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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21. 2022

스플리트의 비극, 디오클레티아누스 - 1

달마티안, 또는 우리말로 달마시안이라 불리는 개가 있습니다. 1996년 월트 디즈니의 영화 <101 달마시안>에 출연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개입니다. 품격 있고 독특한 외모의 견종 달마티안의 인기에 힘입어서인가 영화가 히트를 쳐 4년 후엔 한 마리를 더 늘린 <102 달마시안>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이 개의 독특한 외모란 개성 있는 점박이 무늬입니다. 얼핏 보면 우리에게 더 먼저 알려진 포인터 견종과 비슷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개입니다. 포인터는 국적이 영국이지만 달마티안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크로아티아이니까요.


그런데 포인터(Pointer)는 이름에서 보듯 그 이름이 외모에서 유래하지만 달마티안은 출신 지역에서 유래합니다. 달마티안(Dalmatian)은 그 이름과 똑같은 지역인 달마티아(Dalmatia)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마티아는 국경선이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오늘날 크로아티아가 된 로마시대의 지역 이름입니다. 그런데 달마티아 출신 사람들은 영어로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개를 워낙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똑같이 불리어도 그것이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달마티아 출신 달마티안


지도에서 이탈리아와 그 오른 편의 바다 아드리아해와 또 그 오른 편의 달마티아를 보면 마치 한석봉 어머니가 떡을 썰어 놓은 듯이 비슷한 모양으로 나란히 누워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마티아는 오늘날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의 서부 해안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입니다. 과거 로마 시대 그곳은 일리리아라 불리는 속주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곳엔 많은 라틴족이 살았습니다. 드넓은 지중해의 상부인 아드리아해 연안이기에 따뜻한 지중해양성 기후로 사람들이 살기 좋았기도 하거니와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와 제국의 수도인 로마와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근자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신규 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달마티아의 피란, 로빈, 자다르, 스플리트, 코토르, 두브로브니크 등의 해양 도시들은 다 과거 그 시절 로마 시대부터 문명을 이룬 도시들입니다.


아드리아해 연안 달마티아 지방 (출처, 나무위키)
달마티아의 주인 크로아티아의 지도 (출처, Maps of World)


베네치아가 해양 강국으로 위용을 떨친 공화국 시절 그곳 아드리아해의 도시들은 다 그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곳을 호시탐탐 노려 수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무솔리니는 달마티아주를 영토로 편입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패전으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하고 곧바로 반납했습니다. 그만큼 그곳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세까지 이탈리아화 되어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문명화 되어있던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드리아해의 꽃이라 불리는 남단 두브로브니크를 막상 가서 보면 예상보다 큰 위용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그 지역은 남슬라브인이 주축인 공산권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있다가 독립해 오늘날 크로아티아가 되었습니다. 달마티안 무늬를 떠올리게 하는 격자무늬의 국기를 가진 나라입니다.


고대 로마의 포룸과 파도가 연주하는 바다 오르간으로 유명한 도시 자다르를 출발한 버스는 남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스플리트입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부터 남단 두브로브니크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중간에 위치한 그 나라 제2의 도시입니다. 길은 서쪽에 아드리아해를 끼고 계속 남으로 달려가니 서울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고속도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거대한 알프스 산맥의 줄기인 디나르알프스의 긴 터널을 통과한 순간 제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자연의 풍광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스베티 록이라 불리는 터널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산야가 푸른 초목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빠져나오니 온통 거친 바위산과 듬성한 초목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빛깔은 더 파랗게 바뀌었고 태양은 더 뜨거워 보였습니다.


그 산과 터널을 경계로 대륙성 기후에서 지중해양성 기후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백두대간인 태백산맥을 넘을 때 동서 간 차이는 있지만 과연 알프스라서인가 남북으로 꽤나 큰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대관령 위에서 강릉 동해 바닷가가 저 멀리 보이듯 눈 아래로 파란 아드리아 바다와 도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정한 달마티아의 도시 스플리트에 도착한 것입니다.   


정확히 이런 모습, 스플리트의 하늘과 태양과 바다와 집


스플리트(Split)는 영문 도시 이름과는 달리 과거와 현재, 구도시와 신도시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구도시는 바닷가에 바로 붙은 로마 시대의 유적지에 위치해있는데, 그 유적지라는 것이 통상 유럽의 도시들은 성인데 반해 스플리트는 황제의 궁전입니다. 수도나 지방의 대도시도 아니었는데 황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시가 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황궁 안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 황궁의 주인이자 이 도시의 터줏대감은 로마 제국의 43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244~312)입니다. 그는 이곳 달마티아 스플리트 근처 하층민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출세하여 혼돈과 격랑의 군인황제 시대를 끝내고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284~305). 그런 그가 은퇴 후 살기 좋은 그의 고향인 스플리트에 와서 위세에 맞게 거대한 궁전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 궁전이 오늘날까지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궁전 안에 도시가 먼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이상한 점이 발견이 됩니다. 바로 은퇴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은퇴라니요? 제정 황제는 죽어야 비로소 그의 임기가 끝나는 것인데 황제가 무슨 운동선수나 연예인도 아니고 은퇴를 했다니요? 맞습니다. 그는 위의 생사 연도와 재위 기간에서 보듯 생전에 퇴위를 하였습니다. 로마 역사상 유일한 생전 퇴위 황제입니다.   

 

황궁은 재미있고 이채롭기까지 합니다. 통상 그 정도의 유적지면 도시는 그곳을 보존 지역으로 정하고 사람 출입을 관리하는데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궁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궁 안에 상인이 영업을 하는 것은 물론 일반 사람이 그곳에 거주까지 하는 가옥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복궁 안에 상가가 즐비하고 주택도 있는 것입니다. 양보해서 장사를 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사람이 거주까지 하는 것은 매우 낯설어 보였습니다. 제가 궁터 외벽에서 올려 본 어떤 2층의 왼편엔 로마의 고색창연한 창틀이 있는데 그 옆엔 현대의 컬러 새시 안에 유리도 껴있고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치워진 커튼 밖으로 예쁜 화병이 놓여있는 창이었습니다. 


그 궁은 과거 디오클레티아누스 생전엔 엄격한 관리 하에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시종들만 살았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시민과 관광객이 들어와 들끓고 거주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퇴위하면서 300명의 시종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은퇴 생활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곳이 바로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궁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과 현대의 주택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직 시 4두정치를 실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그로부터 300여 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과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시절 두 차례 실시되었던 3두정치와 대별되는 것으로 그때엔 3명의 실력자가 나라를 다스렸다면 4두정치는 4명의 실력자가 로마의 영토를 4등분하여 분할 통치한 것입니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져 단일 군사 체제로는 모든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를 크게 동서로 구분하고 그곳을 다시 둘로 나누어 동방 지역은 동방정제와 동방부제가, 서방 지역은 서방정제와 서방부제가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마치 학교의 한 학급에 반장과 부반장이 역할을 나눠 담당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 자신은 동방정제로 이탈리아 반도가 아닌 동쪽 오리엔트 지역과 아나톨리아라 불린 오늘날 튀르키예와 이집트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의 고향이자 후에 은퇴지가 된 달마티아가 속한 일리리아 지역은 동방부제가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군사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고 내정과 외교는 정통 황제인 그가 담당하였습니다. 그것도 이전 황제보다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동방정제이면서 4명의 정제와 부제 위에 있는 선임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국을 4개로 쪼개어 군사를 담당하게 한 4두정치는 그의 퇴위 후 그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주게 됩니다.

    

동양의 황제와도 같이 강력했던 그의 통치를 가리켜 전제정인 도미나투스(Dominatus)라 불립니다. 이전 로마의 황제는 죽으면 신으로 추앙받았는데 살아있을 때에도 신성화를 꾀할 정도로 그는 절대 권력의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의 권력을 줄이고 입법, 행정, 사법 등의 3권을 모두 장악해 다방면에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후기 로마 제국 통치의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로마의 전기에 존엄한 자라 불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면 후기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다고  정도로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스플리트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두상 (출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그의 다음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공인하고(313) 오늘날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천도하게(330) 되는데,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든 제도를 거의 승계하였습니다. 이렇듯 이후 476년 게르만족들의 남하에 속절없이 멸망한 서로마와는 달리 그보다 1,000년을 더 장수한 동로마의 기틀을 그가 확립한 것입니다.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때까지 건재했으니까요. 4두정치 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의 수도가 있던 이탈리아 반도가 아닌 동방 지역을 담당하는 동방정제를 맡은 것을 보면 로마의 무게 추는 이미 그의 시대부터 동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나 봅니다.     



* 2편에서는 행복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겪은 비극과 생전 퇴위에 대해 더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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