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인 포르투는 포르투갈을 잉태했습니다. 그 국가명이 그 도시명에서 나왔으니까요. 배보다 큰 배꼽이라 할 것입니다. 그만큼 포르투는 가장 포르투갈스러운 도시입니다. 가장 먼저 대항해 시대를 연 국가의 역사성만큼이나 고색창연한 도시의 풍광이 그 도시를 관통하는 도루 강변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강 위에 뜬 유람선에 올라탄 저는 좌우가 똑같이 아름다운 포르투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두 눈을 마냥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도루 강은 도시의 경계를 흐르는 리스본의 타구스 강과는 달리 포르투 중앙으로 흘러 도시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육안으로도 보이는 그 강 끝엔 대서양 바다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제가 탄 유람선은 그 바다 앞에서 뱃머리를 돌려 포르투 시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도루 강 하구의 항구를 뜻하는 포르투, 그 도시는 항구가 정확히 맞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선봉인 엔리케 왕자가 항구로 점철된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도루 강 주변으로 그의 생가가 보이고 바다와 가까워지는 마사렐로스 지역의 기독교 성회 성당 외벽에서도 푸른 타일로 장식된 엔리케 왕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시 이곳저곳의 박물관들을 일일이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포르투에선 어딜 가도 그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포르투의 오래된 모든 성당을 비롯하여 수도원을 개조하여 만든 아름다운 상 벤투 역사의 내외벽을 화려하게 장식한, 그리고 그 도시뿐만이 아니라 포르투갈 어디를 가도 지겨울 정도로 보이는 그 푸른 타일의 화려한 벽화 예술을 아줄레주 양식이라 부릅니다. 과거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했던 마누엘 1세가 그곳의 장식 타일에 매료되어 포르투갈에 가져와 유행시킨 것입니다. 즉, 과거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에 영향을 받은 양식으로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부조 양식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타일 부조는 일반 건축에도 적용되어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을 한 아름다운 타일들이 가는 도시 곳곳마다 일반 건물과 주택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도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 포근한 나라라 타일이 깨지지 않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줄레주 타일 양식을 들여온 마누엘 1세(1495~1521 재위)는 그의 재위 연도에서 보듯이 엔리케 왕자 사후 해상제국을 실현하고 그 힘으로 포르투갈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군주였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 곳곳의 대성당과 궁전엔 마누엘 양식이라고 불리는, 역시 또 이슬람 양식에 포르투갈스러운 독특함이 더해진 아름답고 화려한 그 양식이 가는 곳마다 푸른 타일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포르투갈스럽다는 것은 마누엘 양식엔 대항해 시대를 연상하는 선박의 밧줄과 바다 식물인 아티초크의 장식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누엘 양식이 가장 잘 보이는 도시가 포르투갈 정 중앙에 위치한 토마르라는 곳입니다.
그 도시를 언급하는 것은 그곳에도 엔리케 왕자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르의 그리스도 수도원에 그가 있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말이 수도원이지 과거 부유했던 템플 기사단의 소유물이라서인지 거대함과 화려함을 뽐내며 전성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도원 안 성당의 실내와 실외에서 포르투갈에서 본 유적지 중 가장 빛나고 화려한 마누엘 양식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실외의 경우는 외벽 리뉴얼 공사를 진행 중이라 일부분만 본 것이 아쉬웠습니다.
엔리케 왕자는 1312년 프랑스의 필립 4세에 의해 사라진 템플 기사단의 정신을 잇는 포르투갈의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으로 1420년 임명되어 이 수도원 안에 집무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곳은 템플 기사단의 포르투갈 지부였던 장소였습니다. 엔리케 왕자가 많은 돈이 들어간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이 수도원 내 템플 기사단의 재산이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한 템플 기사단의 재산을 탐을 내어 파리에 본부를 둔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단원들을 모두 화형에 처하고 그 기사단을 해체시켰는데 멀리 떨어진 이 수도원의 재산은 수거하지 못했나 봅니다. 당시 그는 전쟁 자금과 빚 청산을 위해 그런 사악한 짓을 벌였습니다. 교황에게 린치를 가하고 로마의 교황청까지 그의 나라 아비뇽으로 옮겼던 왕이었으니 못할 것이 없던 군주였습니다. 그렇게 신화가 되어버린 템플 기사단의 유적과 자취를 포르투갈에 와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제 엔리케 왕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입니다. 아니 그전부터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가 대항해의 전진 기지로 선택한 도시는 알가레브라 불리는 남부 바닷가 지역인 사그레스였습니다. 제가 도착했던 때가 3월 말이었음에도 그곳 알가레브의 해안가들은 벌써 우리나라 초여름과도 같은 일기를 보이며 어디를 가도 따뜻한 햇살과 청명한 하늘, 그리고 파란 바다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출발 전 서울은 꽃샘추위와 황사와 미세 먼지로 인해 최악의 기상 상황이었는데 그곳은 전혀 다른, 말 그대로 이국적인 세상이 펼쳐진 것입니다. 마치 여행 속에서 휴가를 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그레스에 엔리케 왕자는 1419년 대서양이 가장 멀리 보이는 절벽 위 요새 같이 생긴 곳에 항해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항해술과 지리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게 하였습니다. 출항지 역할을 하게 된 인근 라고스엔 조선소도 세웠습니다. 4년 전인 1415년 21세의 나이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모로코의 세우타를 정복해 포르투갈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에 영토를 개척했던 그였습니다.
사그레스에서 그의 항해 군단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점점 남쪽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암흑의 바다라 불리며 전엔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던 바다 선을 무사히 통과하며 새로운 뱃길을 개척해 간 것입니다. 위에 등장한 조선인의 후손이 살고 있고, 축구 스타 호날두의 조상이 터전을 잡은 마데이라 섬도 그 당시 그가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바다로 전진하며 그 아프리카 해안가 주변을 개척하고 침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지의 그곳의 자원을 수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사그레스 주변 조선소가 세워진 라고스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로 북적이는 노예 시장이 형성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이 후에 동양까지 진출해 우리 조선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보여준 노예무역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엔리케 왕자는 제국주의의 시조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를 따라 유럽의 국가들이 해외를 침략하고 수탈하며 그곳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와 노동력으로 사용했으니까요.
엔리케 왕자가 생전에 개척한 바닷길은 아프리카의 적도 근방까지였습니다. 그는 적도까지는 도달하지는 못하고 1460년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뿌려놓은 항해의 씨앗은 그의 사후까지도 계속 이어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 그의 유업을 받든 자랑스러운 마린 보이들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역사를 완성해 갔습니다. 아, 위에 등장한 마누엘 1세도 올려야겠네요. 그는 이 글 위에서 리스본의 벨렘탑을 세운 군주로 이미 등장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원정의 성공을 기념해 1515년 그 탑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세가 시작되며 서양 세계는 모든 면에서 변화를 맞이하였습니다. 15세기 초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선 메디치 가문의 2대 적자인 코시모 메디치의 후원 아래 천재 예술가들의 시대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중부 유럽의 독일에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전 프랑스에선 필립 4세가 시작한 7대에 걸친 아비뇽 교황청의 시대가 끝나고 교황은 1378년 본래 자리인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종교개혁과 때를 같이 하여 바다 건너 영국에선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에 반기를 들며 1534년 영국 국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유럽의 동쪽에선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여 메흐메드 2세가 1453년 난공불락이라 불렸던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은 국권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를 끝내는 결정적 계기가 된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의 결혼 동맹으로 그곳을 800년 간 지배하던 이슬람을 1492년 완전히 몰아내었습니다.
대륙의 서쪽 끝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은 1249년 일찍이 레콩키스타를 졸업해 오늘날과 같은 국경을 확정 짓고 유럽 다른 나라들이 내치에 정신이 없을 때 엔리케 왕자의 혜안으로 가장 먼저 대항해 시대를 시작하였습니다. 인접국가인 스페인도 뒤이어 포르투갈을 따랐는데 통일의 해에 이탈리아에서 온 콜럼버스를 이사벨 여왕이 후원함으로써 대항해 시대의 경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유럽을 중세라는 구세계에서 근세라는 신세계로 변화시킨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라는 사실에서 이때가 서양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나 긴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대국이고 강국인 스페인이었지만 적어도 당시 꿈의 땅인 인도로 가는 싸움에서의 승자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인도를 가기 위해 스페인이 후원한 콜럼버스는 대서양 뱃길을 선택했지만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의 후예들은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양 뱃길을 선택했으니까요. 포르투갈은 성공했고 스페인은 실패했습니다. 인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대서양을 선택했던 콜럼버스의 항해 계산법이 틀린 것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던 갈릴레이처럼 그는 죽을 때까지 그가 도착한 곳을 인도라 믿었습니다. 물론 코끼리 뒷발 잡듯이 더 큰 성과인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긴 했습니다.
만약 콜럼버스가 나중에라도 그가 도착한 곳이 인도가 아니고 신대륙이라 인정했으면 그 대륙의 이름은 같은 이탈리아인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뺏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시아, 또는 콜럼비아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당시 그렇게라도 돌아서 돌아서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하려 했던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지중해를 통해 그쪽으로 가는 육로와 해로가 막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곳에 수에즈 운하가 뚫려 과거엔 번거로웠던 육로로 갈아탈 필요도 없이 곧바로 홍해로 빠져 인도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엔리케 왕자는 죽어서도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가 살아서는 못 봤지만 그가 뿌린 대항해의 씨앗이 그의 후손들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으니까요. 그의 그런 노력으로 실크로드 이후 끊어졌던 유럽과 아시아, 서양과 동양은 다시 이어졌습니다. 결국 1522년 마젤란은 이번엔 그의 선배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직진하여 대서양을 통해 남아메리카 남쪽 끝을 돌아 태평양을 발견하고 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콜럼버스가 하고자 했던 것을 그가 성공한 것입니다. 그렇게 마젤란으로 인해 30년 전 콜럼버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은 되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수학 실력이 약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도 그가 도착한 곳을 서인도라 부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디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과 전투 중 사망했으므로 아쉽게도 인도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지구를 바다로 한 바퀴 돌며 세계는 완벽하게 이어졌습니다.
영국의 정치가 토마스 모어는 1516년 발표한 그의 소설 <유토피아>에서 그곳을 다녀온 가상의 인물로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를 등장시켰습니다. 그는 포르투갈인입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다는 뜻의 유토피아 섬에 대한 그 포르투기스의 진술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모어는 라파엘을 소개한 사람에게 편지까지 보내며 마치 그가 실존 인물인양 그의 진술에 대한 사실성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그만큼 모어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가 실재하기를 꿈꾸었고 그의 조국 영국이 그런 세상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타인의 입을 빌어 그 책을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그의 주군인 헨리 8세의 이혼을 심정적으로 침묵하며 반대한 죄로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재혼을 반대했던 훗날의 앤 볼린처럼 도끼로 참수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인 모어가 <유토피아>의 화자로 포르투갈인을 설정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도 대항해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라 그 당시 미지의 신세계를 다녀온 인물이라면 그렇게 포르투기스를 떠올렸나 봅니다. <유토피아>에서 포르투기스인 라파엘은 탐험가로 5년 간 그 섬에서 살다가 온 것으로 등장합니다.
포르투갈은 1415년 엔리케 왕자가 모로코의 세우타를 정복한 이래로 남미의 브라질을 비롯하여 인도의 고아, 말레이시아의 믈라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중국의 마카오 등의 식민지를 뱃길 따라 개척하였습니다. 일본에서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나가사키의 데지마란 좁은 인공 섬에서 갇혀 활동하다가 그나마 모두 쫓겨났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모두 순차적으로 독립을 하였는데 1999년 중국 정부에 반납한 마카오가 마지막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600여년 간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를 운영한 국가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카오를 마지막으로 반납하며 엔리케 왕자가 꿈꾸었던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역사는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현재는 그가 생존 시 개척한 식민지인 마데이라 제도와 그보다 대서양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아조레스 제도만이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로 남아서 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