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Dec 09. 2023

일본 근세화의 핫스팟 오와리(나고야)

전국 시대 트리오 ㅡ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

중세 끝, 근세 시작


역사에서 고대와 중세를 이어받은 근세와 근대는 그 시대적 구분이 애매합니다. 그래서 크게 근대를 나누어 근세(early modern period)와 근대(late modern period)로 부르기도 합니다. 9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1291년 종결되고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바다를 통해 외부 세계로 나가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내부에선 르네상스, 종교개혁 등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절대적이었던 천년 중세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질서인 근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절대왕정기를 거치며 반동으로 일어난 계몽주의와 이를 잇는 기계의 산업혁명과 인간의 프랑스혁명 등으로 근세는 근대로 교체되었습니다.


동양의 중국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근세라 보고 청이 몰락한 아편전쟁 이후를 근대로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흔히 17세기 초 에도 시대라 불리는 도쿠가와 가문이 집권한 시기를 근세라 부르며 이후 일본이 대변혁한 메이지 유신기부터 근대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전반을 근세라 부르고 후기 고종이 왕위에 오른 개화기 시대부터 근대라고 칭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구분은 모호하고 애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왕이 죽어서 새 왕이 왕위를 잇는 것처럼 칼로 무를 자르듯 명확하게 시대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륙별 나라마다 발전의 속도가 달라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근세와 근대는 공인된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하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오카자키 성



일본의 근세화


일본의 근대화는 1853년 미국의 흑선이 에도 앞바다에 출몰해 이에 경각심을 느낀 하급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개혁파가 막부를 무너트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 근세화는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8년 후인 1598년 죽음으로서 그 이득을 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되면서 1603년 오늘날 도쿄인 에도에 그의 가문 이름을 딴 도쿠가와 막부를 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막부인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력이 흐지부지해지면서 오닌의 난 이후 약 130년간 혼란스러웠던 일본이 통일된 시기입니다. 하지만 에도 시대 이전 이렇게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 있었음에도 전국 각지의 실력자들이 난립했던 16세기의 100여 년을 근세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에도 시대로 귀결되게 한 전국 시대(戦国時代, 센코쿠 시대)부터 근세로 본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사가들은 이보다 조금 앞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미스터리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 한 도시에서 같은 시기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예술 천재들이 출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탄성 발언입니다.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3대 거장이 활동했던 피렌체였습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엔 도나텔로, 브라만테, 보티첼리 등의 예술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인구가 많아야 5만에서 10만 정도의 도시에서 이런 천재들이 한 시기에 넘쳐났으니 그것을 신기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문학엔 단테가 있었고 이후엔 사상가인 마키아벨리까지 있어 가히 피렌체는 다양한 천재들의 도시라 하겠습니다. 물론 그때 예술가들을 지원한 강력한 패트런인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천재들은 교육이나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간과 공간을 움직이는 우주의 큰 기운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나 봅니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근세는 피렌체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라는 예술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6세기 중엽 전국시대라 불리는 일본의 근세기에도 이와 유사한 시간과 공간의 큰 기운이 작용한 듯합니다. 대신 그 기운을 받은 자들은 예술가가 아니고 무인들이었습니다. 전국 시대 트리오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그들입니다. 이들 이외에도 날고 기는 많은 다이묘들이 열도를 누볐지만 누가 뭐래도, 어떻게 줄을 세워도 이들 트리오는 항상 그 선두에 서게 됩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처럼 말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이들 3인의 나이 격차는 불과 9년일 정도로 촘촘히 붙어 있습니다.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연배의 영웅들이 전국 시대 일본의 통일을 놓고 격전을 펼친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의 성인 이누야마 성



일본 근세화의 도시 오와리


그리고 그 장소는 오와리였습니다. 이들 트리오는 모두 오와리라는 커다란 집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유력 다이묘를 가리키는 센코쿠 다이묘로 성장하며 정치적인 야망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기업을 이룬 후엔 마치 결혼해서 차남들은 분가를 하듯이 새롭게 터를 잡은 각자의 도읍지에 위치한 성으로 옮겨갔습니다. 차남 격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를 떠나 서쪽의 오사카로, 3남 격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쪽의 에도로 옮겨 갔습니다. 불행히도 장남 격인 오다 노부나가는 아우들과는 달리 일본 통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1등으로 달려 나가던 그가 순리대로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면 그는 마치 장남이 아버지의 집을 물려받듯이 오와리에서 끝까지 눌러앉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와리에서 오다 막부를 열었겠지요.


이들 트리오가 이렇게 천하의 패권을 놓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주종 관계이면서 경쟁 관계로 견제하던 오와리는 오늘날 아이치 현의 나고야입니다.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나고야의 옛 지명 권역이 오와리입니다. 메이지 유신기 에도가 도쿄가 되었듯이 오와리는 나고야가 되었습니다. 나고야는 일본의 중앙 지역인 주부(中部) 지방의 중심 도시로 교토(京都)와 도쿄(東京) 사이에 위치해 있어 중앙의 수도라는 뜻인 주코(中京)로도 불리는 도시입니다. 16세기 중엽 일본의 한복판에서 이렇게 세 영웅이 태어나고 자웅을 겨루었습니다. 위에서 거론한 르네상스기의 피렌체와 유사하게 느껴지는 전국 시대의 오와리입니다.


처음 방문했던 나고야의 날씨는 쌀쌀한 편이었지만 매우 화창하여 그 한기를 잊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아직도 만개한 단풍으로 인해 서울보다 가을이 조금 더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했고 오늘날도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인 도요타를 비롯해 린나이, 노리다케 등 많은 기업들이 있어 공업 도시인 나고야이지만 공기와 하늘로만 보면 전혀 그런 공업적인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에 떠올린 인물은 엉뚱하게도 선동열과 이종범 선수였습니다. 그들이 나고야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구단인 주니치 드래건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분위기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저장된 알고 있는 것만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밤엔 그곳이 근교이긴 했지만 정말 제 기억 속에 언제일지 모를 어린 시절에나 본 듯한 지면까지 닿은 커다란 반구형의 하늘에 많은 별들이 깨알 같이 박혀있는 별난 별 쇼를 보았습니다. 일행 중 누군가는 별똥별을 보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어딜 가도 깨끗한 나라라는 인상과 그 실제는 공업 도시인 나고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나고야 성


나고야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고야 성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지인 오카자키 성을 방문하였습니다. 오카자키는 나고야와 붙어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한 군데 성을 더 방문했는데 그곳은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인 오다 노부야스의 성인 이누야마 성입니다. 기소 강가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이누야마 성은 현재 일본에 국보로 지정된 5개의 성들 중 하나일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한 아름다운 성입니다. 그리고 성 아래도 성 안의 사무라이들을 지원했던 상인인 조닌들이 살던 조카마치라 불리는 마을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 마치 일본의 16세기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고야 성과 오카자키 성은 많은 개보수를 거쳐서 외부는 옛 성의 모습이지만 내부는 주상복합의 실내와도 같아 인테리어는 별 매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누야마 성 근처에 자리한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다 우라쿠사이의 정원인 우라쿠엔도 방문을 하였는데 그곳 또한 국보로 지정된 일본 전통의 다실이 있는 고풍스러운 정원이었습니다. 과거 사무라이들이 차담을 나눴던 다실은 대문과 방문이 좁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대문도 작고 좁지만 다실로 들어가는 방문은 좁은 정도가 아니라 개집처럼 기어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고 좁은 문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렇듯 흡사 유럽의 고성 투어를 하듯이 옛 성과 옛 정원을 중심으로 돌아본 공업 도시 나고야, 아니 근세기의 오와리 답사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동생의 정원인 우라쿠엔에 있는 국보 다실



일본 근세화 2번 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어난 성은 가지 못했습니다. 성이 없으니 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나고야 시내가 된 나카무라라는 지역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빈농이라 하더라도 그의 생가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라도 있다면 그곳을 어떻게 하든 꾸며놨을 텐데 그의 생가 유적지는 나고야에 있지 않습니다.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영웅의 생가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완벽한 흙수저 출신으로 그 신분을 극복하고 출세를 한 것입니다.


그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인 수드라의 직업이라 할 수 있는 부잣집 변소의 똥을 퍼 나르는 변소지기에서 시작해 좌판을 깐 바늘 장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오다 가문에 겨우 취직을 해서 주방을 담당하고 이어서 마구간 담당으로 승진을 해 주인인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띈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말들을 담당하니 그와 대면할 기회가 많아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뛰어난 업무 능력과 임기응변이 빛을 본 것입니다. 그는 그날그날 날씨와 이동 거리에 맞춰 말의 컨디션을 보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최상의 말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출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교토에서 급작스레 죽게 되자 주군을 배신하고 변을 일으킨 경쟁자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고 1590년 일본을 통일하였습니다.


전국 시대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1537~1598)


하지만 천한 신분으로 인해 천황으로부터 쇼군직을 받을 수 없던 그는 관백과 태합이란 직책으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8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때 그가 한 가장 큰 일은 조선을 침공한 우리의 임진왜란이었습니다. 쇼군은 겐지라 불리는 귀족 혈통만이 될 수 있었기에 그는 쇼군은 되지 못했으나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결혼이나 입양을 통해서 혈통을 바꾸어서라도 쇼군이 되고 도요토미 막부를 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실각한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양자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1592년에 주도한 임진왜란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만약 그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내정에 전념해 후계 구도를 튼튼히 했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임진왜란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출정하지 않고 그 기간 동안 멀리 동쪽 에도에서 힘을 비축한 그였습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를 열었다면 나고야에 성이 없던 그였기에 그는 그가 애정하는 오사카 성에서 오사카 막부를 열었을 것입니다.  



일본 근세화 3번 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출신 성분으로 치면 오다 노부나가는 금수저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 못 미치는 은수저, 아니 동수저 정도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둘이 태어난 성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다 가문의 나고야 성과 도쿠가와 가문의 오카자키 성은 사이즈 면에서 봐도 확연하게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고야 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막부를 연 후 축성을 해서 더 번듯하게 규모를 키우기는 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본성을 오와리 내 기요스 성으로 옮겨 가 폐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천수각 공사는 임진왜란 시 조선에 출병했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담당하였습니다.


전국 시대 최후의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오다 가문에 가서 2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시 더 힘이 세었던 슨푸 성(시즈오카)의 다이묘인 이마가와 가문에서 8세부터 19세까지 11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두 가문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며 살았던 도쿠가와 가문이었기에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이렇게 긴 인질 생활을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생존의 처세술과 불사의 인내심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는 오와리에서 먼 동쪽의 에도로 분가해 쇼군이 된 후에도 일본 중앙에 위치한 나고야 성의 전략적인 중요도를 알기에 신판 다이묘라 불리는 도쿠가와 가문의 친족들 중에서도 똑똑한 아들에게만 그 성을 승계하고 오와리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로 임명하게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는 이곳에 먼저 올린 <도쿠가와 막부의 시작과 끝 슨푸(시즈오카)>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근세화 1번 타자 오다 노부나가


누가 뭐래도 오와리의 맹주는 오다 노부나가입니다. 그는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 시대 일본의 중앙에서 일본의 근세화의 포문을 연 선각자라 할 것입니다. 용맹스러운 사무라이로서 뛰어난 남성 리더십으로 조직 내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장악했지만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일개 말 관리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발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이루어냈으니까요. 천민 출신이라 배경과 교육이 없고 인맥도 없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잘난 주군인 노부나가를 따르고 흉내를 내면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문맹자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외부 세계의 선진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임에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인이 전해준 조총을 그의 군대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에 그는 다른 다이묘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서양의 종교인 카톨릭도 그는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고 장려까지 하였습니다. 커나가는 불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다이묘들 중에선 카톨릭 신자가 꽤나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시 포르투갈 신부들이 미사를 위해 조선에 함께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과 명나라, 필리핀, 인도 정복 계획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수립한 세계 정복의 로드맵을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서양식 갑옷을 즐겨 입는 등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이라는 우물 안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실행하였습니다. 원칙을 중시하면서 진보적인 가운데 유와 강을 적절히 구사했던 그였습니다. 그에게서 300여 년 후인 메이지 유신기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을 배우자는 유신 개혁파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본 근세화와 통일의 선구자 오다 노부나가 (1534~1582)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구체제라 할 수 있는 무로마치 막부를 무력으로 종식시켰습니다. 1573년 그나마 교토 지역에서만 권력이 통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쫓아내고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그가 죽음으로서 더 빠르게 근대화를 진행할 수도 있었던 일본의 문은 다시 닫혔습니다. 그래서 만약 파격적인 그가 통일을 하였다면 일본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라는 문제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가 허용했던 카톨릭을 전면 금지하고 탄압했습니다. 그 금지령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될 때까지 유효하여 일본 땅에서 카톨릭 사제와 신도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일본을 출입하던 서양의 배들도 규슈 나가사키 한 곳만을 통해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와리에서 오사카로, 에도로..


일본 중앙에 위치한 오와리에 16세기 중엽 영웅 트리오가 있었습니다. 맏형 격인 오다 노부나가가 1번 타자로 그는 통일이라는 쌀을 씻고 가장 먼저 통일에 근접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허망하게 통일의 문턱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48세였습니다. 그보다 3세 어린 그의 측근 2번 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일본을 통일하였습니다.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쌀만 씻어만 놓고 짓지 못한 밥을 그가 지어서 완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일으킨 7년 전쟁인 임진왜란 중에 죽음으로서 그가 지은 밥을 제대로 먹지는 못했습니다. 61세였습니다. 그보다 6년 어린 가신이자 정적인 3번 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에 이어서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통일은 되어 있었느니 비교적 손쉽게 달성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대세가 넘어간 상태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성 전투를 통해 그를 반대하는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 주업이었으니까요. 그 일엔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제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먼저 간 주군들이 애써서 쌀을 씻고 지어 놓은 밥을 혼자서 맛있게 먹게 되었습니다. 속된 말로 숟가락만 들고 죽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최후의 승자가 된 것입니다. 아, 일본이니 젓가락이란 표현이 맞겠습니다. 그를 두견새마저 안 울고는 지쳐서 못 버티게 만드는 인내의 표상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1603년 에도에 막부를 개창한 그는 2년 만인 1605년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의 정치적 고향인 슨푸로 내려가 상왕인 오고쇼란 자격으로 살다가 당시로서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습니다. 73세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들 트리오는 모두 오와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기업을 이룬 후 각자의 본거지는 오와리, 오사카, 에도로 달라졌고, 죽음 또한 교토(혼노지 사찰), 교토(후시미 성), 시즈오카(슨푸 성)로 다른 곳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이렇듯 전국 시대 그들의 출현으로 고대부터 교토와 나라 등 간사이(西) 지방이 중심이었던 일본의 역사는 동쪽의 간토(関東) 지방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읍지인 간토 지방의 에도(도쿄)와 경제 중심지로 성장한 간사이 지방의 오사카가 일본 1, 2위의 양대 도시로 균형을 맞추며 발전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 것입니다. 오와리를 떠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역사의 영웅 트리오가 키운 도시 트리오 (출처, 구글맵)


과거엔 오와리라 불렸고 일본 중앙에 있어 별칭으로는 주코(中京)라 불리는 나고야는 현재 일본 3위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전국 시대 영웅 트리오가 지역 기반으로 삼았던 도시들이 모두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랭킹 1, 2, 3 도시들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만약 오와리의 맹주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죽지 않고 통일을 이루었다면 이 세 도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살아있을 땐 단순한 권력 쟁탈전이었을지 몰라도 사후엔 일본의 지정학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국 시대 트리오였습니다.   




https://youtu.be/5tBRUCwB9js?si=HIAR7kzgPtJ_kx_j






작가의 이전글 성공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