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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Nov 04. 2023

국부(國父)가 이름이 된 남자 케말 아타튀르크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

빨강 하늘에 하얗게 뜬 초승달과 샛별, 어둠을 밝히고 방향을 정해준 그 달과 별은 과거 그들의 조상에게 예지와 승리를 안겨준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그것이 네모난 깃발이 되고 대형 걸개 휘장이 되어 그들이 사는 나라 사방천지 온 세상에 물결쳤습니다. 지난 10월 말 유럽의 동쪽 끝 이스탄불을 출발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들어와 시계 방향으로 아나폴리아라 불리던 그 땅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이스탄불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천 km 이상의 거리를 달리며 내내 본 그 깃발과 휘장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도, 도시와 도시 사이 시골을 달려가도, 유적지와 어트랙션이 있는 관광지를 방문해도, 황량하고 기괴한 석회암 지대를 지나가도 건물이나 구조물, 또는 집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보였던 그 달과 별이었습니다. 제가 돌아본 그 나라는 튀르키예이고 그렇게 달과 별이 들어있는 기는 월성기(月星旗)라 불리는 튀르키예의 국기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건 그 국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국기 옆엔 어김없이 한 남자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휘장도 함께 보였습니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이렇게 그의 얼굴이 월성기와 한 세트로 튀르키예 전체를 도배하듯이 덮고 있는 것은 지난 10월 29일이 바로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튀르키예(터키)는 1923년 10월 29일 새로운 국호로 공화국을 선포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 이전까지 그 나라는 칼리프제의 엄격한 이슬람 국가로 술탄이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튀르키예는 지금도 전 국민의 99프로가 무슬림인 이슬람 국가이긴 합니다.


건국 100주년일을 앞두고 전국 전역에 월성기와 케말 아타튀르크의 기를 게양한 튀르키예


국가가 세워진 건국 100주년일이니 그 이전부터 축제 무드로 온 나라에 국기가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제가 방문 시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좁은 해로인 보스포루스 해협 바다에선 화려한 요트 대회가 열리고 이스탄불 시내에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다운타운 중심가에선 건국 100주년을 축하하는 밴드의 축하 공연이 열리고 다수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소에서조차 국기와 함께 케말 아타튀르크의 초상이 항상 같이 걸려있는 것이 제 눈엔 매우 이례적으로 보였습니다. 밴드의 공연에선 군가도 연주되었는데 그 노래는 케말 아타튀르크가 진군 시 불렀던 곡이라고 합니다. 물론 거리에 모인 군중들도 따라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케말 아타튀르크의 모습은 거리에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호텔에 들어와 TV를 켜도 월성기와 함께 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내용과 상관없이 자막 형태로 모니터 상단에 그의 초상이 고정 노출되고 있었는데 설마 하며 채널을 전부 다 돌려봤는데 어김없이 그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를 건국한 국부를 동일시하고 있는 나라인 튀르키예입니다. 또한 지갑을 열면 낯선 돈이지만 다양한 그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 지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튀르키예의 모든 단위의 리라 화폐엔 그 한 사람의 모습만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시라도 그를 안 보고는 살 수 없는 나라인 것입니다.


건국 100주년일을 기념하여 TV의 모든 채널에 자막으로 월성기와 케말 아타튀르크를 송출한 튀르키예


지금은 신공항이 열려 화물 전용 공항으로 바뀌었지만 이전까지 아중동 유럽의 대형 허브 역할을 한 이스탄불의 공항 이름도 아타튀르크입니다. 그리고 지난 6월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린 이스탄불의 특급 구장의 이름도 아타튀르크 올림픽 스타디움입니다. 온 유럽을 흥분시킨 그 경기에선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가 이탈리아의 인터 밀란을 1대 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렇듯 초대 대통령에 대한 범국가, 범국민적인 추앙과 떠받듦은 건국일과 국부 논쟁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간 여행객인 제 눈엔 무척이나 생경하고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튀르키예가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면 모를까요. 하지만 신기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더해만 갔습니다.  


그 국부의 이름이 케말 아타튀르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위인전을 통해서 알았던 그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케말 파샤였고 지속해서 저는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튀르키예의 수도가 이스탄불이 아니고 앙카라로 달달 외웠던 시기입니다. 물론 그땐 튀르키예가 아니고 터키로 불렸습니다. 그 당시 그의 풀 네임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였습니다. 무스타파는 우리 귀에 익숙한 흔한 무슬림의 이름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확인해 보니 케말(Kemal)은 성숙하고 완전하단 의미의 튀르키예어입니다. 어린 시절 수학을 잘하고 또래보다 성숙한 그를 높게 평가한 학교 선생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파샤(Pasha)는 영어의 경(Sir)과 같은 고위 신분을 가리킵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출세한 정치 장교였던 그이기에 나중에 얻은 이름입니다.


더 나중에 얻은 아타튀르크란 이름은 그가 혁명에 성공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34년 국회에서 그의 건국 공로를 인정하여 그 이름의 성으로 헌사한 것입니다. 그는 1938년에 사망했으니 그의 생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즉 무스타파 케말은 이름이고 성이 아타튀르크가 된 것입니다. 대단한 창씨이고 개명입니다. 그래서 현재 그의 풀 네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로 불리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국부(國父)가 이름이 된 남자 케말 아타튀르크 (1881~1938)


아타튀르크(Atatürk)는 튀르키예의 아버지, 즉 국부라는 뜻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호칭이 성으로 이름 속에 박혀버렸으니 그는 영원불멸한 튀르키예의 국부가 되었습니다. 한술 더 떠 이후 튀르키예는 그를 비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형법까지 통과시켰습니다. 그 정도로 훌륭한 국부이니 그를 헐뜯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그는 튀르키예에서 거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것을 국민들이 수용하니 그런 법 제정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죽은지 85년이 지나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란 그의 성은 그가 생존한 1대에만 그쳤습니다.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그 성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녀만 한 명 두었습니다.


대체 국부 이상의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를 위해 어떤 일을 했기에 이 정도로 오늘날 그를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에게조차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1776년 독립으로 독립 250년을 앞둔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부럽지 않은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그는 군인 시절 혁명으로 구체제인 오스만 제국을 타도하고 100년 전 튀르키예를 건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싸우고 무너트린 것은 오스만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국은 이미 망해가서 사망 선고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나마 회생시켜 튀르키예란 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성을 무너트려 기독교도들을 몰아낸 후 10대 술탄인 슐레이만 때엔 전성기를 구가해 지중해를 끼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호령하던 대국이었습니다. 흡사 과거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로 삼고 거대 제국을 이루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그들을 인도하던 초승달은 자라 만월이 되고 케말 아타튀르크가 생존했던 시기엔 그믐달로 쪼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차 세계대전에 독일 편에 서서 패전국이 되며 오스만 제국은 그들의 안위를 영국을 비롯한 승전국의 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과거 동로마 제국과 같은 정교회 국가였던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협상국이라 불린 승전국의 지원 하에 아나폴리아라 불린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자가 바로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참 중인 1915년 지중해 동부 끝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이름을 알린 그였습니다. 하지만 전체 전쟁에선 패했기에 세브르 조약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급격히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가 승전국의 백을 믿고 만만해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그 땅으로 돌진한 것인데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가 선봉에서 그들과 맞서 싸운 것입니다.


건국 100주년일을 기념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스탄불 시민들


튀르키예 독립전쟁(1919~1923)이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입장에선 이슬람인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 서진해 발칸반도를 차지해 온 것이 눈엣가시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해진 틈을 이용해 그리스를 지원하며 유럽 대륙에서 씨를 말리려 했던 것입니다. 마치 십자군 전쟁을 재현하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일제를 몰아내자마자 6.25가 터진 우리나라처럼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또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케말 아타튀르크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이 예상보다 강하게 저항하여 전쟁은 지리멸렬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와 서방의 협상국들은 그 땅에서 철수하며 종전과도 같은 휴전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어진 로잔 조약에서 그들은 1차 세계대전 후 맺은 세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새로워진 오스만 제국이 원하는 영토와 주권을 보장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정전협정 후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할된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는 소득 없이 헛물만을 켠 꼴이 되었습니다. 그때 로잔 조약의 협상 테이블에 나타난 대표는 당연히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아닌 케말 아타튀르크였습니다. 전쟁 중 오스만 제국의 주권은 튀르키예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전쟁 시작 즈음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그에 저항하는 흑해 지방의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그 시위 세력과 오히려 힘을 합쳤습니다. 이에 술탄은 명령 불복한 그에게 궐석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내려 그는 오스칸 제국과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군인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그의 힘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아닌 튀르키예 민주공화국 군인임을 선언하고 이듬해인 1920년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그리스와 독립전쟁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탄불로 진격한 그는 이미 힘이 다 빠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유혈 전투 없이 간단히 제압하여 추방해 버렸습니다. 제국이 강성했던 시절 술탄을 지켜오던 근위대인 예니체리는 이미 부패해서 용맹성이 다 방전된 상태였습니다. 마치 우리 역사 속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선양으로 조선을 건국했듯이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은 1923년 10월 29일 그렇게 튀르키예를 건국하였습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이 쪼그라들었다고는 하나 튀르키예는 우리나라보다 8배나 큰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 넓은 땅에서 8천5백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이 속해있는 유럽 쪽 영토는 오늘날 튀르키예 전 국토의 3프로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 3프로의 유럽엔 튀르키예 전체 인구의 15프로가 살고, 경제력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은 50프로나 되어 나머지 97프로의 아시아 쪽 영토 대비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가 EU 가입을 추진하는 것도, 화폐로 자국의 리라가 있음에도 유로가 통용되는 것도,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프로 축구팀들이 유럽의 프로 축구 리그에 속해있는 것도 다 이 3프로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독립전쟁을 끝낸 로잔 조약에서 케말 아타튀르크의 혜안이 빛나는 영토 협상이 빚은 결과입니다. 그는 에게해 연안의 섬들을 그리스에게 양보하는 대신 이스탄불이 속해있는 유럽 대륙인 동트라키아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튀르키예의 관광 지도. 검은 선은 한국인의 주요 관광 루트 (출처, 참좋은여행)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을 떠나 새로운 수도로 결정한 앙카라는 직사각형 형태를 지닌 튀르키예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독립전쟁 시 그곳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회의를 소집해서 애정이 많이 가는 도시라 그곳을 수도로 정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로마와 오스만 제국의 흔적이 옅은, 오롯이 튀르키예이고 싶은 아나폴리아 내륙에서 그의 시대를 열고 싶어서 천도를 강행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로서 이스탄불은 330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천도한 이후 로마의 신수도인 비잔티움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진 395년부터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1453년 메흐메드 2세가 함락한 후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장장 1593년간 서방 카톨릭 국가, 동방 정교회 국가, 이슬람 국가의 수도로서 화려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탄불이란 도시가 쇠락한 것은 아닙니다.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기독교와 이슬람이 혼재된 2천만 명 인구의 메트로폴리탄으로 여전한 매력을 풍기며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니까요.


초대 대통령이 된 케말 아타튀르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칼리프와 술탄의 신정국가에서 정교를 분리하여 세속화된 국가로 변신시킨 것입니다. 서구식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튀르키예는 위에 언급했듯이 99프로의 국민이 이슬람교도이지만 종교색이 옅어 통상적인 중동의 이슬람 국가와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케말 아타튀르크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여성들은 그들을 가리는 히잡에서 해방되었고 교육도 평등하게 받으며 일찍이 1930년부터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준하여 그는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문맹 퇴치를 위해 복잡한 아랍 문자를 버리고 언어를 개혁하여 현재의 튀르키예 알파벳을 개발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개혁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겐 오늘날까지도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 자신감을 얻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주창하는 것은 이런 케말 아타르튀르크와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2020년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5년부터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변경시킨 이스탄불의 랜드마크인 아야소피아를 다시 오스만 제국의 모스크로 용도 변경하였습니다. 내년인 2024년 1월 15일부터는 그간 무료로 출입했던 외국인에겐 입장료를 받는다는 뉴스도 최근 떴습니다.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가 부작용이 없는 일만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국에 속한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 대학살에 연루되어 있고 가까운 혁명 동지를 떠나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독립전쟁 후 맺어진 로잔 회의에서 자국민이 많이 사는 에게해의 섬 국가인 북키프로스를 사수하지 못해 키프로스 분쟁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란듯이 전 국민적인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도 그렇지만 비난하면 법으로 처벌을 받기도 하니까요.


튀르키예는 우리나라와 역사적인 인연으로 엮여 있어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2018년 이후 두 번째 방문인 올해 10월 방문에서도 변함없이 우리를 환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튀르키예의 조상은 투르크족으로 우리에겐 돌궐족이라 불린 민족입니다. 그들은 삼국시대 우리 고구려와 동맹 관계를 맺고 당나라와 함께 싸운 전력이 있습니다. 그 친분으로 고구려 말기의 실력자인 연개소문의 부인이 돌궐족이란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라시아 전체를 지배한 돌궐족 중 동돌궐족으로 오늘날 튀르키예인의 조상이라 불리는 서돌궐족과는 거리감이 워낙 커 다를 수도 있습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시 유엔 16개 국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참전해 그 친밀감을 더했습니다. 그 연으로 현재 앙카라엔 한국공원이 있고 서울의 여의도엔 앙카라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엔 3,4위전에 만나서 함께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올 초 2월의 동남부 지역 지진 때엔 우리나라가 신속하게 도움을 줘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어김없이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말입니다.


앙카라 한국공원의 야경 모습


중간에 잠깐 언급했던 국부와 건국일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는 건국일인 1923년 10월 29일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전인 독립전쟁 중인 1920년 4월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공화국을 선포하고 국민의회까지 구성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오늘날 튀르키예가 건국일은 우리의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과 같은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독립선언서를 통해 대외에 독립을 공표한 1919년 3월 1일은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0년 4월 23일 앙카라에서 공화국을 선언하고 의회를 소집한 바로 그날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광복회에서 예를 들고 있는 미국의 경우는 동부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1776년 7월 4일을 건국일로 삼고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외에 선포한 날입니다. 당시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독립을 쟁취한 후인 1789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의 아버지가 되어 국부가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보면 미국의 건국일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 시 독립선언서를 공표한 1919년 3월 1일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그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해서 41일 후인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이든 정식이든 의회나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국부의 경우는 튀르키예나 미국이나 독립과 건국 전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수장이 추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엔 역시 또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것만으로만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튀르키예의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나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국부는 한 나라의 건국에 기여한 사람이므로 이후의 행보와 평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각 나라마다 건국과 독립의 역사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건국일을 획일적으로 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건국일은 선택의 문제로 보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위의 국가들과는 다른 콘셉트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진무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 2월 11일을 건국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듯 국가는 존재하는데 그 국가가 세워진 날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에서 말입니다. 모쪼록 우리에게도 분명한 건국일이 제정되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국부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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