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Aug 26. 2023

일본은 없는 <오펜하이머>

물리학과 심리학의 향연

1941년 일본은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침공이라 불리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 전쟁에 선전포고는 없었습니다. 그전에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들이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동남아 식민지 국가들을 돌 볼 여유가 없는 틈을 타 그곳을 차례로 침공했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아예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그 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참전한 것입니다. 전쟁 상대국은 그때까지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오긴 했으나 일본의 목표 달성에 눈엣가시 같던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그 커진 힘을 바탕으로 1885년 당대의 진보주의자인 후쿠사와 유키치가 주창한 탈아론()에서 하란대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하나둘씩 짓밟아 나갔던 상대국들과는 급이 다른, 그들이 상대한 역대 최강이자 동시대 세계 최강의 국가였는데 그 미국을 향해 선제공격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12월 7일 일요일 아침 평화롭고 아름다운 하와이 호놀룰루의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태평양함대는 일본의 공습으로 인해 격파되었습니다. 작은 오하우섬의 호놀룰루가 최근 화재가 나서 큰 피해를 본 과거 하와이 왕국의 수도였던 큰 섬 마우이의 라하이나를 제치고 하와이의 중심이 된 것은 그곳은 수심이 얕아 항공모함이 정박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날 진주만 공습의 성공은 일본이 근대화 이후 대대로 쌓여오던 미국이라는 콤플렉스가 일순 제거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88년 년 전인 1853년 오늘날 도쿄인 에도 앞바다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을 느끼게 했던 미국의 흑선 함대였는데 그 미래의 함대를 날아가서 박살 낸 것입니다.


미국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간 중립 입장을 취해오던 미국은 그 즉시 자동으로 2차 세계대전에 개입되어 태평양 전선의 일본은 물론 유럽 전선의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2년 8월부터 그 전쟁을 한방에 끝낼 압도적인 무기를 개발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입니다. 그 프로젝트는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없던 핵폭탄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 프로젝트를 지휘한 군의 실무자는 레슬리 그로브스라는 공병 장교였으며, 그가 발탁한 그 프로젝트의 개발 책임자는 오펜하이머라는 과학자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마천루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뉴욕의 중심가 맨해튼이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핵폭탄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와 동명이라는 것이 다소 의아스럽지만 당시 그 기밀 프로젝트가 발의된 맨해튼에 미군의 공병 부대가 있어 그대로 프로젝트명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두 주역인 군인 레슬리 그로보스와 민간인 오펜하이머의 실제 모습과 영화 속 모습


레슬리 그로브스는 그 이전에 오늘날까지도 미 국방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펜타곤을 신속하게 건축한 공로로 대통령 직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책임자로 발탁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그에 의해 추천되어 그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임명이 된 것입니다. 당시 그가 미국의 수많은 과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핵물리학자로 인정되어 그 막중한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의 사상과 애국심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이 되어 그에게 그 프로젝트를 맡겼을 것입니다. 1940년 대 미국은 전쟁의 적뿐이 아닌 사상의 적도 꽤나 위협적으로 보던 시기였으니까요. 특히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 미국과 함께 연합국으로 한 배는 탔지만 미국에겐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13만 명의 인원과 20억 달러의 거금이 들어간 초대형 프로젝트로 약 3년의 노력 끝에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트리니티라는 명으로 실시된 실험을 통해 실전에서의 성공을 확신한 것입니다. 민간인인 오펜하이머와 군인인 레슬리 그로브스 듀엣이 결국 그 일을 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 유럽 전선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항복한 상태라 그 무기를 쓸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 해 4월 히틀러는 40시간 전에 결혼한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벙커에서 자살했고, 무솔리니는 애첩인 페타치와 함께 도주하다가 군중에게 잡혀 총살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총으로 흥한 자들이 총으로 망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마지막엔 연인이 함께 해 그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보다는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실전 적용 시점엔 2차 세계대전 주적 3인방 중 2인이 죽고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만이 살아있는 상태였습니다.


사실 당시 일본도 이미 전세가 90프로 이상 패전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이미 진주만 공습 6개월 후 복수전으로 벌어진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일본에게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잡아오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대세가 기울었음에도 카미카제, 전원옥쇄 등을 부르짖는 군국주의자들의 발악으로 일본은 항복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윽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펜하이머가 생산한 아이들이 출격을 하게 됩니다.


20일 전 트리니티라 불린 원폭 투하 실험 성공으로 빅보이가 된 오펜하이머의 첫째 아이는 리틀보이(Little Boy)로 그 폭탄은 8월 6일 혼슈 남부의 히로시마에 투하되었습니다. 그래도 일본의 항복 사인이 없자 3일 후인 8월 9일 규슈의 나가사키에 둘째 아이가 투하되었습니다. 그 폭탄의 이름은 180cm 가까운 키에도 평생 60kg이 되지 않았던 슬림맨인 오펜하이머와는 달리 팻맨(Fat Man)이란 펫네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게임 셋! 일본은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습니다. 에도 앞바다에 뜬 미국의 흑선으로 촉발된 메이지유신 후 77년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던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기관차가 처음으로 멈춰 선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잘못 건드린 것이지요.


나가사키 원폭 투하 3분 후의 구름 기둥 모습. 1945. 8. 9. (출처, AP통신)


원폭 투하의 피해는 처참했습니다. 개발자인 오펜하이머의 예상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위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에서 7만 명이 죽고 나가사키에선 4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원폭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토털 30만 명 정도의 많은 사상자가 불과 폭탄 2개로 발생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 사상자는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한 난징 대학살 한 도시의 사상자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사실 적어도 나가사키의 원폭은 막을 수 있던 재앙이었습니다. 군부가 히로히토 천황에게 히로시마 원폭의 정확한 피해 상황을 신속하게 보고하고 곧바로 패전을 인정했다면 나가사키에 팻맨은 출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일본의 천황은 그 이전부터 소련의 대일본 참전이 가시화되면서 확실하게 항복으로 기울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엔 일본의 공산화를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제처럼 천황제는 폐지되고, 마지막 차르인 로마노프 왕가의 니콜라이 2세처럼 일가족 모두가 처형당하는 걱정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인해 당시 미국은 원폭 투하를 신속하게 결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당한 일본에 대한 복수심, 천문학적인 자원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 확인, 그리고 유럽 전선의 독일처럼 소련에게 일본의 항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결국 지리멸렬하게 끌던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원폭 두 방으로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나라만 일부러 늦춰서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위의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사 과정과 그 중심에 존재한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봉 1주일이 지난 글을 쓰는 이 시점 175만 명의 관객이 그 영화를 보고 갔네요. 꽤나 놀라운 흥행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놀랍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통상적인 흥행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글을 쓴다면 1억 불이 투입된 영화최고는 생각보다 저조한 흥행 기록이라고 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1개월 먼저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은 4백만 관객을 동원했으니까요. 물론 <오펜하이머>도 1개월이 지나면 관객 수가 비슷한 숫자까지 육박할지 모르겠으나 제 생각엔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광복 78주년인 2023년 8월 15일에 맞춰 1개월 늦게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지금 예상보다 흥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그리고 더 이상 크게 흥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제가 추론하는 데에는 이 영화의 연출자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는 전작들의 화제성으로 인해 내놓는 작품마다 흥행성과 작품성 모두를 보장하는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 명감독입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 <오펜하이머>는 저를 비롯한 관객들의 예상을 깼습니다. 아니, 저의 예상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관객들을 상대로 조사를 실시한 것은 아니니까요.


개봉일인 광복절 당일에 그 영화를 보러 간 저는 그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원자폭탄인 리틀보이와 팻맨이 투하되고 폭발하는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나왔던 바그너의 <발키리> 같은 음악이 배경으로 웅장하게 들리며 일본 열도로 날아가는 전투기의 모습들과 함께 말입니다. 원폭 투하 시 그간 사진으로만 보아온 그 섬광과 버섯구름, 그리고 그 폭발음과 피해 장면 등이 영화에선 어떻게 표현되었을까라는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2차 세계대전을 끝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이니까요.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상상을 비주얼과 오디오로 가능하게 하는 종합예술이니 그런 기대감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놀란 감독은 전작인 <덩케르크>, <테넷> 등에서 그러한 전쟁과 전투 장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기에 그런 기대를 한 것입니다.


핵폭탄 실험 장면의 로케이션 촬영을 연출 중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우측은 오펜하이머


하지만 저의 기대와는 달리 180분이나 되는 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그 장면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다룬 영화인 <진주만>과 <미드웨이>를 통해 고조된 그 절정의 장면이 <오펜하이머>엔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승(起承)은 진작 봐왔는데 기대했던 정점인 전(轉)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전쟁 장면은커녕 이 영화엔 일본은 물론 단 1명의 일본인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의 리틀보이와 팻맨도 나오지 않습니다. 뉴멕시코주 사막의 트리니티 실험에 사용된 가젯이라 불린 실험용 폭탄까지만 나옵니다. 그 가젯이 터진 시점이 상영 시간 120분 정도 지난 시점이기에 그 뒤엔 당연히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출격하는 장면이 나올 줄 알았지만 그것으로 원자폭탄은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개발의 주역인 오펜하이머조차 뉴스를 통해 그가 만든 리틀보이와 팻맨이 투하된 사실과 그가 수행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민간인이라서인가 주인공인 그에게조차 전쟁 장면은 단 1도 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의 현재 흥행 기록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열과 폭발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전쟁 영화의 클리셰가 없음에도 2백만 가까운 관객이 영화관을 찾은 것에 대해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덧붙여 이런 유의 흥행까지 예측했을 놀란 감독의 비상한 자신감도 논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오펜하이머> 이 영화에 일본 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는 장면을 넣었다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버금가는 흥행을 기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그렇습니다. 비상한 영화적인 능력에 더해 통찰력 있는 자신감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연구원들의 환영에 화답하는 오펜하이머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놀란 감독은 관객이 기대하는 원폭 투하 대신 다른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 영화엔 2개의 다른 이야기가 씨줄, 날줄을 엮어가듯이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주인공인 오펜하이머를 두고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가 그의 지식으로 핵폭탄을 개발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또 한 축의 다른 이야기는 종전 이후까지 이어지는 그의 심리 상태와 그것의 진위여부를 논쟁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는 오펜하이머란 인간의 외면의 세계이고 후자는 그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전자는 물리학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후자는 심리학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180분 내내 물리학과 심리학의 향연이 지루하지만 숨 가쁘게 이어집니다. 놀란 감독은 팩트인 물리학의 영역은 컬러로 처리했고, 추론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심리학의 영역은 흑백으로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타인의 마음속을 정확하게 판단하긴 힘드니까요.


물리학과 심리학, 어느 영역이든 놀란 감독은 신명나게 이 영화를 찍어 나간 듯합니다. 그간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 등을 통해 물리학에 심취한 영화 천재로 알려진 그가 이번 <오펜하이머>엔 아예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20세기를 빛낸 물리학의 천재들을 대거 출연시켰습니다. 정작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오펜하이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무려 18명이나 이런저런 성과와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니까요.


놀란 감독은 이렇듯 전쟁 기간 내에 벌어지는 워싱턴 수뇌부의 정치인들의 모습과 함께 연구소 내 과학자들의 모습을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핵폭탄이라는 위험물을 다루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세계의 이념과 사상에 대한 고뇌와 갈등, 그리고 타인과 연계된 대립과 갈등, 그리고 욕망과 탐욕 등을 밀도 있게 표현하였습니다. 방법은 감독 특유의 독심술을 발휘해서 오펜하이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단정이나 추론을 하기도 하고, 때론 상대방과의 대화와 논쟁, 그리고 비평을 통해서도 오펜하이머란 인물 개인과 당시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간 물리학자 뺨치던 그가 이 영화에선 심리학자 뺨치는 연출을 과시한 것입니다.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청문회에 끌려 나가 사상 검증을 받는 오펜하이머. 뒤편 우측 1열 끝은 그를 음해한 스트로스

 

마치 "애들은 가라"라고 뱀장수가 외치듯 그가 펼친 지식의 향연에 올 사람만 와서 보고 그렇지 않은 관객은 과감히 손절해도 좋다는 자신감을 영화 내내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더 큰 흥행보다는 그런 향연을 더 즐기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대폭발이 없이도 180분이라는 긴 시간을 물리학과 심리학적인 재료를 가지고 완성이 됩니다. 긴 영화라 인터미션이 있으면 좋을 법도 하지만 놀란 감독은 화장실 갈 시간도 주지 않을 만큼 단 1초의 딴짓과 딴생각을 허용하지 못하게 하며 180분 내내 스크린을 주목하게 합니다. 초반엔 물리학이 주도하고 후반엔 심리학이 주도하는 구조입니다. 위에서 원자폭탄의 성공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이 영화는 아직도 1시간 가까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후반을 등장인물 내면의 심리학적인 요소로 채운 것입니다.

 

전쟁을 끝낸 오펜하이머는 영화 후반 새로운 전쟁을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한 개인과의 전쟁입니다. 물리학의 영역에서 주적은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지만, 심리학의 영역에선 국가적인 영웅이 된 그를 시기하여 파멸시키려는 루이스 스트로스라는 인물이 그의 적으로 등장합니다. 마치 소설에서 주인공인 프로타고니스트와 적대자인 안타고니스트가 서로 대립하듯이 그런 대결 구도를 벌이는 것입니다. 이제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거대 담론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미시의 영역으로 집요하게 파고 들어갑니다. 미국 원자력위원회(AEC) 위원장이었던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와의 첫 만남에서 개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별일 없어 보이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첫 만남


소련은 4년 뒤인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을 하였습니다. 미국이 생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빠르게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미소는 냉전의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독일과 일본을 함께 물리친 연합국에서 그때처럼 뜨거운 화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차가운 전쟁의 라이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원자폭탄보다 훨씬 강한 수소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데 오펜하이머는 그것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원폭의 후유증이 훨씬 센 것을 보고 반대한 것입니다. 그가 힌두교 경전을 인용하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고백한 것에서 보듯이 인간적인 양심과 갈등에서도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아 정치적 경쟁자인 스트로스가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는 과거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오펜하이머의 애인, 아내, 동생, 친구 등 주변 인물들을 호출하고 노조와 스페인 반군을 지원했던 그의 과거 이력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소련의 스파이로 몰고 갑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미국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영화 <오펜하이머>는 일본이 들어갈 법한 자리를 인간 내면 심리의 세계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전 놀란 감독으로부터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메멘토>, <인셉션>, <테넷> 등은 제가 전혀 모르는 무지의 영역이기에 무엇이 나올지 기대 자체가 불가한 영화들이었지만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래도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제 머릿속에 기대 요소가 있었는데 놀란 감독은 그것을 빼버리고 역시 또 그만의 방식으로 허를 찌른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를 깨끗이 씻어내게 하는 영화가 있는 반면에 이렇게 머릿속을 무언가 채워주는 느낌을 주는 영화도 관객에게 나쁠 리는 없습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가 연출자의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도 관객의 선택의 문제이니까요. 이해와는 상관없이 덕분에 저는 공부를 잘하고 온 듯합니다. 물리학과 심리학의 향연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히틀러의 반유태주의 때문에 불가능했다고 말합니다. 히틀러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머리 좋은 유태인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우대했더라면 원자폭탄은 독일이 가장 먼저 개발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었다면 원폭은 일본이 아닌 영국이나 미국에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속한 아리안족을 최우수 혈통이라 지칭했던 히틀러로서 그것은 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당장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는 하지는 않았지만 핵폭탄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이론을 제공한 아인슈타인의 저서들이 독일에선 나치에 의해 불태워졌으니까요. 실제로 당시 독일에서 망명한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와 관련한 핵물리학자들 중엔 유태인이 많았습니다. 수장인 오펜하이머부터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독일계 유태인이었으니까요. 동족인 6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증오심이 그들의 연구 성과를 촉진시켰을 것입니다. 영화에서 속마음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오펜하이머조차 독일의 항복으로 그가 만든 원폭을 그곳에 떨어트리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으니까요.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역들. 좌로부터 맷 데이먼(레슬리 그로브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스트로스), 킬리언 머피(오펜하이머), 에밀리 블런트(키티 오펜하이머)


감독만큼이나 배우도 명불허전의 영화 <오펜하이머>입니다. 주인공 오펜하이머는 다소 의외의 인물인 킬리언 머피가 맡았습니다. 그간 다른 영화에서 조연으로 간간이 보였던 그가 대작의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도무지 그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의 천재로 등장합니다. 오펜하이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63세의 이른 나이에 그를 죽게 만든 주범인 담배를 계속 입에 물고서 말입니다.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천거한 군인 레슬리 그로브스는 맷 데이먼이 연기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입니다. 실제 전 출연진을 보기 전까지는 그가 오펜하이머로 나올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였습니다. 오펜하이머가 3년 만에 조기 졸업한 하버드 대학을 그도 입학을 했고 전작인 <굿 윌 헌팅>에서 이미 한차례 수학 천재로 등장했던 그였으니까요.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영화에서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흔들림 없는 단호한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후반부 존재력을 과시한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언급을 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마블의 영화 <아이언맨>으로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안경을 써 생경한 그의 모습이 처음엔 매우 온건하고 지적인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이언맨 슈트가 아닌 굵은 뿔테 안경 뒤로 숨은 음흉하고 탐욕스러운 빌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사적인 원한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하찮은 이유에서 비롯된 소심한 복수입니다. 대저 인간은 그런 존재이겠지요.



* 영화 관련 스틸 컷은 모두 네이버 영화에서 받아왔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8.15 광복절 아침 9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