이는 백령도까지 200여 km나 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도시가 되었네요. 게다가 북단의 강화도까지 편입하며 인천은 우리나라 대도시 중 인구와 면적의 성장이 가장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광역시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4대 도시였던 인천은 3대 도시였던 대구와의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올해 5월 기준, 인천의 인구수는 295만 5,167명으로 237만 6,676명인 대구를 크게 앞섭니다. 과거 오랜 시간 고정되었던 서울 부산 대구 인천이었던 도시 순위가 서울 부산 인천 대구로 바뀌었습니다. 과연 서해안 시대를 실감하게 하는 변화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무슨 행정 공무원도 아닌데 안산과 인천 두 도시에 연고가 있다 보니 오지라퍼의 본능이 여지없이 작동하였습니다. 다시 그날의 대부도로 돌아갑니다. 아, 한 가지 더.. 지금 안산과 방조제로 연결된 대부도는 그 섬과 근접한 영흥도와도 다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두 섬들 사이에 낀 작은 선재도를 징검다리 삼아 이 세 섬이 두 개의 대교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재도와 영흥도는 행정 구역이 경기도 안산시가 아니고 인천광역시가 됩니다. 바다 위에 거의 붙어있는 섬들이 다리를 경계로 두 개의 시로 나눠져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작용해서인가 제 상식으론 대부도도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땐 모두 인천 앞바다 섬이었으니까요.


대부도에 가면 재미있는 명소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곳입니다. 적어도 과거엔 확실히 더 그러했습니다. 안산이 도시가 아니고 시골이었던 시절, 인천이 대구보다 한참 작았던 시절까지 가야 할 것입니다. 그때 이것은 오늘날처럼 대부도 한 곳에 진을 치지 않고 전국 팔도강산을 유랑하며 각 도시와 읍내에 진을 치고 전 국민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제목에서 보이는 동춘서커스입니다.


동춘서커스의 아크로바틱한 공중 곡예 쇼 (출처, 홈페이지)

동춘서커스, 한때는 오롯이 즐거움의 대명사였지만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뭔지 모를 애환까지 그려지는 그것이 그곳 대부도에 있습니다. 섬에 진입해서 들어가다 보면 왼편 길가에 유랑극단 옛 모습 그대로 대형 천막을 치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것의 신세는 뉴스를 통해 알고 있고, 설사 모른다 해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므로 굳이 설명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왕년에 세상의 엔터테인먼트를 독차지했던 그것이 화려한 빌딩이 운집한 대도시가 아닌, 이곳 서해안 바다 건너 섬까지 밀려와 정착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할 것입니다.


외국인을 포함한 외지인의 관광객 수로 볼 때 대부도는 우리나라 전체 섬들 중 어느 위치에 있을까요? 그리고 대부도를 찾는 관광객 중에 그곳의 명물인 해물칼국수의 식객과 동춘서커스의 관객 중 누가 더 많을까요? 서커스(circus)의 또 다른 의미는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이나 유럽의 주요 광장의 이름에서 보듯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운집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서커스스럽지 않은 다소 의외의 장소에 동춘서커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일제강점기 시절 창단되어 기나 긴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유일의 서커스단입니다. 그들은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하였는데 그들이 어떤 동네에 출현해 공터에 터를 잡고, 기둥을 세우고, 천막을 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동네 이들은 그곳에 운집해 구경하며 부모님을 졸라 공연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들이 특히나 좋아했던 것은 서커스 단원의 곡예도 곡예지만 그들이 요즘은 학대로 거의 금지된 동물들의 쇼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곡예단이 말을 비롯한 동물들의 쇼를 보여주는 곡마단으로도 불렸던 이유입니다. 그러니 서커스를 보러 간다는 것은 작은 동물원을 가는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도에 위치한 동춘서커스 공연장 (출처, 홈페이지)


거기에 악단들의 음악도 어우러져 서커스는 그 시절 종합예술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과거 서양으로 치면 오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1960~70년대까지 이어진 서커스의 수명은 TV와 영화의 대중화, 스포츠와 예술 공연 이벤트 산업의 발달, 그리고 테마 파크와 같은 어린이 놀이 산업의 발달로 사양화의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변화로 어찌 보면 오늘날까지 존속해 있는 것이 의외일 정도로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있는 우리나라 전통 서커스입니다. 시장 논리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며 포탈에 올라와있는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동춘서커스 기획마케팅 팀장의 OBS TV 다큐 인터뷰 영상인데 메르스 시기를 언급하는 것을 보니 2015년에 방영된 것 같습니다. 그는 내용 중 공연 직전 장내 방송을 통해 "오늘은 메르스 여파로 역대 최소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오시면 공연을 합니다"라고 어나운스를 합니다. 공연 후 그가 밝힌 그날의 입장 수입은 13만 4천 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공연한 단원의 수는 50명이 넘는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메르스 때도 그러했는데 그보다 심한 코로나 시기가 길게 이어지는 오늘날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제가 대부도에 간 날 차로 서행하며 본 동춘서커스의 매표소 안내문엔 여전히 평일에도 하루에 두 번씩 공연을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2007년, 저는 어린 시절 인천의 장터에서 동춘서커스를 본 이후 처음으로 다시 서커스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본 공연은 제가 과거에 본 서커스와는 달랐습니다. 태양의 서커스(Circue du Soleil)라 불리는 그 곡예단이 보여준 서커스는 아트 서커스라 불릴 정도로 서커스에 뮤지컬과 같은 스토리와 배경을 더해 마치 정통 예술 공연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것에 동원된 첨단 테크놀로지와 미디어는 화려함까지 더해 서커스를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해 우리나라 초연엔 17만 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그들의 명성과 인기를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캐나다 퀘벡에서 거리 공연을 하던 20여 명의 곡예사였습니다. 그들의 서커스에 자본과 마케팅이 들어가 태양의 서커스라는 새로운 장르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탄생한 것입니다.


태양의 서커스의 주요 테마인 <퀴담> 포스터


그들은 산하에 몇 개의 서커스단을 보유하여 전 세계를 돌며 각기 다른 테마로 공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본 그들의 서커스는 <퀴담(Quidam)>이었습니다. 오늘에야 뜻을 찾아보니 별반 뜻이 없는 단어로 어떤, 아무 등 한마디로 우리의 거시기와 같은 뜻인 것 같습니다. 그들도 공연장은 동춘서커스가 그리하듯 서울 잠실경기장 내 주차장에 빅탑이라 불리는 커다란 텐트를 치고 공연을 하였습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서커스는 예술의 전당 같은 곳보다는 그런 천막에서 봐야 제맛인가 봅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이후에도 우리나라에 두어 차례 더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 같은 글로벌 서커스 대기업도 코로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2020년 캐나다 법원에 파산 보호를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보고 현실의 시름을 잊고 즐거움에 빠집니다. 복잡하고 슬픈 생각을 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국가의 지도자들은 서커스를 정치에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지던 검투사들의 경기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곧 서커스이니까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보면 콜로세움에 모인 로마의 시민들은 스펙터클한 검투사의 경기도 보지만 던져주는 빵을 받으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포퓰리즘의 현장입니다. 경기에서 패한 검투사의 생사는 참석한 황제의 엄지 손가락이 결정하는데 황제는 경기장에 모인 시민들의 다수결 의견에 따라 생과 사의 손가락 사인을 내립니다. 이것은 데모크라시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지도자들은 서커스를 이용하여 군중정치를 하며 대중을 컨트롤하였습니다. 그 효과를 터득한 로마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본토에 버금가는 웅장한 원형 경기장을 지었습니다. 터키, 프랑스, 스페인, 튀니지 등 지중해를 빙 둘러 과거 로마의 속주였던 국가에선 어딜 가도 쉽게 로마의 원형 경기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까지 서커스 정치는 독재자들의 주요 정치 메뉴가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가신인 괴벨스의 선전 정치가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나치의 정치 행사는 주로 밤에 거행되었습니다. 거대한 광장이나 회랑에 대규모 군중을 운집시켜 화려한 불과 조명을 이용하여 퍼레이드나 연설을 하면 그 순간 사람들은 서커스의 관객이 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서커스의 절정은 1936년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베를린 하계 올림픽이었습니다. 10만 명의 거대한 군중이 운집한 메인스타디움에서 실시된 세계 최초의 생방송 중계 올림픽이었으니까요. 로마 콜로세움의 재현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독재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확대된 공연장에서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여 스펙터클한 서커스를 보여주며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지구 최대의 서커스,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입장식 (출처, 나무위키)


사양화되어가고 있는 자유 진영 국가들의 전통 서커스와는 달리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서커스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여행 시 서커스 공연은 관광의 필수 코스입니다. 북경이나 상해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서커스 관람 경험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서커스는 중국 내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습니다. 곡예사를 양성하는 학교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국가에서 적극 지원해서 인기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서커스단만 해도 무려 60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경우 내용은 다르지만 볼쇼이 서커스는 여전히 유명한 러시아의 관광 상품으로 건재합니다.


서커스는 인간의 신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한적인 몸동작으로 고난도의 기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체육인이기도 하고 예술인이기도 할 것입니다. 기교에 따라 기계 체조, 리듬 체조,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 댄싱,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발레, 현대 무용 등을 하는 사람들과 희미한 경계선 상에 놓여있어 보이기까지 하니까요. 실제로 체육인이나 예술인이 은퇴 후 태양의 서커스나 라스베이거스 서커스 같은 무대로 전직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서커스단인 동춘서커스와 그 전문 인력을 잃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손실일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래서라도 보존 가치가 있는 우리 문화의 자산을 잃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서커스를 보러 가면 흔히 그 공연을 진행하고 막간에 등장해 웃음을 선사하는 피에로라는 광대를 보게 됩니다. 특히 이들에게 친밀한 그는 서커스 공연장 밖으로 나와서도 활동을 하곤 합니다. 축제의 현장이나 테마 파크 등 이벤트가 열리는 곳에서 우린 그를 쉽게 발견하곤 하니까요. 본래 피에로(Pierrot)는 슬픈 표정의 광대입니다. 그런 슬픈 피에로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사람을 웃기니 그의 웃음은 그래서 역설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프랑스인이니 미국으로 치면 배트맨에 등장하는 조커(Joker)가 유사한 성격의 인물일 것입니다. 사실 서커스 천막 밖에서 슬픈 일이 있어도 그 슬픔을 품은 채 천막 안쪽에 와서 서커스를 보면서는 웃는 우리 모든 인간들 피에로나 조커와 같은 속성을 지닌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가장 많이 웃긴 희극 배우의 대명사인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라고 했을 것입니다.


서커스 공연의 감초 피에로 (출처, 두산백과)


줄을 타며 행복했지 춤을 추면 신이 났지

손풍금을 울리면서 사랑 노래 불렀었지

공 굴리며 좋아했지 노래하면 즐거웠지

흰 분칠에 빨간 코로 사랑 얘기 들려줬지

영원히 사랑하자 맹세했었지

죽어도 변치 말자 언약했었지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


<곡예사의 첫사랑> / 가수 박경애 / 작사, 작곡 정민섭 / 1978  


동춘서커스(www.circusdc.com)의 현재 내부 상황을 알지는 못합니다. 어려운 살림은 위에서 보듯 뻔하게 예측되지만 그래도 주인이 누구인지, 단원 구성은 어찌 되는지, 운영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지원은 어디서 어떻게 받는지 말입니다.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그들의 서커스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많이 모던화되었을 것입니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니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동춘서커스를 제대로 살려보려고 부천시와 손을 잡고 그 시에 상설 공연장을 짓다가 무산된 일이었습니다. 그 짓다만 공연장 건물은 지금도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실타래처럼 꼬여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 건물이 완공되어 동춘서커스의 단원들이 그 공연장 무대에 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유배 가있듯 가있는 대부도 그 섬에서 나와서 말입니다. Show must go on!  


부천시에 건립 중 공사가 무산된 동춘서커스 공연장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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