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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23. 2022

안탈리아, 그리고 로마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늘 2인자였습니다. 잡힐 듯한 대권과는 끝내 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드엔딩인지 해피엔딩인지 모를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로마가 가장 주목을 받던 시대에 살았는데 바로 그의 곁에 역사를 거쳐간 많은 로마인 중 가히 1등 로마인으로 꼽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늘날 프랑스인 북부 갈리아 지역을 정복할 때, 그리고 기수를 돌려 제국의 수도 로마를 향하여 루비콘 강을 건널 때 그는 항상 그의 곁에서 오른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군인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도 정치적 욕망이 남달리 강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그는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를 바로 처단하지 않았습니다. 주군의 복수보다 여론의 추이를 먼저 본 것입니다. 카이사르를 위한 추도 연설을 할 때도, 그리고 그의 유언장을 발표할 때도 그는 마치 쿠데타를 수습하는 대장군과 같은 모습으로 의연하게 군중을 대했습니다. 이후 집권을 위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그 프로세스를 밟아 나간 것입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인의 향수가 강해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는 쫓기듯 로마에서 빠져나가 몰락했고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한 어린 옥타비아누스가 새로 부상했습니다. 안토니우스보다 18살이나 어린 그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인 지배가 아닌 카이사르 때와 같은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른바 2차 삼두정치, 그 트리오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였습니다. 카이사르가 1차 삼두정치 시 로마 북부 갈리아에서 맹활약했듯이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라 불린 로마의 동부 지역에서 정복 작업을 하며 그만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어쩌면 그 만남은 그의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녀로 인해 그냥 불행하게만 끝났을지도 모를 그의 50년 인생 마지막이 행복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름 아닌 클레오파트라가 바로 그녀였으니까요.


그녀는 한때 그의 주군인 카이사르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갔을 때 그녀를 알게 되어 둘 사이엔 아이까지 낳았으니까요. 이제 그녀는 그의 오른팔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애인이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주군인 카이사르의 여인이었을 때부터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는 부인인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까지 감행하며 클레오파트라에게로 갑니다. 그의 인생에 중차대한 시점, 이렇게 사랑에 눈이 멀어 정적의 누이인 로마 여인과 이혼하고 속주인 이집트의 여인과 결혼할 때부터 로마인으로서의 그의 운명은 정해졌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가 정복한 아나톨리아의 땅을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유지가 아닌 엄연한 로마의 영토였는데 말입니다.


안토니우스, 그도 루비콘강을 건넜습니다. 이제 그는 옥타비아누스 개인의 적이 아닌 로마의 적이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 대 이집트, 옥타비아누스 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벌인 악티움 해전(BC 31)에서 그 연합군은 대패하고 그 커플은 같은 해(BC 30)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일설에 그는 그리스 악티움의 앞바다에서 패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해서 자살을 감행했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클레오파트라의 곁으로 옮겨져 그녀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죽음, 적어도 바로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남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년 2인자인 그였지만 콧대 높이 하나로 역사를 뒤바꿀 수 있다고 평가받는 세기의 미녀 품에 안겨 죽었으니 말입니다. 가히 1인자가 부럽지 않은 죽음이었습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1963.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은 이 영화를 찍고 영화처럼 실제 결혼에 골인, 1964


순간 제 머릿속에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그녀로 연기한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역사 속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실제 그녀로 겹쳐집니다. 상상의 나래라는 것은 이렇게 양화를 구축하곤 합니다. 영화에서 그녀는 그녀의 죽음마저도 신화로 만든 자살의 도구로 독사를 선택합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 커플의 죽음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처럼 시차를 둔 동반 자살로 처리했습니다. 그때 그 어린 연인들이 선택한 자살의 도구는 독약이었습니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을 더 시차가 길었던 그들의 동반 자살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도 쓴 그였으니까요.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로마는 이제 명실공히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의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1차 삼두정치 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대권을 잡았듯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1인자가 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황제를 꿈꾸었을지는 몰라도 공화정의 종신 독재관이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제정의 황제가 되어 새로운 로마를 열어갔습니다. 그전에 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커플을 이집트의 한 무덤에 같이 묻어주었습니다. 자기 누이와 이혼하고 로마에 등을 돌린 그였지만 그들의 사랑만큼은 가상히 여겼나 봅니다. 그들이 생전에 만나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던 곳, 그들이 마치 신혼 여행지처럼 즐긴 그곳은 이집트 이전에 안탈리아였습니다.


안탈리아.. 그곳은 지중해의 동쪽 끝 오늘날 튀르키예의 바닷가위치해있습니다. 마치 지중해를 인체로 본다면 겨드랑이와 같은 은밀한 위치에 그 고대 도시는 숨어 있습니다. 사시사철 햇살이 좋고 따뜻한 그곳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유명 휴양지로 알려져 주변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곳은 지중해 동부에서는 가장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지중해의 보석 안탈리아 , 2017 (지도 출처, 구글맵)


안토니우스가 동방 지역을 정벌할 때 클레오파트라는 그곳까지 올라와서 그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의 조국 이집트의 운명이 그 로마인의 손에 달렸으니 바닷길을 헤치며 먼길을 올라오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조국이 로마로부터 위기에 처할 때마다 로마의 실력자와 관계를 맺으며 위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나일강의 풍부한 수원으로 로마가 탐내는 밀이 풍부해 로마의 빵공장과 같은 역할을 하던 이집트였습니다. 아마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올 때 그녀는 6년 전(BC 47) 만났던 과거의 남자 카이사르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죽자마자(BC 30) 그녀는 로마의 새로운 지도자 옥타비아누스도 유혹했다고 합니다. 아이까지 낳은 옛 남자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그였습니다. 콧대 높은 그녀였지만 그녀도 인간이기에 생존 본능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로마의 1인자로 부상하는 남자들을 만났고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영웅호걸이 즐비했던 로마는 세월을 거치며 수도를 오늘날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깁니다. 그 도시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건국 때부터 그들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 반도의 서로마는 476년 멸망했어도 동로마라 불리고, 비잔틴제국으로도 불린 그곳은 천년의 역사를 더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난공불락의 성이라 불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로마의 신화는 완전히 끝이 납니다. 당시 그 성곽 도시는 이슬람 과학 문명의 힘으로 앞서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초대형 대포로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서 그때부터 그 땅은 오스만 제국의 후손이 대대로 차지해 오늘날의 튀르키예가 되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좁디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면 바로 연결되는 그 땅은 고대로부터 아나톨리아라 불렸습니다. 아나톨리아(Anatolia)는 해가 뜨는 동쪽의 땅이란 뜻으로 신화 속 태양의 신인 아폴론(Apollon)과 어원을 같이 합니다. 고대 그 지역 안탈루스 황제가 세운 도시 안탈리아(Antalya)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 땅 너머 로마인이 아시아(Asia)라 부른 아(A)도 어원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시아는 과거 로마인이 불렀던 아시아보다 훨씬 넓은 동쪽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나톨리아라 불린 그 지역은 오늘날 지도에선 소아시아(Asia Minor)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안탈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튀르키예는 이슬람 국가이니 당연히 이슬람 문명의 흔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5년 전인 2017년 10월 방문해서 본 그곳은 마치 이탈리아의 고도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철저히 고대 로마의 도시였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 커플이 로마 유적지 어디선가 툭 튀어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안탈리아엔 로마가 살아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로마의 것을 그래로 놔둔 것이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는 참 잘한 일이 되었습니다.


안탈리아 페르게 바닷가에 있는 아폴론 신전, 2017


선조의 숙원 사업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였지만 그를 비롯한 대대로 그의 후계자인 술탄들은 기독교와 로마 문명을 탄압하거나 해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입장에선 이방인이고 이교도인 로마인에게 세금만 낸다면 문제 삼지 않는 관용의 정책을 편 것입니다. 안탈리아에 로마의 유적이 그대로 산재한 이유입니다. 이스탄불의 랜드마크인 성 소피아 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는 로마의 대성당이었던 것을 오스만 제국은 정복 후 그곳을 모스크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 1천 년 전에 동로마의 짝꿍인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의 문화파괴주의(vandalism)가 무슬림이 정복한 그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선 이해가 가지 않지만 종교적인 면만을 본다면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하고, 존재는 같으나 이름은 다른 야훼와 알라를 각각 유일신으로 섬기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술탄이 후손을 위해 잘했다는 것은 그의 선견지명으로 그의 후손이 일정 부분 먹고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탈리아만 보더라도 연간 2천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오니까요. 이것은 코로나 이전 우리나라 연간 해외 관광객 수가 1천3백만 명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물론 이곳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바닷가 휴양지이니 다른 고대 로마 도시와는 다르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휴양지에 이렇게 훌륭한 유적지까지 있다는 것은 안탈리아를 훨씬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로마 때문에 더 오면 더 오지 덜 올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안탈리아엔 과거 로마인들이 거주했던 집터, 수로, 시장, 신전, 원형극장, 전차경기장 등이 마치 제국의 수도 로마처럼 그대로 다 있습니다. 특히 원형극장은 복원 상태가 일품이라 지금도 그곳에선 매년 9월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 시 그 극장의 음향 상태를 직접 확인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소리가 살아서 극장 곳곳에 울려 퍼졌습니다. 극장의 맨 아래 무대에서의 평범한 육성이 1만 5천 좌석의 계단 맨 꼭대기에서도 생생히 잘 들린 것입니다. 과거엔 그곳에서 연극 공연이 열렸겠지요. 그저 로마인의 건축 기술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안탈리아 아스펜도스에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는 로마의 원형극장, 2017


지중해를 빙 둘러싼 국가와 도시들 중 그렇게 과거 로마의 덕을 보는 곳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이나 안탈리아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 선조는 과거 로마제국의 침략으로 핍박을 받았겠지만 후손들은 로마가 그곳에 전수한 문명과 세운 건축물로 많은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니까요. 로마가 지나간 속주엔 그들의 제전인 신전과 오락 시설인 극장과 경기장이 어김없이 들어섰습니다. 로마 본토 이탈리아 반도 북쪽의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 서쪽의 히스파니아라 불린 곳에 있는 도시들과 동쪽의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 그리고 남쪽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나 튀니지의 도시들을 가보면 "여기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과거 로마의 유적지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대표되는 원형경기장은 도시 로마에만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안탈리아에서 제 눈을 끈 건축물이 또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올드타운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입니다. 그는 로마의 전성시대라 불리는 오현제 시대의 세 번째 황제로 제위 기간(117~138) 절반을 제국 전역 출장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순방을 했음에도 그의 업적 중 최대로 꼽는 것은 역설적으로 제국의 영토를 줄인 것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거저로 더 넓힐 수 있었음에도 제국 경영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그렇게 안 하고 로마를 탄탄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그가 안탈리아에 온 것을 기념해서 만든 문이 바로 하드리아누스의 문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의 이름을 다른 곳에서도 들었는데 그곳은 안탈리아에서 아주 먼 브리타니아, 즉 오늘날의 영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브리타니아의 남쪽도 아닌 과거 로마인이 칼레도니아라 부른 오늘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에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하드리아누스의 방벽이라 불리는, 우리로 치면 DMZ의 철책선 같은 국경 표식 구조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는 마음 같아서는 그레이트 브리튼 섬이라 불리는 오늘날 영국 전역을 깨끗이 점령해 속주화하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북방의 칼레도니아인들이 워낙 거칠고 저항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곳을 포기하고 국경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약 120km에 걸쳐 300리 긴 방벽을 쌓은 것입니다.


같은 이름의 로마 유적지, 튀르키예 안탈리아의 하드리아누스 문(130)과 영국 브램턴의 하드리아누스 방벽(121~) (출처, piXabay)


구글맵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문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방벽까지의 거리를 검색하면 4,248km에 달합니다. 오늘날 육로, 해로의 교통수단으로 고속으로 쉬지 않고 달렸을 때도 무려 44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보다 10배나 먼 거리니까요. 그렇게 먼 곳에 걸쳐 같은 지도자가 만든 건축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더구나 모든 것이 요즘보다 느릴 수밖에 없는 그 옛날 그 시대에 말입니다. 실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의 방벽까지는 아니더라도 브리타니아의 론도니움까지는 방문을 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수도가 된 런던입니다. 그렇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21년 제위 기간 중 절반을 수도 로마를 떠나 외유를 했으니 10년은 로마의 왕좌를 비우고 다닌 것입니다. 그 정도 공백이면 요즘의 유무선 통신이나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정치를 해도 문제가 생길 텐데 그 시절 그는 그럼에도 별 문제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현제란 칭송을 들으며 로마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것은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보듯 그렇게 로마를 비우고 국경을 돌다가 그곳 전선에서 사망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제국의 경영이 가능했던 로마의 정치 체제도 또 놀랍기만 합니다.


만리길이 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과 벽 (출처, 구글맵)


이렇게 로마의 황제나 그에 준하는 지도자가 방문한 속주에는 어김없이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세워졌습니다. 속주의 총독이나 그 지역의 왕은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황제가 온다면 접대성 차원에서라도 그를 상징하는 기념물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곳을 방문한 황제나 지도자도 그 지역에 선심성 선물이든 통치에 필요한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세웠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로마의 키맨이 지나간 자리에 그들의 유적지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전 과거 로마가 침략했던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대대로 이렇게 로마로부터 빚 청산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까지 해봅니다. 로마의 그 유적들이 도시의 매력도를 높여 외지인들을 오게 만드니까요. 그런 로마의 유적에 로마 영웅의 러브 스토리까지 더해져 더 팬시하게 보인 안탈리아에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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