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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12. 2022

마드리드의 밤거리 - 2

스페인, 그리고 스페인의 음악

시간이 흐를수록 그 땅에 이슬람 국가의 힘은 빠지고 본토박이인 기독교 국가들의 힘이 강해지며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불리는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납니다. 이슬람의 침공으로 그간 이베리아 반도 중앙에서 밀려나 북부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기독교 국가들이 남진을 하며 세력을 키운 것입니다. 이 운동은 1479년 스페인을 양분한 서쪽의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동쪽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함으로써 완성이 됩니다. 여러 국가로 나뉘어있던 스페인이 하나로 통일된 것입니다. 결국 1492년 통일 왕국 스페인은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지였던 그라나다를 점령함으로써 그 땅에서 융성했던 이슬람 문명은 종식을 맞이했고 역사 속의 유산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베리아 본토 북쪽으로 밀려난 서고트족의 후예들
레콩키스타의 시작, 국토의 대부분을 회복
카스티야 연합과 아라곤 연합으로 스페인 통일의 기틀을 마련
이슬람을 완전히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한 스페인, 1492~


그리고 그 해 이사벨 여왕은 이탈리아에서 온 탐험가 콜럼버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그의 항해를 지원해주었는데 그는 그 여왕의 성은에 힘입어 보란 듯이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하고 그 땅에 스페인 국기를 꽂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사벨 여왕이 투자 대박을 친 것입니다. 산타마리아호 등 배 3척을 내주고 아메리카 대륙 그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했으니까요. 가장 먼저 가서 찜하면 자기 땅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스페인엔 본래 터를 잡고 살아오던 각종 유럽인에 아프리카인과 이슬람인이 더해지고, 거기에 먼바다 건너서 온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까지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는 항해 시 돌아올 때 아메리카 원주민 500명을 싣고 와 여왕에게 선물로 바쳤습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에 최초로 상륙하는 콜럼버스, 디오스코로 테오필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 1862


그렇게 아메리카 신대륙을 점유하고 지배함으로써 이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운 상승기가 온 것입니다. 게다가 이사벨 여왕의 아들인 펠리페 1세가 유럽의 중앙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의 일원이 됨으로써 그 위세는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제국을 물리치며 대적할 적이 없어 무적함대라 불렸던 해상강국 스페인의 해군은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인 1588년 칼레 앞바다에서 대패함으로써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100년 스페인 전성기가 지나고 대영제국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통일 왕국 스페인의 수도는 통일 여왕 이사벨의 고국인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바야돌리드였지만 그녀의 증손인 펠리페 2세는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겼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정 중앙에 수도를 정한 것입니다. 이후 마드리드는 500여 년간 오늘날까지 스페인의 수도로 명실상부한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이사벨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도 2세가 다스리던 아라곤 왕국의 수도는 사라고사였는데 이후 아라곤 연합의 중심지는 카탈루냐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부터 스페인의 1대 도시 마드리드와 2대 도시 바르셀로나, 이 두 도시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통일 후 모든 주도권이 이사벨 여왕의 카스티야와 마드리드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통일을 완성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세기의 결혼, 1479


특히 20세기 들어서 스페인 내전(1937~1939)이 벌어졌을 당시 철권 독재자인 프랑코가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박탈함에 따라 그에 항거하던 그곳 많은 사람들이 탄압을 받음으로써 그들의 악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에스파냐와 카탈루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사이가 안 좋은 것입니다. 위에 언급했던 분리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과거 이슬람을 그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협치를 하고, 결혼을 해서 통일까지 이루어냈던 그들이 현대에 와서는 반목하고, 이혼해서 남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는 서로가 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전쟁과도 같은 경기를 펼치곤 합니다. 두 구단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며 지구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양성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그 도시의 라이벌전은 축구의 클래식(엘 클라시코)이 되었습니다. 사실 유럽의 축구는 전쟁을 대신한다고 봐야 합니다. 각 나라별로 운영되는 자체 리그의 경기들과 리그 간 클럽 대항전, 그리고 국가 간 벌어지는 국가 대항전이 없다면 지역 간, 또는 국가 간의 실제 전쟁이 과거처럼 많이 일어날 텐데 축구가 그것을 어느 정도는 막아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 같은 축구, 엘 클라시코 포스터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태양 빛으로 정열까지 장착한 스페인 사람들이 감성을 구현한 예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음악보다는 미술 분야에서 더 그렇습니다. 당장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술가도 음악가보다는 미술가가 많을 것입니다.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피카소, 가우디, 미로, 달리.. 우리에게 익숙한 스페인의 미술가들입니다. 음악가는요? 글쎄요.. 사실 저도 글을 쓰기 전엔 정통 클래식 음악가로는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유명한 사라사테만이 유일하게 떠올랐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성악가로는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몽세라 카바예와 연주자로는 첼로의 카잘스 등도 떠오르긴 합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타레가, 로드리고, 세고비아 등 클래식 기타 음악가들이 떠오르는 스페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단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인 안달루시아와 발렌시아, 그리고 카탈루냐엔 사시사철 청명한 날씨와 내려 쬐는 태양으로 한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이런 자연환경에선 미술가들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화구 박스와 이젤, 그리고 도화지나 캔버스만 들고나가면 어디에 자리를 잡고 앉아도 그곳은 아틀리에가 될 테니까요. 반면에 음악가들은 어둑한 실내에서 책상과 피아노를 오가며 머리를 쥐어짜며 작곡에 몰두하곤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렬한 태양이 아닙니다. 태양의 밝은 빛과 높은 열은 음악가의 악상을 마르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도가 높은 북부의 밀라노, 비엔나, 라이프치히, 프라하 등에 모여 살며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겨울에도 난방이 제대로 안 된 추운 방에서 외투 깃을 곧추 세우고 손을 호호 불며 작곡에 몰두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스페인 남부처럼 지중해를 끼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도 딱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악가는 없지만 미술가는 많이 있습니다. 고흐, 고갱, 세잔느, 샤갈, 피카소 등이 그곳 도시들마다 자리를 잡고 활동을 하였으니까요.


또 다른 이유는 역사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르네상스가 피어난 15세기까지도 스페인에선 그 땅에서 중세 800여 년을 지배한 이슬람의 영향으로 정통 클래식과는 다른 음악적 토양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서양 음악의 계보인 고전파, 낭만파 등의 음악이 일어난 19세기 후반까지도 스페인에선 클래식이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독일이 주도한 교향곡과 이탈리아가 주도한 오페라가 스페인에선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음악은 무슬림인 무어인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깨끗이 내어주고 철수한 후부터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에서도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에선 민족적이고 민속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긴 세월을 함께 살았기에 믹스된 정서가 음악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스페인의 음악을 들었을 때 정통 클래식과는 달리 이국적으로 느끼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제 다시 마드리드의 밤거리로 돌아왔습니다. 음악회를 시작해야 하니까요. 이 자리엔 스페인 출신의 음악가와 스페인과 관련 있는 외국의 음악가들을 초청했습니다. 이곳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마드리드니까요. 초청 선정 기준은 스페인을 사랑하고, 스페인의 악기라 불리는 기타를 사랑하는 음악가들입니다. 우리가 소싯적부터 들어온 클래식 기타의 원전은 거의 스페인 음악가들의 곡입니다. 첫 소절 시작부터 심장도 함께 떨리며 트레몰로 되는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TV 주말의 명화에서 제목만큼이나 아련하게 들려오던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등이 그것들입니다. 또한 피아니스트인 그라나도스와 알베니즈가 작곡한 <스페인 무곡>과 <아스투리아스> 등의 곡들도 기타로 연주되곤 합니다. 제목에 국가명이나 지명이 들어가 있을 만큼 역시나 민족적이고 민속적인 색채가 강한 곡들입니다.


기타를 독보적인 클래식 악기의 반열로 올린 기타리스트 세고비아, 1893~1987


마드리의 밤거리엔 무곡에 맞춰 춤을 추는 댄서들도 보입니다. 플라멩코, 볼레로, 판당고 등 스페인에서 시작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댄서들입니다. 이상하지요? 스페인의 댄서는 같은 유럽이라도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니 말입니다. 왈츠와 발레를 연상하면 바로 차이를 느낄 것입니다. 귀족적이고 우아한 그런 음악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스페인의 무곡이고 춤입니다. 춤을 추는 그녀의 양손엔 왠지 캐스터네츠가 들려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그녀의 춤과 함께 때론 부드럽게 조용히, 때론 현란하게 몰아치는 기타 연주를 듣다 보면 몽환적인 그 분위기에 빠져, 그 소리는 흡사 어디선가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곤 합니다.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유래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춤 플라멩코 (출처, pixabay)


<마드리드의 밤거리>라는 타이틀은 보케리니의 현악 5중주곡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의 경쾌한 미뉴엣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였지만 그는 스페인에서 거의 그의 음악 인생 전부를 보냈습니다. 마치 독일인 베토벤이 비엔나에서 그의 음악 인생을 살았듯이 말입니다. 이 음악은 그가 마드리드의 밤거리를 걸으며 그 거리 풍경을 음악으로 담았을 것입니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말의 모습입니다. 보케리니는 특이하게도 보편적인 현악 4중주보다 5중주곡을 더 많이 작곡하였습니다. 그것도 첼로 연주자였던 그답게 첼로 2대를 등장시켰습니다. 첼로 2대, 바이올린 2대, 그리고 비올라 1대가 무대에 올라오는 현악 5중주입니다.


파가니니도 특별하게 마드리드의 밤거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역시 또 이탈리안인 그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가렛이 그로 분하여 출연한 영화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에서도 보여줬듯 신들린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그 폭발적인 연주 실력에 힘입어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리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파가니니는 기타를 위한 곡도 많이 썼습니다. 바이올린에 가려서 그렇지 그것만큼 연주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그의 기타 곡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기 TV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배우 고현정 씨가 맡은 여주인공 혜린의 테마곡으로 흘렀던 슬프고도 아름다운 곡도 있습니다. 원곡의 제목은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6번>입니다. 곡에서 기타는 복잡다단한 혜린의 심경처럼 처연하게 연주되는 바이올린 바로 뒷 발치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따라가듯이 긴장된 톤으로 보조를 맞춥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혜린을 위해 죽은 그녀의 보디가드처럼 말입니다.


마드리드의 밤거리에 흐르는 음악과 함께 우리의 가을밤이 감미롭게 익어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또 가을이 왔음에도 코로나로 인해 어딘가 훌쩍 떠나기에는 여전히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은 2022년 9월입니다. 그들의 음악과는 달리 자유롭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마드리드의 밤거리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을까요? 고대로부터 지구상 가장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오가며 밟았던 그 거리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합니다. 이 <마드리드의 밤거리> 음악회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마드리드의 밤거리 (출처, pixabay)



* <마드리드의 밤거리> 음악회는 프렌즈오브뮤직이 주관하는 2022년 세 번째 음악회로 9월 17일 오후 5시 서울 푸르지오아트홀에서 열립니다. 위의 글은 그 음악회의 프로그램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무대에서는 보케리니, 파가니니, 그라나도스, 타레가, 알베니즈 등의 음악이 연주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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