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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05. 2022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by 이건희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_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7년 11월 런던의 국립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20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영국은 두 번을 방문했지만 모두 런던만 가보았기에 제 생애 최소 한 번은 더 가고 싶은 나라입니다. 그땐 런던이 속한 잉글랜드의 북쪽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바다 건너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그리고 서쪽 웨일스의 카디프까지 주욱 돌아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완전체 영국(UK)을 다녀왔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는 김에 북아일랜드에 갔을 때 남쪽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도 들르는 편이 낫겠습니다. 독립적으로도 가고픈 국가와 도시인데 영국 여행길에 자연스레 순환 동선이 나오니 굳이 안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영국 여행 맵이 완성되었습니다.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버킷에 담아 놓겠습니다.


사실 첫 번째 런던 국립미술관 방문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래되기도 했거니와 당시 업무로 간 출장에서 시간을 쪼개 급하게 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저의 눈엔 미술관보다는 이어서 간 대영박물관의 임팩트가 훨씬 컸습니다. 특히 미라를 비롯한 이집트의 거대한 관들이 저의 눈을 잡아끌었습니다. 초딩 입맛이라고 아이와 같은 놀라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5년 전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박물관보다 미술관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 티를 좀 벗은 것일까요? 그 미술관에서 전 보티첼리, 카라바조, 루벤스, 램브란트, 고흐, 모네, 클림트 등의 진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부가적으로 저를 또 행복하게 한 것은 그 볼 것 많은 미술관이든 박물관이 다 무료로 개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국민들뿐만 아니라 영국을 방문한 전 세계 시민들에게 말입니다. 과거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세계를 섭렵한 1호 선진국의 문화와 예술을 대하는 애티튜드가 반영된 정책일 것입니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 / <퐁투아즈 곡물 시장>, 1893, 46.5×39cm


올 가을 우리나라 미술계가 시끄럽습니다. 소음처럼 기분 나쁜 시끄러움이 아닌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서울에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이중섭의 작품들이, 과천에선 특정 시대 파리에서 활동했던 8인의 화가 작품들이 올 가을부터 내년 봄까지 전시 중에 있습니다. 국내외 최고 아티스트들의 전시회가 세칭 동시패션으로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코로나가 거의 풀린 요즘 미술 애호가들은 서울에서 과천으로, 과천에서 서울로 바쁜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가을입니다.


미술 애호가들이 더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두 전시회가 다 무료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5년 전 영국 국립미술관에서 느꼈던 그 무료의 감회를 소환한 이유입니다. 기업만큼이나 예술을 사랑했던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이기에 이런 무료 전시회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의 유족은 그의 이름으로 평생 그가 수집한 무려 2만 3천여 점의 미술품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조건 없이 기증을 하였습니다. 경제 선진국만큼이나 그 수준에 걸맞은 예술과 문화 선진국도 꿈꾸었던 그가 죽음에 맞춘 사후 6개월 뒤 그 소장품들을 국가에 기증했고, 그로 인해 그 혜택을 국민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서 미국의 석유 재벌 폴 게티가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클로드 모네(1840~1926) /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100×200.5cm


저는 과천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검색해보니 서울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은 워낙 붐벼 사전 예약 없이는 관람이 불가하다 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Monet, Picasso, and the Masters of the Belle Epoque)>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과천 미술관의 전시가 제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터라 잘됐다 싶어 그쪽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주중 점심을 먹다가 오후 스케줄이 취소되어 무작정 감행한 미술관행이었습니다. 길진 않지만 좋은 날씨엔 드라이브하기에도 좋은 과천의 미술관 길입니다. 예상대로 미술관 올라가는 숲 속 굽은 길을 지날 때 짧지만 한갓진 가을 정경이 창을 내린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번개성 미술관행이지만 참 잘 결정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도착 즈음 놀랄 정도로 긴 차량 줄이 제 앞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최소 60분을 기다려야 미술관 주차장에 입차 할 수 있다는 안내판이 근처 서울랜드의 놀이 기구 앞 안내판처럼 눈에 보였습니다. 역시나 만만치 않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었습니다. 기다리기도 그렇고, 그냥은 더 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한 저는 차를 돌려 오다가 본 서울랜드의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다소 거리가 있긴 했지만 거기서부터 걸어서 와도 60분의 절반도 안 걸리는 데다가 워낙 가을이 좋아서도 아무 문제없는 결정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1917~1918, 46.5×57cm


평일임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기에 미술관에선 현장 예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1시간 30분 후에 입장하는 시간을 배정받았습니다. 그 남은 시간에 미술관에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관련 전시도 있어서 전 그것을 감상하고,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도 마셨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보너스와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백남준 전시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에 미술관 내에 1,003개의 TV 모니터를 쌓아 만든 <다다익선>의 복원을 기념하는 후배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오마주 성 협연 전시였습니다. 그간 불이 꺼져있던 백남준의 그 많은 TV 타워 속 모니터 안 영상 작품들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엔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꺼져 있어 좀 아쉬웠습니다. 그 전시는 이 정도로만 소개하겠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전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열리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유럽 파리의 시대로 입장한 것입니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에서 전시된 파리 벨 에포크의 주역은 8인의 아티스트입니다. 피카소와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고갱, 샤갈, 르누아르, 미로, 달리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작품이 하나씩 전시되었지만 피카소의 작품은 회화가 아닌 도자 작품 90점이 전시되었습니다. 수량으로 보아 피카소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많은 도자 작품을 제작했나 봅니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은 개인 컬렉터치곤 꽤나 많이 그의 도자 작품을 소장했었네요. 피카소는 1946년부터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도자기 도시인 발로리스의 마두라 공방에서 30여 년간 도자기 작업을 하였습니다. 과연 회화, 조각, 도예, 판화 등 미술 분야에서 그의 손이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만능 천재인 그였습니다. 12세 때 이미 라파엘로와 같이 그릴 수 있었다고 한 그니까요. 영국의 라파엘전파의 화가들도 지목했던 르네상스의 대가를 피카소는 그 어린 나이에 소환했습니다.


폴 고갱(1848~1903) / <센강변의 크레인>, 1875, 77.2×119.8cm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회는 크게 사조로 보면 19세기 후반 인상파 계열인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그리고 20세기 주류 현대미술인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로 나뉩니다. 먼저 인상파로는 피사로, 르누아르, 모네의 작품이, 그리고 그것을 이은 후기 인상파의 고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대미술로는 입체파의 대가 피카소가, 그리고 그것을 이은 달리, 미로, 샤갈의 초현실주의 작품이 전시 중에 있습니다. 모두가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인상파는 오늘날 미국령이 된 버진아일랜드 출신인 피사로를 제외하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등의 프랑스 출신의 화가들이, 현대미술은 오늘날 벨라루스가 된 과거 제정 러시아 출신인 샤갈을 제외하곤 피카소, 달리, 미로 등의 스페인 출신 화가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품의 시대적 사조와, 작가의 출신 국가가 대별되는 점도 이번 전시회를 흥미롭게 보는 부가 요소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벨 에코 시대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혹은 동료로 만나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며 20세기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주도하였습니다. 과연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피사로는 고갱의 스승이었습니다. 증권 중개인이었던 그는 피사로가 참여한 미술전을 보고 화가로 전업을 꿈꾸었고, 피사로는 그런 그의 꿈을 현실이 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야외에 같이 나가서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절친이었습니다. 결혼을 7번이나 한 피카소는 여인의 화가 르누아르를 존경하였는데 그 역시 많은 여인을 작품화한지라 르누아르의 작품 속 여인을 유심히 보았을 것입니다. 미로와 달리는 파리에 와서 먼저 명성을 얻은 피카소를 맏형으로 모시며 선후배의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 미로와 달리는 카탈루냐 출신이었는데 다들 피가 뜨거운 스페니쉬들이라 서로를 꽤나 아끼고 도왔을 것입니다. 샤갈은 흠모하던 피카소를 파리에서는 못 만났지만 뒤늦게 프로방스의 도자기 공방에서 만나 감격에 겨워했습니다. 마치 같은 비엔나에 살면서 베토벤을 흠모했으나 못 만나다가 그가 죽기 1주일 전 극적으로 만난 슈베르트처럼 그들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이랬던 8인이라 이번 전시회는 각 작가들의 작품을 원형으로 조성된 갤러리 안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서로의 관계성을 읽기 쉽게 동선을 꾸렸습니다. (전시회 가이드북 참고 인용)


파블로 피카소(1881~1973) / 도자 작품들, 1946~


그랬던 그들이 파리를 떠납니다. 마치 옥타곤이라 불리는 클럽의 멤버들처럼 끈끈하게 얽히고설킨 그들 8인이었지만 파리는 그들을 평생 같이 있게 붙잡지 못했습니다. 파리가 그들의 젊은 시절엔 한창 정력적으로 활동하기엔 좋았는지 모르지만, 파리에서 각자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발견한 그들은 그것에 맞는 곳으로 뿔뿔이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지나간 추억의 순간들이 되었습니다. 벨 에포크가 끝난 것입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 이들 중 유일하게 피사로는 끝까지 파리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그는 1903년 죽었으므로 대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향이 서인도 제도의 버진아일랜드라 귀향도 마땅치 않아 파리에서 계속 체류했을지도 모릅니다.


피카소는 말년을 온전히 남쪽 프로방스 지방에서 보냈습니다. 아마도 고향인 안달루시아의 해안 도시 말라가를 닮은 곳을 찾아 지중해 연안으로 내려갔나 봅니다. 그는 도자기를 구었던 발로리스 이외에 그 근처 앙티브에도 살았고 죽음은 무쟁에서 맞이하였습니다. 극우 독재자인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다스리던 때라 공산주의자였던 그가 귀국해서 살기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그였지만 프로방스에서도 도시를 옮겨가며 여러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가 파리에서 동생이자 친구처럼 보살펴줬던 미로와 달리는 모두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달리는 고향인 카탈루냐의 피게레스로, 미로는 마요르카 섬의 팔마로 갔습니다. 현대 미술계를 쥐락펴락한 스페인 3인방의 파리 퇴장입니다.


마르크 샤갈(1887~1985) / <결혼 꽃다발>, 1977~1978, 91.5×72.8cm


인상파의 대가 모네는 모네 하면 같이 붙어 다니는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로 이주해 그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43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의 걸작인 연작 <수련>이 자라던 정원이 있는 곳입니다. 르누아르도 말년엔 남쪽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해안 도시 카뉴쉬르메르로 이주해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샤갈도 역시 프로방스의 그림처럼 예쁜 성곽 도시인 생폴드방스에 가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당시는 소련이란 이름으로 공산화된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기엔 마땅치 않은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도시는 이방인인 그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사후 성 안에 그의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갱은 파리를 떠나는 것이 아닌, 아예 문명을 떠나 남태평양 타이티로 갔고 죽음은 히바오아에서 맞이하였습니다. 둘 다 폴리네시아의 프랑스령 섬입니다. 그는 가는 길에 아를을 들러 고흐와 잠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멤버는 아니지만 고흐 역시 그 시대 파리에서 활동하다가 프로방스의 아를로 내려간 케이스입니다.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토박이 화가 세잔도 파리로 와 활동하다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보낸 위의 예술가들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장수했다는 것입니다. 샤갈 98세, 피카소 92세, 미로 90세, 모네 86세, 달리 85세, 르누아르 78세, 피사로 73세, 고갱 55세, 그들의 사망 나이입니다. 달리를 제외하고 모두 19세기에 태어난 작가들인 것을 보면 다소 놀랍기도 합니다. 그들 중 가장 단명한 고갱도 55년의 생을 살았는데 이것도 파리 옆동네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생에 비하면 장수한 측에 들어갈 것입니다. 미술가가 음악가에 비해 업의 특성상 팔자가 좋아서 그런 것일까요? 주로 태양이 내려쬐는 야외에서 느긋하게 풍경을 그리는 미술가와 어두운 실내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작곡과 연주에 몰두하는 음악가의 수명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호안 미로(1893~1983) / <회화>, 1953, 96×376cm


더구나 야외도 그냥 야외가 아닌 풍광 좋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또는 아름다운 시골에서 말년을 보냈기에 이들 미술가의 생활이 건강에 더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장수 기록은 이례적입니다. 아마도 파리에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보냈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끝까지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단체로 오래 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파리의 물랑루즈를 비롯한 밤업소에서 오랫동안 지내며 그림을 그린 로트렉의 경우 37세로 단명했으니까요. 물론 그는 선천성 질환을 앓아서도 단명을 하였습니다. 고갱의 경우는 아예 문명과 격리되어서도 장수 그룹에서 좀 멀어졌을 것입니다. 이들 중 그다음 단명자인 피사로도 1903년에 사망했으니 그 시절 73세라면 그도 장수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에겐 파리에서의 보낸 순간이 더욱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퇴자가 사무실에서 방을 빼듯 파리에서 방을 뺀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생활을 했던 말년기에 왁자지껄하게 화동들과 어울리며 젊음을 불태웠던 파리의 그 시절은 다시 돌아가고픈 추억 그 자체였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대체로 과거는 아름다운 법인데 누가 뭐래도 그 시절 파리는 독보적인 세계 제1의 예술 도시였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인인 우리도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 그렇게 느끼며 추억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말로 흔히 봄날이라고 부르는 그 시절이 그들에겐 파리에서 보낸 벨 에포크였을 것입니다.       


살바도르 달리(1904~1989) / <켄타우로스 가족>, 1940, 35×30.5


전시회장을 나오며 일전에 읽었던 고 이건희 회장의 미술 관련 언론 기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기업의 회장 재직 시절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과외공부를 받았습니다. 가정교사는 이호재 가나아트 대표였습니다. 그는 매주 한 번씩 일과 후인 저녁 8시부터 미술품 시장과 작품에 대해 교습을 하였는데 이 회장의 학습 열의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평균 3~4 시간인 수업이 새벽 4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니까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수업으로 모자라 두 번을 불려 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회장은 그림과 도자기에 이어 조각품인 불상까지 전문가 뺨치게 마스터했습니다. 그때 이 회장이 가장 애착을 보인 것은 해외로 반출된 우리의 미술품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것에는 얼마가 들든 비용을 아끼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국내의 다른 매입자와 경합을 할 경우 그 작품은 꼭 사지 않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소장하는 것보다 우리 것을 우리 땅으로 찾아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미술 시장에서 사익으로만 움직이는 일반 컬렉터가 아닌 국가와 공익까지 생각한 슈퍼 컬렉터임을 보여주는 일화일 것입니다. (중앙일보, 2021. 6. 3 기사 참조)


위의 기사에서 화랑 대표는 이건희 회장의 도자기에 대한 안목을 박사급으로 평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피카소의 도자 작품을 그렇게나 많이 소장했는지를 알게 해 준 대목입니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과 서울의 <이중섭> 전시회는 이런 그의 미술에 대한 열의와 이해의 결실이라 하겠습니다. 수확의 계절에 만난 행복한 결실입니다. 그가 국가에 기증한 2만 3천여 점의 작품들은 하루에 한 개씩 수집한다 해도 63년이나 걸리는 장구한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5년 후인 2027년 서울시 송현동, 그의 모든 미술품이 전시될 '이건희 미술관(기증관)'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사뭇 궁금합니다.  



보너스 : 백남준 아카이브 & 과천 현대미술관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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