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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09. 2023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점심

<지휘의 발견>을 읽고

"1975년 8월 30일 토요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자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과 점심을 들었다."


1975년 당시 신문에 이런 헤드라인이 떴다면 그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적잖이 흥분하며 주목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왠지 모를 긴장감도 함께 올라왔을 것입니다. 사실 50여 년 전의 일임에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랬으니까요. 식탁을 마주하고 팽팽했을 것만 같은 편치 않을 두 사람의 점심입니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이라는 두 거장의 이름에서 오는 무거운 상대성이 그 점심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제가 최근 읽은 <지휘의 발견>이라는 책의 서문에 올라와 있는 글입니다. 제가 친애하는 어느 선배님께서 먼저 읽으시고 제게 읽어보라고 주신 책입니다. 선배님은 뜻밖에 책과 함께 지휘봉도 주셨습니다. 전 처음 보는 단아한 케이스에 고이 담겨 더 귀해 보이는 그것을 말입니다. 제가 책은 읽어도 지휘봉을 제 용도로 쓸 일은 없겠지만 이 지면을 통해 훌륭한 지휘 세트를 주신 선배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느 선배님께 선물로 받은 지휘봉과 <지휘의 발견> 책


그날 점심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식사 중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혹시 언쟁이 생기지는 않았을까요? 음식이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갔는지나 모르겠습니다. 2005년 가족과 함께 한 동유럽 여행 시 방문했던 잘츠부르크가 떠오릅니다. 그땐 모차르트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이들이 그로부터 30년 전 점심을 함께 했던 카라얀의 집은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모차르트의 노란 생가에서 멀지 않은 잘자흐강 건너에 그의 생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카라얀은 1908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잘츠부르크의 그 집에서 1989년 사망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모차르트의 집을 오가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가락 건초염으로 피아노를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전공을 바꾸어 빈 공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래도 음악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빈 음대로 학적을 바꿨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해 주었습니다. 피아니스트 대신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1975년 카라얀과 번스타인과의 점심엔 양가의 가족들도 동석했는데 그 점심의 호스티스는 카라얀의 세 번째 부인인 모델 출신의 엘리에트 무레였습니다. 그녀는 2008년 카라얀 탄생 100주년 때 언론에 모습을 보인 후엔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카라얀보다 27년 연하인 그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4년이 지난 지금도 잘자흐 강변의 그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되어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는 많은 관광객들이 그녀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내다보며 살고 있겠지요.


1975년 당시 번스타인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그곳에 갔다가 카라얀의 점심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 해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관객들은 명문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실연을 모두 감상하여 다시 없을 호사를 누렸을 것입니다. 당시 카라얀은 자기 집이 있는 잘츠부르크에 온 번스타인을 초대하지 않기도 그렇고 해서 그를 초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천하의 카라얀이지만 부인인 엘리에트와 상의를 하고 그녀가 컨펌을 해줘서 만들어진 자리였겠지요. 과거 1958년 그의 뉴욕 무대를 위해 번스타인이 애써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드러난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지휘 스타일


모두가 궁금해하는 1975년 그날 점심에 오간 대화를 상세히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손님으로 간 번스타인이 뉴욕에 돌아와 동료 지휘자인 존 마우체리에게 스카치위스키를 한잔 하며 들려준 것입니다. 1945년생인 존 마우체리는 번스타인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그가 쓴 <지휘의 발견>에 이 점심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는 1972년부터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난 1990년까지 그 밑에서 함께 작업하며 그의 만년엔 뉴욕 필하모닉을 직접 지휘했고 프랑스 국립관현악단, 도쿄 필하모닉, 이스라엘 필하모닉,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과 오페라단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지휘의 발견> 이전에 <클래식의 발견>이란 책으로 국내에 데뷔한 책 쓰는 지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그의 지휘자 경력에 더해진 예일대학의 13년 강의와 노스캐롤라이나 예술대학 총장을 역임한 음악 교육가로서의 소명이 더해져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점심 4년 후인 1979년 번스타인은 많은 사람들이 학수고대하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무대에 서게 됩니다. 역사적인 데뷔입니다. 주지하듯이 번스타인이 올라 선 그 포디움의 주인은 카라얀이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분야이든 두 마리 말이 경주하는 양대 라이벌은 존재하지만 음악에서, 그리고 지휘라는 영역에서 이 두 사람만큼 강력한 구도를 형성한 라이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 둘은 19세기가 피아니스트의 시대였다면 20세기를 지휘자의 시대로 만들어 클래식의 황금기를 이끈 음악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음악의 역사는 길어도 200년 남짓한 지휘의 역사에서 딱 두 명만 꼽으라면 대다수는 이 두 사람을 꼽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지휘자가 아니라 그를 지칭하는 마에스트로, 컨덕터, 셰프, 카포 등 그 이상의 계급이 필요했던 초고수였습니다. 각각 클래식의 본산인 구대륙 유럽과 떠오르는 신대륙 북미를 대표하는 데다가 한 사람은 히틀러가 주목한 나치주의자였고 한 사람은 나치에게 핍박을 당한 유태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그 구도를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번스타인이 카라얀의 안방인 독일의 베를린에 입성하여 한때 나치의 오점이 묻었던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은 것입니다.


그 무대에서 그가 선택한 곡은 말러의 <9번 교향곡>이었습니다. 일찍이 말러에 심취해 1911년 사망한 그의 모든 곡을 녹음까지 해 말러의 <2번 교향곡>에 붙은 부제처럼 그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그 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인인 말러가 생전에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한 예언을 실현시켜 준 미국인 번스타인이었습니다. 그는 말러의 마지막 고향곡인 그 곡의 연주를 무사히 마치고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그 곡을 "모두 가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퍼스트 말러리안다운 그의 자부심이 뱉어낸 일성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곡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한 지 10년도 훨씬 지난 초연이나 마찬가지인 곡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번스타인은 일부러 그 곡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 말러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인 카라얀 앞에서, 카라얀의 단원들에게 그들이 연주하지 않은 미지의 곡으로 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러 <9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1985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녹음


<지휘의 발견> 책에서 존 마우체리는 번스타인을 가리켜 지휘자들이 처음으로 손에 지휘봉을 드는 그 순간부터 유전병처럼 물려받는 시기심이라는 질병을 갖고 있지 않은 지휘자라고 평합니다. 대인배이거나 그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것이겠지요. 물론 타인에게 무감각해도 그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하기 힘듭니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팽팽한 경쟁심리를 보여주는 대목은 그 책은 물론 그 책 밖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니까요. 당장 번스타인은 1975년 카라얀과의 점심 스토리를 들려준 존 마우체리에게 "태어나서 책이라곤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같더라"라고 카라얀을 평한 것도 그렇습니다. 그 말은 상대적으로 번스타인의 지적인 우월감을 뽐내는 말로도 들립니다. 실제로 번스타인은 독서광인 데다가, 역사에 몰두하며, 한때는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정치 운동가이니,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경비행기를 몰고, 스포츠카를 타고,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는 카라얀이 천박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한 편 구석엔 그렇게 사는 카라얀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마음도 자리 잡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참 다릅니다. 악단의 단원들에게 카라얀이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무서운 독재자였다면 '레니'라 부르라며 다가선 번스타인은 지극히 편안한 친구 같은 지휘자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카라얀이 거장을 뜻하는 지휘자인 마에스트로(maestro)라면 번스타인은 열이나 전기가 잘 통하게 하는 도체를 뜻하기도 하는 지휘자인 컨덕터(conductor)에 가까운 것입니다. 단원들과 소통을 잘한다는 것이지요. 소속 국가도 그렇듯이 카라얀이 전근대적인 독일 스타일이라면 번스타인은 현대적인 미국 스타일로 보입니다. 섹스에 있어서도 번스타인은 자유로운 동성애자였습니다. 물론 <지휘의 발견> 이 책은 뉴욕 필하모닉에서 18년 동안 번스타인과 함께 작업한 후학이자 동료인 존 마우체리가 써서 그런지 번스타인에 후한 감이 있어 보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요. 그 역시 유명한 지휘자이지만 존 마우체리는 카라얀을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1979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말러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한 번스타인은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가 연주할 때 단원들에게 나눠준 각 파트의 악보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거의 유일한 말러 전문가였던 그의 곡 해석이 빼곡히 적혀있는 그 파트보를 카라얀이 수장으로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바로 반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번스타인은 그것의 신속한 반환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함흥차사와도 같이 그 악보집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몇 달이 지나서야 그 파트보는 돌아왔는데 또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몇 달 사이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 곡을 정식으로 녹음해 음반을 낸 것입니다. 지휘자는 예상되듯이 카라얀이었습니다.


번스타인은 분개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반납하지 않은 그 파트보는 영업 기밀과도 같이 그만의 해석을 빼곡히 메모해 둔 악보인데 그것을 보유한 채 연주를 한 것입니다. 번스타인의 눈엔 그 중심에 카라얀이 보였을 것입니다. 카라얀에겐 말러는 초연인 곡이기도 해 번스타인의 이런 분노는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신기술 반도체의 설계도를 이직하는 직원이 빼 가서 경쟁사에서 신제품 반도체를 출시한 격이니까요. 게다가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곡으로 그라모폰 상까지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심증은 굳건하지만 진실은 묻혀 있습니다.


10년 연상인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출세 시기도 비슷했습니다. 세상에 비슷한 시기에 등판했다는 것입니다. 카라얀은 1955년에, 번스타인은 1958년에 그들의 시대를 열게 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통상 이 두 오케스트라에 1975년 그들이 점심을 함께 하고 한 무대에 섰던 위의 빈 필하모닉을 더해 세계 3대 오케스트라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오케스트라들이 모여서 콘테스트를 벌인 것도 아니니 이런 석차에 발끈하는 다른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확실한 것은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그들 재임 시 베를린 필하모닉과 뉴욕 필하모닉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점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입니다.


1955년 카라얀과 번스타인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카라얀은 47세였고 번스타인은 37세였습니디. 그때 그곳에서 카라얀은 <카르멘>을, 번스타인은 <라보엠>을 지휘했습니다. 과연 오페라의 본산인 이탈리아이고 밀라노였습니다. 그때 번스타인은 카라얀의 연주를 감상하고 그에게 다가가 "제가 지금껏 경험한 것 가운데 최고의 오페라 지휘였습니다. (...) 물론 제 지휘를 빼고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지만요."라고 전했습니다. 농담성으로 건넨 말이지만 카라얀은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말이야 막걸리야와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요.


밀라노 첫 회동 3년 후인 1958년 카라얀은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번스타인의 안방입니다. 이때 카라얀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여기서 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가 지휘한 그 곡을 일주일 후 TV에 출연한 번스타인이 지휘를 했는데 그가 단원들에게 연습시킨 그대로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카라얀의 주장입니다. 1979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벌어진 것과 유사한 사건이 그 21년 전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세기의 라이벌답게 사건사고와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은 카라얀과 번스타인이었습니다. 카라얀은 이렇게 밀라노와 뉴욕에서 맺힌 번스타인에 대한 앙금으로 1979년 그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말러의 <9번 교향곡>을 가지고 그에게 복수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베토벤이든 말러이든 늘 '9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음악가들 중에서 교향악의 대가인 정통파 베토벤과 파격파 말러가 이들의 감정싸움에 등장하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물론 이런 추론이 근거 약한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 둘도 지휘자 이전에 감정이 동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추론 가능한 기브 앤 테이크였을 것입니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1984년 베를린 픽하모닉 녹음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베를린과 뉴욕에서 서로 상대방의 곡을 카피했든 안 했든 간에 참고는 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야의 작업을 해도 그 이전에 작업된 훌륭한 결과물을 참고하는 것은 일반적인 행태이니까요. 하지만 <지휘의 발견> 책에서 존 마우체리가 인용한 "위대한 요리사 세 사람에게 같은 식재료와 레시피를 주고 조리를 부탁하면 세 개의 전혀 다른 요리가 나오기 마련"이라는 격언처럼 같은 작곡가의 같은 곡이라도 지휘자에 따라 그 곡은 다 다른 맛으로 청중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장 유튜브에 들어가 베토벤이나 말러의 <9번 교향곡>을 들어봐도, 아니 안 들어봐도, 일단 같은 곡이지만 지휘자마다 그 곡들의 연주 길이부터가 다 다르니까요. 남이 연주한 것과 똑같이 지휘하려는 지휘자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기존 것과 달리 전혀 새롭든, 기존 것에 다른 새로움을 입히든 그렇게 작업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새로워도 전혀 새롭기는 힘들 것입니다.

 

<지휘의 발견> 이 책은 지휘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책입니다. 지휘의 역사부터 테크닉, 기보법, 지휘자 과정, 지휘자의 페르소나, 지휘자와 관계인들(작곡가, 청중, 평론가, 소유주 및 경영진), 무대의 주도권, 지휘자의 일상, 녹음과 공연, 지휘 예술의 신비 등의 이야기가 순서대로 등장합니다. 현역 지휘자인 저자 존 마우체리는 지휘자를 떠돌이 보따리장수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가 그간 메고 다녔던 보따리를 바닥까지 다 풀어낸 것입니다. 당연히 그가 직간접적으로 만난 20세기를 빛낸 거의 모든 지휘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적이 나옵니다. 그 안에 우리나라 지휘자는 단 한 명도 언급되지 않아 그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에피소드는 그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것을 제가 덧붙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어느 분야이든 어떤 조직의 수장으로서 그 조직을 이끌어가는 것엔 이 책에서 소개한 지휘와 같은 룰이 적용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의 단원을 거느린 악단의 지휘자는 100명의 직원을 거느린 기업의 사장과 대등할 테니까요. 지휘자와 단원의 연주는 기업에선 상품이 되고, 티켓을 사서 감상하는 청중은 소비자가 될 것입니다. 악단의 경영진은 기업의 주주이거나 오너이며, 공연하는 극장은 기업에겐 슈퍼마켓과 같은 유통 채널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완벽하지 않듯이 악단을 책임지는 지휘자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영국에서 80대의 명지휘자가 오페라에 출연한 20대 성악가의 퇴장 방법이 틀렸다며 그의 얼굴을 때린 사건이나, 과거 우리나라 서울시향의 명지휘자가 악단의 경영진과 불화를 일으킨 사건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아름답고 화려하게 손 춤을 추는 것으로만 보이는 지휘자의 무대 아래 감춰진 어려움과 어두움의 세계, 그것은 천하의 카라얀이나 번스타인도 피해 갈 수 없을 테니까요.


2023년 가을, 줄줄이 방한하는 세계 명문 악단들 (출처, 조선일보 2023. 8. 30)


2023년 올 가을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들이 방한 러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을 비롯해 그들과 거의 동급 대우를 받는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우리나라를 거의 1주일 간격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우리나라 클래식 청중의 저변의 넓어지고 감상 수준이 올라가 이렇게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오려 붙인 신문 기사에서 보듯이 어느 오케스트라이든 그들의 방한 기사가 뜰 때엔, 또는 국내 오케스트라를 소개할 때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악단의 지휘자를 가장 먼저 내세웁니다. 그 악단의 간판이고 대표선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청중은 악단이 쌓아온 평판도 중요하지만 그 지휘자의 역량을 보고 그 음악회를 보러 갈까 말까를 결정하곤 합니다. 그만큼 지휘자 한 사람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지휘자, 달래 마에스트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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