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의 프리퀄, 세키가하라 전투 <상>

사쓰마 & 조슈

by 마하

가고시마와 시마즈 가문


2023년 2월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는 멀었습니다. 팬데믹의 잔존 세력이 아직 남아있는지라 인천 공항에서 그곳까지 직접 가던 비행기가 여전히 멈춰 서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저를 비롯한 일행은 가고시마의 북쪽 규슈의 관문인 후쿠오카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비행시간보다 훨씬 긴 3시간 30분 동안 300여 km를 남진을 한 결과 일본 본토의 남쪽 끝 바다가 보이는 가고시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센간엔(仙巖園), 이곳은 과거 가고시마의 다이묘가 살았던 별채로 푸른 바다가 연못처럼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고택이었습니다. 바다가 연못처럼 보이는 것은 정면에 화산섬인 사쿠라지마가 집앞 동산처럼 솟아있기에 그것이 가고시마 만의 바다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습니다. 그 화산섬은 그날도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가고시마의 센간엔 정원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 화산섬과 가고시마 만 바다


가고시마 현은 과거 메이지 유신 이전 사쓰마 번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당시 그곳은 우리 일행이 도착한 센간엔의 주인이자 그 번의 다이묘였던 시마즈 집안이 다스렸습니다. 사쓰마 번은 이후 시대가 바뀌어 가고시마 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곳의 맹주였던 시마즈 가문은 그때는 물론 그 이전부터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변함없이 가고시마의 유력 가문으로 존재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날도 시마즈란 이름을 가진 그 집안의 대표자가 나와 우리를 반갑게 환영하고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들 중 적통 후손은 그땐 그 지역의 왕 같은 다이묘였다면 지금은 우리가 방문한 센간엔 같은 그 집안의 유산과 여러 가업을 운영하는 회장 정도의 직함을 가지고 이곳의 유지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센간엔이 있는 도시 가고시마는 현청이 소재한 가고시마 현의 중심지입니다. 우리 일행은 이곳이 일본 메이지 유신의 고향이라 불리는 곳이기에 답사차 그곳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시마즈란 이름은 우리 역사와도 상관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시 여러 전투에 출정했는데 특히 우리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적장으로 존재감 있게 등장했습니다. 그 전투는 왜군이 재침한 정유재란의 막판인 1598년에 일어났습니다. 그 왜인들과의 전쟁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한 노량해전에 당시 사쓰마 번의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적장으로 참전한 것입니다. 김한빈 영화감독의 이순신 장군 시리즈인 <명량>과 <한산>에 왜군의 적장으로 지금까지는 와키자카가 등장했다면 그 시리즈 마지막 편인 <노량>엔 틀림없이 이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할 것입니다.


당시 일본 수군을 이끌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 전쟁의 발발자이자 총지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 인해 1598년 귀환길에 오르다 이순신 장군과 결전을 치른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이순신 장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우리는 그 해전에서 그 영웅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치른 그 많은 전투 중 전쟁의 마지만 전투에서 죽었기에 지금도 뒷말이 무성한 노량해전이었습니다. 이때 왜장인 시마즈 요시히로는 기함을 벗어나 배를 갈아타는 둥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인 사쓰마 번으로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과거 가고시마가 사쓰마 시절 번주인 시마즈 가문이 살았던 센간엔의 고택



일본 근대화의 기수


이 글은 제가 일전에 5편에 걸쳐 시리즈로 기고한 <일본 근대화의 기수> 이전의 역사를 다루는 글입니다. 그 글에서 전 185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100년에 걸쳐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가 되었고, 그리고 현대화까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저 나름대로의 시각과 해석을 더해 에세이 형식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글에선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인 메이지 유신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에선 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일본 역사의 인과성에 대해, 더 가면 당위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부득이 1868년 일어난 메이지 유신과 만나는 시점의 역사에 대해선 반복되는 내용들도 있을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엔 당시 최고 권력기구였던 막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이룬 일본의 선각자 그룹과 함께 항상 그들의 출신지가 따라다닙니다. 바로 이 글 서두에 등장한 오늘날 규슈의 끝 가고시마 현인 사쓰마 번, 그리고 지난 <일본 근대화의 기수> 글에서 주로 다루었던 오늘날 혼슈의 끝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이 그 지역입니다. 이 두 번이 메이지 유신의 주도 지역으로 이 지역의 인물들이 1868년 유신 이전 10여 년 전부터 1889년 일본제국헌법이 공포되어 메이지 유신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그리고 그 이후 대동아공영이라는 기치 하에 2차 세계대전 패망까지도 100여 년간 격변기 일본의 주도 세력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선봉인 조슈 번엔 오늘날에도 일본 보수의 혼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다카스기 신사쿠와 기도 다카요시가 있었고, 사쓰마 번엔 위의 시마즈 가문의 가신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개성 강한 강성의 두 지역과 인물들을 연결해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오늘날 시코쿠의 고치 현인 도사 번 출신의 전혀 의외의 인물 사카모토 료마도 있었습니다. 이 5인이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한 1867년 존왕양이와 대정봉환의 일등공신이라 할 것입니다.


존왕양이(尊王讓夷)는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것이고 대정봉환(大政奉還)은 막부의 쇼군이 가진 권력을 본래 주인인 천황에게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한 삿초동맹은 이 두 이슈를 해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런 기여를 했음에도 그의 출신지인 도사 번의 인사들이 메이지 정부에서 조슈와 사쓰마 대비 수혜를 못 본 것은 그가 유신 직전에 사망한 것과 도사 번이 메이지 유신을 만들 만큼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1867년 12월 자객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해 11월 대정봉환이 되었으니 그가 꿈꾸던 1차 목적은 달성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 이전 5월엔 조슈의 영웅 다카스기 신사쿠가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격랑의 시기 그는 그가 창설한 일본 최초의 사무라이 계급을 무시한 평등한 군대를 지휘해 중앙 막부군과 싸워 두 번이나 승리했습니다. 2차에 걸친 조슈 정벌(1864, 1866)이 그 전투입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은 이 둘이 빠진 채 유신3걸이라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만약 사카모토 료마와 다카스기 신사쿠가 좀 더 살았다면 이들까지 포함하여 유신5걸이라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유신3걸도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 그가 고향인 사쓰마 번에서 일으킨 세이난 전쟁 시 할복 자결로, 기도 다카요시는 그 해 지병으로, 그리고 세이난 전쟁을 진압한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듬 해인 1878년 암살로 사망했습니다. 유신이라는 쌀을 씻고, 밥을 짓다가 정작 먹지는 못하고 유신 10년 안에 유신 핵심 인사들이 모두 죽은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초기는 혁명의 동지였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출신 인사들의 연합정부 형태였는데 유신3걸 중 마지막 생존자인 오쿠보 도시미치 이후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 번 출신의 인사들이 대거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사쓰마 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조슈 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를 총애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이 두 지역은 왜 그렇게 막부에 반감을 가지고 타도에 앞장서서 메이지 유신을 향해 돌진 앞으로를 했을까요? 일본엔 오늘날에도 43개의 지방 현이 있는데 이보다 더 숫자가 많았던 과거 봉건주주의 번 시스템에서 유독 이 두 번만 왜 그렇게 중앙 정부인 막부를 타도하는데 앞장섰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사건이 그 이전에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사에 아니 땐 불에 연기는 날 수 없고 역사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니까요. 이제부터 시계는 1868년 메이지 유신부터 뒤로 268년 전인 1600년으로 돌아갑니다.


메이지 유신의 개혁가들을 길러내고 삿초동맹을 성사시킨 트리오 번



임진왜란 후 일본


노량해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의 영지인 사쓰만 번으로 돌아왔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7년 간의 전쟁 끝에 1598년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때 일본은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국 시대를 평정하고 일본을 통일한 지도자가 순전히 그의 뜻으로 일으킨 다른 나라와의 전쟁 중에 죽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50이 넘어 뒤늦게 아들을 얻은지라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나이는 불과 5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정은 둘로 갈라졌는데 한쪽은 히데요시를 따르는 다이묘들로 그의 아들 히데요리 편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문치파라 부릅니다.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꿈꾸었던 히데요시 곁에서 핵심 참모 역할을 했던 지략가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들의 리더였습니다. 무단파는 그런 정책에 불만을 품은 다이묘들로 이들은 서슬 퍼런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엔 표출하지 못했던 불만들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리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야흐로 두견새가 울 때만을 끈질기게 기다리던 그에게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그간 숨겨놓았던 그가 이제 발톱을 드러냅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었으니 이제 그는 그들이 쌀을 씻고, 지어놓은 밥을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천하양분지계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10월 21일, 오늘날 기후 현의 세키가하라 평원에 대군이 집합했습니다. 마치 중세 유럽 영화를 보듯 그런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기후 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서쪽 오사카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동쪽 에도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군 대장 이시다 미츠나리 편에 9만여 명, 동군 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8만여 명의 군사들이 집결해 숫자도 서로 비등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히데요시 사후 불과 2년 만에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때 과거 히데요시의 신하였던 모든 다이묘들은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이든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든 어느 한 편에 서야만 했습니다. 그 전투의 결과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달라지니 머리를 잘 굴려서 잘 서야 되는 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투는 그들 개인의 운명은 물론 17세기 당시와 이후 일본의 미래를 바꾸는 전투가 되었습니다.


에도(도쿄)와 오사카의 중간에 위치한 오늘날 기후 현의 세키가하라 (출처, 구글맵)
천하를 걸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1600)의 기록화


세키가하라 전투는 임진왜란 시 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 편이 되어 조선을 유린했던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 창끝을 겨눈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의 좌우 쌍포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 편에, 가토 기요마사는 동군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 글 위에 등장한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군 편에 섰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너무나도 싱겁게 그날 당일에 바로 결판이 났습니다. 서군인 히데요시의 유지를 받든 편에 섰던 다이묘들이 대거 배신을 해서 동군 이에야스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동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이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고의 세월 끝에 비로소 천하인이 되어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천하가 그의 품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사쓰마와 조슈의 굴욕


서군에 서서 전투에 패한 다이묘들은 당연히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처리가 복잡한 두 명의 다이묘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이 글 위에 등장한 사쓰마 번의 시마즈 요시히로였습니다. 그는 그 전투에서 역시 또 죽을 뻔했는데 부하들의 필사적으로 보호하여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노량해전에 이어 2년 후 바로 이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또 패했음에도 그는 살아난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까지 600여 년을 이어내려 간 집안답게 잘 안 죽는 목숨을 가진 시마즈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인가 그는 서군에 가담했음에도 처벌을 받지 않고 또 살아서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동군으로 가담하려 했으나 시간을 놓치고,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서군에 서게 되었다는 그의 어필이 받아들여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낙향하며 그는 심한 굴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한 명의 처치 난감한 인사는 모리 데루모토라는 다이묘였습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명목 상의 총대장으로 회사로 치면 임시 바지 사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체포 후 바로 처형을 당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질적인 총대장 역할을 했습니다. 모리는 그래서 총대장임에도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고 그 시간 오사카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에야스 입장에선 히데요시 편의 수장이었기에 사형이 마땅했으나 가신의 만류로 그 대신 다른 서군 인사를 처형하고 영지를 대폭 축소하는 조건으로 사형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혼슈 끄트머리 오늘날 야마구치 현인 조슈 번으로 쫓겨 갔습니다. 모리 가문으로선 매우 굴욕적인 처사였습니다.


이래서 조슈 번으로 간 모리 가문과 사쓰마로 돌아간 시마즈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게 구원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들은 요주의 지역으로 꼽혀 사사건건 막부의 견제와 감시, 불이익을 받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반골 기질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동군 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군 대장 이시다 미츠나리 (1560~1600)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보면 매우 얄미운 사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여러 비유는 그를 인내심이 강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그 내면엔 얄미울 정도의 사심을 안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일단 그는 임진왜란에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다이묘들이 출정하여 병력 손실을 감수하는 동안 그는 7년 간 본토에서 힘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그의 어린 아들을 걱정하여 5명의 원로 가신들에게 히데요리에게 충성 서약까지 하게 하며 그의 후사를 부탁했는데 이에야스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도 명분은 서군의 미츠나리와 똑같이 히데요리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3년 후인 1603년 그의 이름을 딴 도쿠가와 막부를 열며 과거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 이전 히데요리의 직위를 내리고 영지를 축소했던 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는 히데요리가 살아있는 꼴을 못 보았는지 1614년 히데요리가 살고 있던 오사카 성을 침공해 히데요리와 히데요시의 미망인인 그의 엄마를 자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그다음 해인 1615년 여름까지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전투를 끝내기 위해 거짓 화해를 하여 승리한 비겁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이에야스는 이미 쇼군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오고쇼라 불리는 상왕으로 있던 상태였습니다. 흡사 그 이전 조선의 태종이 아들 세종의 탄탄대로를 위해 외척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준 우리의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당시 히데요리의 부인인 센히메는 이에야스의 손녀였는데 그녀는 이후 그녀를 아끼는 이에야스의 보살핌으로 화려하게 재혼을 하고 효고 현의 아름다운 히메지 성의 안주인이 되었습니다. 즉, 그가 죽게 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의 손주 사위였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종말을 고한 오사카 전투(1614~15)의 기록화


1615년 끝난 이 오사카 전투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일본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유일한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만 힘썼다면 이후 역사는 도쿠가와 막부 대신 도요토미 막부로 흘렀을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권력욕이 있다 해도 당시 천황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었기에 그까지 제치고 천황이나 왕이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 다음 주말 <하>편에선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인 도쿠가와 가문이 막번체제에서 행한 정책과 그것에 반감을 가진 지역과 개혁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엉뚱하게도 그 반감은 막부만 무너트린 것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져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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