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Oct 27. 2022

스플리트의 비극, 디오클레티아누스 - 2

그렇게 역동적으로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난데없이 은퇴를 선언하고 퇴위를 하였습니다(305). 61세의 나이지만 딱히 큰 병이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로마 역사상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일입니다. 이후엔 혹시 있더라도 누군가 그는 아래에 소개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비극을 떠올리며 생전 퇴위 생각을 접었을지도 모릅니다.


고향 스플리트에 돌아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간 꿈꾸어온 대로 농사를 지으며 행복한 은퇴자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일전에 카드사 광고에 나온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카피처럼 이후 천년을 더 갈 후기 로마제국의 제도를 수립하고 기틀을 마련해놨으니 편하게 후회 없이 왕좌에서 떠났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본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하층민이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사람들은 귀소본능으로 인해 본래 그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파 하니까요.


이렇게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그가 건축주로 설계하고 감리한 스플리트의 궁전에서 농사를 지으며 7년을 더 살고 죽었습니다. 야인이라지만 상왕으로 주요 정치 사안에 대해 고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깁니다. 서방 지역에 살던 딸 발레리아와 그녀를 만나러 간 그의 아내 프리스카가 그곳의 실력자인 다이아에게 정치적인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금당한 것입니다. 정략결혼을 시도했던 그에게 결혼을 거절한 결과였습니다. 그래도 바로 직전 황제의 아내와 딸인 왕비와 공주가 그런 험한 짓을 당하다니요? 그것도 그 황제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당연히 이것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은퇴했기에 그의 말발이 안 먹힌 것입니다. 결국 모녀는 옥에서는 풀려났지만 황제가 사는 스플리트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동방 지역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내부 페리스틸 광장, 오른편은 레스토랑, 왼편은 기독교 박해자였던 황제의 영묘 자리에 세워진 성 돔니우스 대성당


모녀의 비극은 그가 퇴위 후 4두정치로 나뉜 땅에서 일어난 후임자들의 권력 투쟁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막강했던 생전에 퇴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가 밀어붙였던 4두정치를 실시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인가 그의 후임자인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그의 정책을 거의 모두 승계했지만 4두정치는 폐지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군사 권력을 나누었던 서방부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그는 2차 4두정치의 혼란기 권력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임 황제에 오른 것입니다. 그는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권력 싸움을 직접 경험하였기에 이후 그것의 재연을 막고자 4두정치를 폐지하였을 것입니다. 모녀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격으로 그 싸움에서 희생된 것입니다.


이빨 빠진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의 아내와 딸의 비극에 통분하며 퇴위를 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가 꿈꾸던 은퇴 후의 생활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제정인 도미나투스 실시로 역대 로마 황제 중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렇게 권력을 놓는 순간 그와 가장 가까운 처자조차도 보호하지 못하는 범부가 되었습니다. 아마 당시 그가 보았을 궁전의 거울 속엔 그곳 출신의 초라한 하층민 노인의 모습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녀의 재산 몰수와 감금, 그리고 추방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녀는 결국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들을 추방한 다이아를 제거한 리키니우스에게 의탁하려 가다가 오히려 그가 보낸 군사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복수를 해주었다고 생각한 그가 그들 편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312년 그가 사망한 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만약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살아있었다면 모녀는 스플리트의 그에게 갔겠지요. 17세기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이 역사적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비극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이렇게 4세기 초 로마에서 실제 일어났습니다. 왠지 그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슬픈 리어왕의 모습이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겹쳐집니다. 그의 아내와 딸은 죽어가며 남편과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과거 황제를 알현했던 공간. 돔 지붕이 날아가 더 이채로운 건축물로 남음


지난 9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의 나이로 사망을 하였습니다. 1952년에 재위하였으니 영연방 군주로서는 가장 긴 70년 재위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녀 전엔 그녀의 고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64년 재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 생전엔 그녀가 고령화될수록 그녀의 생전 퇴위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돌곤 하였습니다. 고령화로 인한 건강 문제로 업무 수행능력의 쇠퇴도 문제지만 그녀의 후계자인 찰스 왕세자가 1948년 생이므로 그도 이미 이미 할아버지의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론엔 왕세자의 인기 여부와 상관없이 영국 국민의 동정심과 측은지심도 발동했을 것입니다. 같은 값이면 대외적으로 젊고 힘 있는 새 왕을 바라는 열망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여왕도 이런 여론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아마 왕관을 내려놓을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70년 재위에 가까워질수록 영육의 피곤함과 피로함이 더 커져서도 그럴 수 있겠지만 그녀 생각에도 후임인 찰스 왕세자가 너무 늙어서 왕위에 오르는 것도, 그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은 것도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 않아서도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엔 사적으로 후대 왕이 그녀의 아들이니 곱고 밉고를 떠나 엄마 마음에서도 퇴위를 고민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가야만 하는 권력의 속성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그녀도 인간이기에 여왕 신분으로 살아온 것처럼 죽을 때도 여왕 신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대 여러 국가의 지나간 역사에서 보듯,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도 보듯이 권력은 내려놓는 순간 끝이니까요. 물론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제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생전 퇴위를 논하며 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비극을 빗대는 것은 시대적인 상황도 그렇고 많은 부분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70년 간 변함없이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그녀답게 원칙대로 영면에 들기 직전까지 종신직인 영연방 여왕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생전 퇴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원칙이 아니고 영국 왕실의 역사에 이례적인 일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논란을 불식시키려는지 여왕은 96세의 나이로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도 그녀의 중요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죽기 불과 2일 전인 지난 9월 6일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집권 보수당의 트러스 신임 당 대표의 예방을 받고 그녀를 영국의 신임 총리로 임명하였으니까요. 그녀들이 만나서 악수하는 사진만 보면 여왕이 이틀 후 죽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꼿꼿하고 화사했습니다. 저는 여왕의 죽음 전후로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망 2일 전 신임 트러스 총리의 예방 업무를 수행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예기치 않게 트러스 총리는 취임 44일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총리는 종신직이 아니기에 생전 퇴위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경제를 일으켜야 할 그녀가 경제를 더 혼란스럽게 해 강제성 퇴위를 당한 것입니다. 잉크도 마르기 전이란 말이 적절할 정도로 그녀는 불과 44일 차이로 임명장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받았고 사표는 그녀의 아들인 찰스 3세 국왕에게 제출하였습니다. 만약 여왕이 아직 살아있어 사표 수리를 했다면 그녀는 매우 씁쓸했을 것입니다. 영국 역사상 군주 중 가장 긴 재위 기간을 기록한 그녀가 영국 역사상 총리 중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기록한 그녀를 임명한 것이었으니까요.         


2013년 2월엔 로마 바티칸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터졌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건강을 문제로 생전 퇴위를 발표한 것입니다. 늘 종신직인 교황이 선종 후 엄숙한 상가의 분위기에서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봐온 세계인들에게 이 뉴스는 일반인은 물론 카톨릭 신자조차도 머리를 갸우뚱거렸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2천여 년 266대 교황들 중 생전에 퇴위한 교황은 그 이전에 2명밖에 없었고, 마지막 퇴위도 600여 년 전이라 사람들은 교황도 퇴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으니까요. 그만큼 종신직인 국가의 군주나 조직의 수장이 살아생전에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 현재 교황인 프란체스코 2세도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건강상의 문제로 생전 퇴위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바티칸에 살고 있는 선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공식 칭호는 명예 교황입니다.


이렇게 흔치 않은 생전 퇴위가 우리 조선시대 초기엔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건국 후 3왕인 태조, 정종, 태종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속으로 생전에 퇴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차적으로 상왕, 또는 태상왕으로 물러나 앉았습니다. 함흥차사가 넘칠 정도로 태조 이성계는 아들인 태종 이방원과 사이가 심하게 틀어졌으니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처럼 생전 퇴위를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2대 왕 정종은 동생 이방원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후회고 자시고 할 게 없었겠지요. 3대 왕 태종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생전에 퇴위하여 아들인 세종에게 왕을 물려주고 4년을 더 살다 갔습니다.


하지만 세종부터는 생전 퇴위가 사라집니다. 있다 해도 이후엔 죽기 바로 전인 하루 이틀만 상왕으로 불린 왕들이 몇 있었으니까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왕조 후기 끝에 가서 다시 생전 퇴위가 나타나는데 그들의 퇴위는 전기와는 달리 왕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망국의 왕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해 1907년부터 12년 간은 허울뿐인 인생을 살다 갔습니다. 역시 그의 아들로 이씨 왕가 마지막 왕인 순종도 1910년 한일합병까지 3년만 재위하고 퇴위를 하였는데 나라도 함께 퇴장했으니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겠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안에서 바라본 스플리트 항구 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궁전을 걸으며 저는 이렇게 그의 생전 퇴위와 관련한 권력의 무상함과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꼬리를 물어 바티칸도 가고, 바다 건너 영국도 들르고, 우리 역사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윽고 저는 황제의 궁전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 눈앞엔 입궁 땐 뒤로 있어 제대로 못 본 파란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선글라스를 꺼냈습니다. 한 여름은 아니었지만 내려 쬐는 태양 빛이 바다에 잠기지 않고 반사된 빛까지 더해 눈이 부셔 앞을 보기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만큼 스플리트가 뿌려대는 빛은 강렬했습니다.     


황제가 궁전을 건립할 시에는 궁전 남문에 작은 선착장이 있어서 배에서 내리면 바로 궁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북부의 베네치아처럼 말입니다. 과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내와 딸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을 때 혹시나 하며 궁전 끝 아래 사진의 그곳까지 나와 그날 제가 바라보던 바다보다 더 멀리 수평선 끝까지 바라보며 그의 아내와 딸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바다였던 지금 궁전 앞 그 자리는 땅을 매립하여 차가 다닐 수 있게 큰 도로를 내고 큰 배도 들어올 수 있게 정상적인 부두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날 부두엔 커다란 크루즈가 정박해있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2022년 9월 아드리아해 연안 스플리트의 정경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앞 리바 거리에 세워진 과거 궁전의 이미지 보드


작가의 이전글 스플리트의 비극, 디오클레티아누스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