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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06. 2022

유 고 유고슬라비아?

You go Yogoslavia?

혹시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를 가 본 적이 있는지요? 눈에 익은 이름이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렇게 과거 지도 위에 있던 나라들 중엔 사라진 나라들이 꽤나 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재편이 일어나서 그렇습니다. 땅이 꺼져 고대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니 사라진 그 자리엔 신생 국가들이 태어났습니다. 마치 기업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조직 개편을 해서 있던 팀을 없애고 새로운 팀이 들어서는 모양새입니다.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런 나라들 중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들이 살아있던 저의 학창 시절엔 이들의 이름이 종종 헷갈리곤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비아로,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로바키아로 이렇게 뇌 속에서 양 국가 간 엉뚱하게 절반씩 후미를 교환하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일이 없어졌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는 시점에 이 두 나라는 각각 다른 방법으로 분리독립의 길을 걸었으니까요. 일단 체코슬로바키아는 아주 간단히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정확히 양분되었습니다. 마치 체코라는 남자와 슬로바키아라는 여자가 부부 관계를 청산하고 합의이혼을 하듯 사이좋게 무력 충돌 없이 1992년 말 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남남이 된 이 둘의 청산과 새 출발은 벨벳혁명이라 불립니다.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변의 블레드 성


문제는 유고슬라비아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유고와 슬라비아로 나눠졌으면 간단할 텐데 무려 6개의 국가로 분리돼서 독립했으니 말입니다. 6개 신생국가로 출범하였으니 제 생각 같아서는 6글자의 국명인 유, 고, 슬, 라, 비, 아 이렇게 각각 한 글자씩 국명을 가져갔으면 간단했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유고슬라비아의 출발이 6개 국가가 합체된 연방이었기에 그들은 해체되며 본래 있던 각자의 이름을 걸고 독립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달리 2001년까지 10여 년간 집요한 전쟁을 치르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세팅되었습니다. 과연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해 화약고라 불려 온 발칸반도의 나라답게 분리독립도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국제적으로 공인까지 이르지 못한 자치국까지 포함하면 7개 국가로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해진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달리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 유고슬라비아입니다. 물론 이렇게 산수적으로만 따진다면 이들의 분리독립을 촉발시킨 소련은 15개나 되는 국가들로 헤어졌으니 그곳은 더욱 복잡해진 셈입니다. 이렇게 재편된 국가들로 인해 학교에서 이것들을 암기하고 숙지해야 하는 학생들은 더욱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동부 유럽의 끝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9년 세계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문민정부 시절 세계화라는 기치 하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배낭을 짊어지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던 그 시절 한 손엔 유레일패스, 다른 한 손엔 노란색 표지에 유럽이라 쓰인 배낭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그들은 그렇게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기차를 무한정 갈아 타며 서부, 중부, 남부 유럽을 섭렵한 배낭족들은 이름도 '동쪽의 땅'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주로 수도인 비엔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그들을 옮겨줄 유레일패스로 선택할 수 있는 동부 유럽의 국가는 딱 하나 남았는데 그 국가가 체코슬로바키아였고 도시로서 종착역은 수도인 프라하였습니다.


블레드 호수 안 섬에 있는 마리아 성당에서 바라 본 블레드 성


배낭족들은 비엔나에서 마음의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기수를 돌려서 아니, 기차를 돌려서 다시 서쪽으로 갈 것인가, 아님 동쪽으로 더 들어갈 것인가를 말입니다. 프라하가 돈 없는 배낭여행객에겐 물가도 엄청 싸고 생각보다 좋다는데 그때까지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사실 프라하는 비엔나로 보면 동쪽은 아니고 북쪽에 위치합니다. 저는 그때 지체 없이 야간열차를 타고 프라하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풀린 지 2년도 채 안되어서 그런지 그 기차에 탑승한 저는 마치 당시 개봉한 지 얼만 안 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에서 어둠 속 그가 사는 트란실바니아의 기괴한 성으로 가는 마차 속 영국인 변호사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심경이었습니다. 그만큼 프라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미지의 도시였습니다.


자정 경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넘어갈 때 잿빛 제복을 입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를 젊은 남녀가 타서 입국 심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제가 제출한 여권을 무거운 표정으로 훑어보고 있었는데 그때 전 준비해 간 빨간 말보로 담배 한 보루를 그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배낭여행 출국 전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쉽게 통과하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해서 준비해 간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선물이라며 주는 것이라 했더니 그들은 이내 표정을 풀고 키득거리며 입국 도장을 곧바로 찍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침에 도착한 프라하 역은 다른 유럽 도시들의 역에 비해 지나치게 허름하고 낡았지만 실망보다는 국경에서의 일까지 오버랩되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심드렁한 생각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선 "아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상아빛으로 기억되는 아름답고 화려한 바츨라프 광장이 시원스레 제 눈앞에 촤악~ 하고 펼쳐진 것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없어 더 넓어 보이면서도 구석구석 다 보이는 기대 이상의 프라하의 봄에 저는 그렇게 도착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리고 25년이 더 올해 가을에야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와는 달리 이미 관광으로 유명해진 후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된 것입니다. 아, 유고.. 그 나라는 지금은 사라졌으니 갈 수 없는 나라라고 했지요. 하지만 갈 수는 있는 땅, 지금 그곳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의 6개 나라로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물론 이외에도 아직 공인받지 못해 국가인지 모를 코소보라는 자치국도 있습니다. 이렇듯 과거엔 여권 도장 하나면 돌아볼 수 있었던 나라가 지금은 6개의 국경선을 넘어야 다 돌아볼 수 있는 나라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에 선물용으로 쓸 담배는 이젠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6개의 국가로 분리독립된 구 유고슬라비아


과거 로마제국 시절 그 땅은 일리리아라 불린 지역이었습니다. 그 북쪽엔 오늘날 헝가리인 판노니아, 동쪽엔 루마니아인 다키아, 남쪽엔 그리스를 잇는 마케도니아가 있던 시대입니다. 발칸반도의 일리리아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로마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와 마주 보며 근접했기에 제국의 수도 로마와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가까운 발칸반도의 해안가엔 라틴계 민족이 다닥다닥 모여 살았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이 모여 살던 서쪽은 따로 떼어 내어 달마티아라 불리었습니다. 일종의 특별구 취급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라틴족이 살던 그곳에선 로마의 황제들도 7명이나 배출되었는데 그들 중 4두정치로 후기 로마제국 경영의 기틀을 마련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오늘날 이스탄불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게르만 민족 이동 시 이 지역은 북쪽에서 슬라브족이 내려와 자리를 잡아 오늘날과 같은 남슬라브인이 주축을 이루게 됩니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들 언어로 '남부 슬라브인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 시 그간 역사 속에서 별 볼 일 없었던 이곳이 아연 시끌벅적해집니다.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서부 유럽의 주력 십자군들이 이곳을 통과하였기에 그랬습니다. 그때까지 유럽의 서쪽만을 비추워 오던 역사의 카메라가 피사체를 따라 아드리아해와 발칸반도를 비추게 된 것입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던 시기엔 이 땅은 그들의 세력 하에 들어가고, 이후 그들이 힘을 잃었을 땐 유럽 중원의 맹주인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20세기까지 오게 됩니다. 이윽고 세계가 주목하게 된 1914년 7월의 어느 날 이곳에서의 총성을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당시엔 세르비아 왕국인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이 지역 청년에게 암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달은 1943년에 그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6개국 연방인 단일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를 출범시킵니다. 남슬라브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칭송받는 티토 대통령이 그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20세기 중반의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가였지만 동구에서 가장 높은 임금 수준을 자랑하며 소련의 눈치도 안 보고 중립외교를 펼치며 서방과도 자유로이 교류하였습니다. 그래서 유고슬라비아는 제3세계의 맹주가 됩니다. 하지만 1980년 티토 대통령 사후 유고 연방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돌아가 쪼개집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20세기 말 유고슬라비아 전쟁 또는 내전은 지도자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국가의 운명을 크게 좌지우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가 됩니다. 분열도 분열이지만 오늘날과 가까운 밀레니엄 시대에 한 국가 국민이었던 죄 없는 사람들이 무려 13만 명 넘게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그가 살아있었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입니다.


바다 위에 떠있는 듯한 몬테네그로의 스베티스테판 섬


그 국민들이 죽은 이유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속된 전쟁 시 6세기경부터 헐렁하지만 그래도 나름 하나로 지속되어 온 남슬라브인이라는 같음은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다름은 종교였습니다. 이곳은 지금도 많은 종교가 혼재하는 지역입니다. 고대 일리리아 시대부터 동도 아니면서 서도 아닌, 또는 동과 서가 모두 되는 지역이라선가 서방의 로마 카톨릭과 동방의 동방 정교회가 혼재하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엔 이슬람교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그것들 사이에 유대교와 개신교까지 있어서 한 국가 안에 있을 땐 종교의 자유로 문제 되지 않던 이런 종교들이 분열의 시기가 도래하니 문제가 되어 거침없이 쏟아진 입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카톨릭 국가이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는 정교회 국가,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자치국인 코소보는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국가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에 분열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죄 없이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는 힘의 다름입니다. 서로가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할 때 싸움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유고 연방의 맹주를 주장하는 국가는 세르비아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도 연방의 수도였습니다.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국가 재편 시 그들의 뜻대로 하고 싶었지만 다른 국가들이 동조하지 않으니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특히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에서 학살이 심하게 자행되었습니다. 그곳에도 세르비아 정교인들이 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카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도 세르비아 정교인들은 있기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국가였을 때야 이사도 막 다니고 옆집의 종교가 큰 문제가 안 되지만 국가가 달라지면서 특정 종교가 국교로 정해지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새로 국경을 정할 때 집집마다 골목을 돌며 국경선을 그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적인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힘의 다름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일으키는 무력을 우리는 역사상 숱하게 목도해왔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세르비아 대 반(反) 세르비아의 힘의 대결, 정교회 대 반(反) 정교회의 종교의 대결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그곳 아드리아해 & 발칸반도에 이제 포연은 사라졌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깨끗하고 청명한 하늘 아래 파란 바다만 넘실댈 뿐입니다. 제가 가서 본 사람들의 표정도 매우 활기차고 밝았습니다.

하긴 전쟁이 끝난 지 4반세기가 지났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이곳은 그간 TV 방송 프로그램에도 적잖이 소개되어서인지 유럽의 새로운 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여행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체코나 헝가리가 동부 유럽 여행지의 끝에서 안으로 더 들어간 새로운 여행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방향으로 보면 이곳은 체코나 헝가리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입니다. 이탈리아와는 위도가 비슷해 기후까지도 유사합니다. 주로 크로아티아가 차지하고 있는 해안가 달마티아 지역은 인간이 살기에도, 휴양하기에도, 여행하기에도 가장 좋다는 지중해양성 기후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사시사철 늘 현지인과 외지인이 바글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명소인 성벽 아래 부자카페


이렇게 과거 어두침침했던 유고슬라비아는 국가 재편 후 나라가 많아진 만큼 매력도도 급 상승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화사해진 것입니다. 여행사 입장에서도 동구권 유고슬라비아 한 나라 여행으로 1주일치 상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과거 지도에는 없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신선한 6개국 관광으로 판매하는 것이 모객에도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곳에 국적기를 띄우지 않기에 주로 터키항공이나 아랍계 항공을 통해 경유해서 다다르곤 합니다. 저는 이번 여행 시 터키항공으로 이스탄불을 경유했는데 오갈 때 모두 만석이었고, 때는 이스탄불 행 비행기가 한 편 증편되었을 정도로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었습니다. 그간 코로나로 인해 묶여있던 여행자들의 여심(旅心)이 강력하게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여행은 놀라움의 경험입니다. 그 놀라움의 대상은 곳(place)과 것(object)인데 우린 그것을 비로소 현장에 가서 실제로 보며 경험합니다. 그런 놀라움도 제겐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알던 것을 확인하고 느끼는 놀라움입니다. 책이나 영상을 통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직접 가서 경험하면서 놀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놀라움은 대개 제가 학습으로 인지한 것보다 그곳이나 그것이 더 대단한 경우입니다. 이번에 가서 본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가 그런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아마 과거 어느 봄날 아침 배낭을 메고 바라본 체코의 프라하도 같은 놀라움이었을 것입니다.


일단 두브로브니크 성의 규모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방대해서 놀랐습니다. 아드리아 바닷가에 높고 장엄하되 아름답게 빙 둘러쌓아 축조된 그곳은 안팎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살펴보는 여행자를 압도하였습니다. 도시 뒤 스르지 산에 올라가 그곳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았을 때는 마치 스펙터클한 쇼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역사에서 두브로브니크의 과거인 라구사 공국은 그렇게 비중 있게 취급되지 않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과거 그곳은 십자군 전쟁 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주요 항구였고 동서의 문물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질 때 일찍이 라구사 공국은 30일(trentino) 자가격리를 실시해서 효과를 보았고, 이후 이것은 베네치아 등으로 퍼지며 40일(quarantine)로 바뀌어 오늘날 자가격리를 뜻하는 용어(self-quarantine)로까지 정착되었습니다. 즉 이번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실시한 자가격리의 발원점이 바로 두브로브니크인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도시라 그곳 성곽 위 도로를 걸으며 불현듯 학창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한 줄도 안 나왔던 이 도시였지만 한 페이지를 할애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스르지 산에서 내려다 본 두브로브니크 전경


제가 생각하는 여행의 두 번째 놀라움은 이전엔 전혀 몰랐던 여행지를 가서 보고 느끼는 놀라움입니다. 세어 보니 이번 여행 중 버스가 정차한 여행지가 12곳이었는데 그들 중 제가 난생처음 들어 본 여행지는 정확히 절반인 6곳이었습니다. 그곳들 중 저를 더 놀라게 한 곳은 몬테네그로의 코토르와 크로아티아의 코르출라였습니다. 코토르는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아드리아해의 코토르 만에 바다와 같은 높이에 있는 고성 도시로 뒤로는 기암절벽의 높은 산이 막혀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과거 그곳 사람들은 행여 뒤편 산 쪽을 타고 적들이 내려올까 싶어 성 뒤로 빙 둘러 높은 산성을 쌓았습니다. 성 안은 역시나 중세 유럽의 정형성을 갖춘 팬시한 마을이 아기자기하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도 플리트비체와 같은 자연 풍광보다는 이렇게 역사가 서린 유적지에 더 많은 눈길을 주곤 했습니다. 평소에도 대개는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편입니다. 하지만 코토르를 보며 들은 생각은 "이렇게 대단한 곳을 난 왜 지금까지 전혀 들어본 적도 없을까?"라는 딱히 반성도 아니고 자괴감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냥 놀라움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또 들게 한 곳이 코르출라라 불리는 섬입니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곳은 작은 섬이지만 섬 주변 바다를 빙 둘러 피라미드 모양의 완벽한 중세 도시의 정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안은 처음부터 계획도시로 설계되어 중앙을 관통하는 큰 도로 좌우로 바다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들이 대칭으로 길게 이어져 위에서 내려보면 마치 생선뼈를 연상하게 합니다. 도로를 직각의 십자가 구조가 아니고 그렇게 일정하게 각을 살짝 틀은 헤링본 구조로 만든 것은 해풍 통과의 최적성을 기하기 위함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마르코 폴로는 동방 무역상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자라며 동방 여행의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코토르와 코르출라, 이 두 도시는 모두 아드리아해 북쪽에 위치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은 곳입니다. 베네치아가 동방 무역의 종점으로 정점을 찍었을 때 이 두 도시는 그 중간 거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마르코폴로의 고향인 크로아티아의 코르출라 섬


이제 제 인생 여행 목록에 구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의 4개 국가와 그 국가들의 12개 여행지가 추가되었습니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제 짧은 지식으로 인해 수도였던 베오그라드와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고 우리나라 이에리사 선수가 탁구 우승 승전보를 전해준 사라예보 딱 이 두 도시만 알았었는데 말입니다. 이번 여행으로 인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입니다.


그곳을 여행하며 들은 전반적인 생각은 유럽의 동쪽은 서쪽과 비교했을 때 비슷하게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음에도 여전히 세상엔 덜 알려졌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의 역사라는 것이 힘으론 서쪽의 스페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강대국이 주도하고, 종교적으론 동쪽 국가들이 믿어온 동방정교회보다 서쪽 강대국이 믿어온 서방카톨릭이 주도하다 보니 그렇게 흘러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구의 한 국가였던 유고 연방도 위에서 설명했듯 똑같은 힘과 종교의 논리가 작용했던 것처럼 이 논리는 유럽은 물론 세계 전체에도 작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몰랐던 곳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어 그곳에선 많이 놀랐지만 글을 쓰는 지금은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스타르라는 전혀 몰랐던 도시도 방문했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는 고도로 20세기 말 내전 시 전쟁의 상처가 심하게 훑고 간 곳입니다. 지금은 다 원복 되어 건물 곳곳의 총탄 자국만이 당시의 사태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서 놀란 것은 다른 곳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스타르는 도시에 들어서면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가 시야에 많이 걸릴 정도로 무슬림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엔 모스크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카톨릭 성당도 눈에 보이고 정교회 성당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길에 유대교의 회당인 시너고그가 있던 터도 보였습니다. 개신교 교회는 있는지 모르겠네요. 모스타르는 이렇듯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임에도 기독교를 구성하는 양대 교회와 이슬람교 사원은 물론 유대교 회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과거엔 그렇게 그곳에서 모두 각자의 신을 숭배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전경. 멀리 산위로 십자가가 보임


코소보 문제가 아직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지금 남아있는 유고슬라비아의 그 퍼즐이 깨끗이 풀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처럼 그곳에 힘과 종교의 다름이 작용하지 않는 오롯한 평화도 또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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