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시간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시간으로 묶인 세상의 룰에 크게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와 관계하는 사람들이 시간에 관한 한 그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제가 직원으로 회사 재직 시 당시 사장으로부터 많이 듣곤 했던 말이 있습니다. 비교적 분위기가 자유로운 광고회사임에도 그는 출근 시간만큼은 칼 같은 잣대를 들이대었습니다. 평상시야 그렇다 치더라도 경쟁 프레젠테이션이라도 걸리면 매일 야근은 물론 휴일도 반납하고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인 회사였는데 새벽까지 야근하지 않는 이상 그는 아침 출근만큼은 정해진 시간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이 변해 요즘은 언감생심 구시대 근태 관리인 이것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당연한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심 저도 동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단서를 하나 달곤 했습니다. 그런 조치에 대해 마뜩하지 않은 표정을 짓는 직원들에게 "단, 천재라면 열외!"라고 예외 조항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천재라면 회사를 아예 안 나와도 상관없어"라고까지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일반 업무 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재라면 회의나 리뷰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중간보고는 안 해도 좋으니 마감 시간 전까지만 알아서 최종 결과물을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천재가 주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지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시하는 사장이나, 그것에 동의하는 저를 포함한 상대적으로 훨씬 다수인 일반인 범재들은 그런 믿음을 못 주기에 주어진 일 량을 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사전 체크를 위해 정해진 시간 룰을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저는 산울림의 김창완 아티스트를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쓴 <불후의 산울림>이란 글에서 1977년 그가 만든 첫 곡인 <아니 벌써>가 하늘에서 전파를 타고 제 귀에 '툭'하고 떨어진 순간 그 혁명성에 놀랐고, 이후 계속해서 보여준 그의 행보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제 주변엔 저와 같이 그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천재형 인재라고는 인정할 것입니다. 물론 그의 음악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이겠죠.
이때 천재의 가장 큰 준거는 독창성과 우수성입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에 준하는 성과를 이룬 사람인데 그 결과물이 뛰어나 세상에 파급력을 보여줄 때 그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재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에 파급력이 없다면 그는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이 그의 작품 <날개>에서 얘기한 '박제가 된 천재'일 것입니다. 이렇듯 천재는 없던 것을 창조한 크리에이터이므로 그는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크리에이티브물이 사람들의 일상을 업그레이드시켜 행복하게까지 해준다면 그 천재의 크리에이티브 워크(creative work)는 더욱 가치 있다 할 것입니다. 때론 그것은 아주 커다란 파장으로 인류의 기존 생활이나 인간의 기본 감성을 변화시키기까지 하니까요. 모두가 천재라고 인정하는 스티브 잡스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김창완밴드 안산 예술의 전당 공연, 2022. 8. 20
<불후의 산울림>이란 글에 이어 김창완 아티스트에 대해 계획에 없던 이 글을 또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전에 쓴 그 글로 인해 애프터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 인트로에서 시간을 끄집어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애프터 사건에서 발생했던 일이므로 글 아래에서 같이 밝히겠습니다. 천재 이야기를 조금 더하면 천재엔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한 분야에만 능통한 천재입니다. 최근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한국계 수학자인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런 예에 해당되겠습니다. 물론 그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다른 천재적인 재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그는 오롯한 수학 천재입니다.
둘째는 여러 방면에 능통한 천재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밝힌 3인방이 그런 예에 해당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이며 공학자이며 의학자이기도 했으니까요.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도 마찬가지로 회화는 물론 조각과 건축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천재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저는 르네상스형 천재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김창완 아티스트는 이런 후자에 해당되는 천재일 것입니다. 그는 1977년 가요계에 산울림으로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45년 간 멈추지 않고 다수의 작사, 작곡은 물론 기타 연주까지 하며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연기자로서 그는 안방 TV와 극장 스크린은 물론 연극 무대에서도 간혹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화가로서의 재능도 보여주고 있는데 제가 확인한 바로 그는 생각보다 많은 자작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또 또 그리고 그런 그의 라이프를 주제로 청중들에게 노래가 아닌 강연을 하기도 합니다. 음악에 가려서 덜 보이기는 하지만 국내에 이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있을까요? 물론 그래도 그의 음악적 재능이 가장 월등하긴 할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제 정의로 보면 르네상스형 천재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통 르네상스형 천재는 아닙니다.
지난 8월 20일 오후 5시, 저는 그가 이끄는 김창완 밴드의 안산시 예술의 전당 공연을 힘겹게 관람하였습니다. KBS TV <불후의 명곡> 강릉 록 페스티벌 편을 보고 감동을 받아 <불후의 산울림> 글을 쓰고 내친김에 급 공연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실은 김창완 아티스트의 보컬이 한시라도 더 청춘일 때 라이브로 듣고파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힘겹게 봤다고 하는 것은 만석으로 티켓이 없어서 이후 몇 번에 걸쳐 들락거리며 티켓팅을 시도한 결과 누군가 취소한 티켓을 구해서 갔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취켓팅이라고 부른답니다. 아무튼 저는 그렇게 그 시간 벅찬 마음으로 관객석에 앉아 김창완 아티스트를 보며 그가 부르는 산울림의 곡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100분 공연이었지만 앙코르 곡까지 포함하여 120분간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게스트로 초청한 가수도 없고, 중간에 인터미션도 없는 스트레이트로 연주만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가수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들의 곡이 모자라서도 그렇게 못 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로 시작한 김창완 아티스트는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전만 빼고는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쉼 없이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죽하면 관객석의 진성 팬들이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잠깐 쉬고 하라는 불만 아닌 진정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전반부는 서정적이고 조용한 산울림의 곡을, 후반부는 신나고 빠른 곡으로 관객들로 가득 찬 공연장의 윗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안산 공연에서 열창 중인 김창완 아티스트
유일하게 노래가 쉬는 시간은 중간중간 김창완 아티스트가 짧게 멘트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도 그는 예의 특유의 말솜씨와 힘 빠지고 느릿한 화법으로 좌중을 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세 번째 중간 멘트쯤에선가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가 저를 불쑥 호명한 것입니다. 무대에서 관객석을 향하여 혹시 제가 왔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김창완 아티스트는 저만 알고 그는 저를 전혀 모르는 사이었는데 또렷하게 제 이름 석자를 부르며 저를 호명하였습니다. 제가 쓴 <불후의 산울림> 글을 누가 보내줘서 읽어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에 저를 그렇게 찾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쓴 그 글 말미 PS에 표를 구해 가게 되었다며 브라보를 외쳤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창완 아티스트가 받은 제 글은 산울림 멤버인 동생분이 인터넷상에서 우연히 제 글을 보고 그것을 형님께 전송한 것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서울 집 근처에서 늦은 저녁 약속도 있고 해서 바로 올라가야 했지만 왠지 그냥 가기엔 그렇고 해서 무대 뒤 대기실로 김창완 아티스트를 찾아갔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 반갑게 맞이해주셔서 서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환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탭을 통해 저를 찾아오라고 지시를 내린 터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창완 아티스트로부터 저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그의 집에서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시간이 되면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공연 중간에 저를 호명해 한 번 놀랐는데 저를 또 놀라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속으로 "이 분 대체 뭐지?" 하는 마음과 함께 다행히 약속도 없어 황송한 초청에 감사히 응하고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첫 만남, 첫 대화임에도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마치 오래간만에 만난 집안 형제지간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주도하였습니다.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의 대화의 기술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 물론 동생은 저입니다. 그날 밤에 김창완 아티스트는 제 명함의 연락처를 통해 모임 일정과 장소인 그의 집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그만의 이슬로 목을 축이는 사진과 함께..
안산 공연 중간 김창완 아티스트의 멘트 시 팬 서비스
이윽고 약속한 날이 되어 전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엔 인기 아카펠라 그룹인 메이트리와 몇몇 그의 지인들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저 말고도 서로 간에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호스트인 김창완 아티스트는 명절에 집에 모인 동생들을 대하는 큰 형님처럼 편안하게 모임을 물처럼 흘러가게 해주었습니다. 결국은 그의 노래까지 들려주면서 말입니다. 모임에서 오가는 것은 대화뿐만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역시나 술이었습니다. 모두가 릴랙스한 자세로 술잔을 부딪치며 형식을 갖추지 못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었습니다. 심포지엄(symposium)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기록한 것과 같은 그 <심포지엄(향연)>이 계속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창완 아티스트에게 궁금한 한 가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통상적인 천재의 기준에서 그가 예외적인 면을 보이고 있는 게 있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라디오 방송 DJ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과 천재와의 사이엔 아무 상관성이 없으나 그 방송이 매일 방송이고 더구나 그것이 아침 방송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위에서 설명한 천재와 상관성이 약한 시간이 개입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침이라 강하게 말입니다.
그는 1995년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9시에 SBS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도 데뷔한 다음 해인 1978년부터 지금은 사라진 방송국인 TBC의 <7시의 데이트> 진행을 맡았으니 지금까지 무려 44년 간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시간은 그의 하루와 생애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술인이 매일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한다? <청춘>을 노래하지만 그렇게 청춘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니 더 일찍 가야겠지요. 2시간 생방송이니 사전 준비까지 해야 하니까요. 실제 그는 매일 아침 6시 20분에 그 방송을 위해 여의도를 향하여 집을 나선다고 합니다. 그날 같은 심포지엄을 밤늦게까지 하고서도 말입니다.
라디오 방송 활동으로만 보면 그는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제 정의에는 없는 샐러리맨형 천재라 칭해야 하나요? 문과 천재나 이과 천재라면 그래도 혹시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자 칸트가 그가 평생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의 강가를 매일 오후 5시에 산책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김창완 아티스트는 시간의 속박성이 가장 약해 보이고 게으름조차 미학으로 보이는 예술 천재입니다. 사실 그의 외모와 룩에서도 그는 그런 게으름과 참으로 어울려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스스로 시간의 올가미에 잡혀서 살고 있다니요? 누가 뭐래도 그는 성공한 아티스트인데요. 그가 하는 연기든 저술이든 그것은 원타임이므로 매일 하는 라디오 방송과는 경우가 다를 것입니다.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을 왜 하시나요?"라는 저의 질문에 그가 답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과 행동이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프레임을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날도 그의 집 공간 위아래로 이곳저곳을 막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에겐 보였겠지만 그 또한 그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카메라는 그날 우리를 바라보는 거실 밖 정원에 설치해있을 수도 있고, 때론 그의 마음속에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확장하면 44년 간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것도 그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스틸 정사진과도 같은 그 삶을 그는 깨기 싫다고 했습니다. 실제 그는 사방이 조용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매일 아침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는 그렇게 그의 공간 주변 정리부터 한다고 했습니다. 그날도 에어컨 소리조차 시끄럽다고 하였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시계 소릴 멈추고 커튼을 내려요"란 그의 낮은 노랫소리가 귀에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비정형적 천재 김창완 아티스트
천재가 천재성을 세상에 드러내도 세상으로부터 바로 인정을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가 기존의 벽을 깨부수는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온 것이므로 기존의 질서를 잡고 있는 기득권의 반발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다수의 선호도가 올라가면 그때는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천재를 인정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에이스인 손흥민 선수의 경우도 초창기 축구 선진국인 유럽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음에도 국가대표에 아예 선발도 안 되거나, 되어도 후보로 벤치를 지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팬들과 여론이 들고일어난 후에야 그는 국가대표 선발로 뛰게 되었습니다. 기득권의 끈질긴 저항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산울림도 1977년 <아니 벌써>가 수록된 혁명적인 곡을 발표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줄줄이 히트곡을 냈음에도 당시 가장 권위 있던 KBS의 가요 대상은 1981년이 되서야 받았습니다. 손흥민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지표나 계수로 정확히 입증되는 이과 천재의 성과는 빼박이라 그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바로 천재로 인정되곤 합니다.
안산 공연에서 김창완밴드는 신곡을 발표하였습니다. 관객 환호에 묻혀 제목을 제대로 숙지하지는 못했지만 과연 그의 곡답게 역시나 바로 제 귀에 박혔습니다. 그 노래도 곧 점차 많이 들리겠지요. 그의 과거가 살아있는 산울림의 노래들은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신세대 젊은 가수들에 의해 계속 리메이크되고 헌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7080의 흘러간 가수가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 아티스트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일찍 방송을 위해 샐러리맨처럼 출근을 합니다. 비정형적(非定型的) 천재입니다. 천재의 정형을 파괴한 다소 기이한 르네상스형 천재의 루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과연 두고 볼 일입니다. 아니, 그것은 두고두고 볼만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래오래 그래 왔듯이 또 오래오래 산울림의 신화가 그를 통해 이어지길 희망합니다. 불후의 산울림, 불후(不朽)는 썩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자리를 먼저 파하고 그의 집을 나설 때 문밖까지 나와 이별을 아쉬워하며 골목이 꺾어져 제 모습이 사라지기 전까지 비스듬히 서서 따뜻한 눈으로 길게 배웅해 준 그의 모습이 글을 쓰는 지금 아른거립니다. 그날 향연에서 김창완 아티스트는 "스티브 잡스가 남기라고 한 흔적은 대단한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본 순간도 우리 인생에 그런 흔적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전 별을 보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