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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28. 2023

도쿠가와 막부의 시작과 끝 슨푸(시즈오카)

지난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일본을 여행했습니다. 현지에서 버스가 아니라 철길을 따라 이동하는 기차 여행이었습니다. 시작점은 규슈의 나가사키로 그곳에서 북상하며 혼슈 북단의 아키타까지 종단했습니다. 코로나 영향으로 아직까지 나가사키 공항이 닫혀 있어 후쿠오카 공항을 이용해 기차로 남쪽 나가사키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같은 길로 다시 북상하며 진행한 여행이었습니다. 아마 코로나 이전처럼 규슈 남쪽 끝인 가고시마까지 비행기가 운항을 했더라면 최남단인 그곳을 시작점으로 온전하게 규슈와 혼슈를 종단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간이 되고 여유가 있었다면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완전한 남북 종단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규슈와 혼슈(기타큐슈에서 시모노세키), 혼슈와 홋카이도(아오모리에서 하코다테)는 바닷속 해저 터널로 철도가 연결되어 있어 기차만으로도 여행이 가능합니다.


유럽의 유레일패스처럼 외국인에게만 저렴하게 판매가 혀용되는 JR패스가 있어 가능했던 여행이었습니다. JR패스는 유레일패스처럼 페리 승선도 허용이 되어 둘째 날엔 히로시마 근교 미야지마의 이츠쿠시마섬 바다 위에 떠있는 신사를 답사할 때 JR패스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근대화가 되면서 곧바로 철도망을 촘촘히 구축했기에 고속 열차 신칸센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연계된 기차로 어디든 못 갈 곳이 없는 일본입니다. 그 철도의 위력을 일찍이 알아서인가 일본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절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 지역까지 철도 부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당시 도쿄에서 출발해 기차로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부관페리(관부연락선)를 타고 부산을 거쳐 기차로 경성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6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3일 차에 오사카를 출발한 고속열차 신칸센은 시즈오카현의 시즈오카시에 도착했습니다. 내리지 않고 도쿄까지 바로 갔다면 그 기차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에서 제1의 도시 도쿄까지의 약 500km의 거리를 최단 2시간 27분에 직행했을 것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해 규슈의 남쪽 끝 가고시마에서 홋카이도의 중심지 삿포로까지 검색해 보니 그 거리는 무려 2,300km나 되고 최단 시간이라 해도 기차로는 15시간 30분이나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 전날 만해도 저는 규슈의 나가사키에서 혼슈의 히로시마를 거쳐 오사카까지 720km에 달하는 거리를 기차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거리는 우리나라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를 이어 붙인 남쪽 끝 부산에서 북한의 신의주까지의 거리인 700km와 비슷하니 새삼 길고도 큰 땅을 가진 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길이 없는 곳이라 하여 쳐다보지도 않았던 홋카이도만에도 그 면적이 8만3천제곱km로 우리 남한 면적의 4/5를 상회하니까요.


오사카에서 도쿄까지의 신칸센 철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관된 도시인 나고야, 오카자키, 하마마쓰, 시즈오카를 통과함 (출처, 구글 지도)


오사카에서 단번에 도쿄까지 가지 않고 시즈오카에서 내린 것은 그 도시에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하고 에도에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적지가 있어서 그것을 답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즈오카는 오사카에서 도쿄 방향으로 2/3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그 1/3 지점엔 잘 알려진 나고야가 있습니다. 오사카로 대표되는 간사이(関西) 지방과 도쿄로 대표되는 간토(関東) 지방 사이에 있는 주부(中部) 지방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특히 주부 지방 중 그 두 도시가 있는 아이치현과 시즈오카현은 일본의 동쪽 바다를 끼고 있어 도카이(東海) 지방이라 불립니다. 사실 저는 시즈오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당연히 첫 방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옛 지명이 슨푸라는 것을 듣는 순간 "아, 이곳이 바로 그곳"하며 제 머릿속엔 현재와 과거의 두 지명이 전류가 통해 연결되는 듯했습니다. 제 머릿속에 이름도 요상해 더 잘 기억되어 있는 슨푸성은 전국시대를 휘젓고 다니던 3인방 중 막내 격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로 입력되어 있기에 그랬습니다.


그 시대 나고야가 오와리라 불리고 도쿄가 에도라 불렸던 것처럼 일본 역사엔 이렇게 과거 지명이 빈번하게 등장해 따로 챙겨야 현재 지명과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 내 실권자인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가 일본의 국토지리명을 통째로 바꾼 판적봉환(版籍奉還)과 폐번치현()을 실시한 결과입니다. 판적봉환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중앙의 쇼군과 지방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사람의 지배권을 원 주인인 천황에게 반납하게 한 조치이고, 폐번치현은 그때 다이묘들이 다스렸던 지방 행정의 기본인 번을 폐지하고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현으로 바꾼 정책입니다. 막부 체제 하에서 권세를 누리던 사무라이들을 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대로 세습 권력을 누리며 번주들이 다스렸던 지방은 새로운 구획과 이름으로 정리되며 중앙에서 내려보낸 공무원이 다스리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늘날 아이치현인 나고야 근방의 오카자키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고향에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20대 이전의 유년기와 소년기를 모두 부모 슬하를 떠나 인질로 점철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카자키 성주였던 아버지(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힘이 약한 다이묘라 서쪽으로는 나고야인 오와리국의 맹주인 오다 가문과 동쪽으로는 슨푸의 실력자인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에서 2년을 인질로 잡혀 살고 8세부터 19세까지 11년 동안은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로 잡혀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마가와 가문에 의탁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노예처럼 산 것은 아니고 그들 집안에서 대우를 받으며 학문과 무예를 익히며 힘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이마가와 가문 쪽 여자와 결혼도 하였습니다.


전국시대 3인방의 최종 승자로 쇼군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


이에야스가 첫 인질 생활을 한 오다 가문의 다이묘(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이 바로 전국시대 3인방 중 맏형 격인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노부나가가 8년 위이지만 어릴 때부터 둘이서 잘 알 수밖에 없는 사이입니다. 당시 반역과 배신이 난무하던 전국시대에 이런 인질은 다반사였습니다. 특히 인질의 또 다른 성격인 결혼과 입양도 숱하게 벌어져 각 다이묘 간엔 촌수가 복합적으로 뒤엉켜 따지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에야스의 경우 장남은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켰고 차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냈습니다. 본인은 히데요시의 여동생과도 결혼했습니다. 물론 측실입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새로 주군이 된 히데요시의 결정이기에 결혼을 당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집안에 보낼 여자가 없었는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여동생을 강제로 이혼까지 시키며 그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이에야스는 최초 주군인 이마가와 가문의 다이묘(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노부나가를 스타로 만들어준 그 유명한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죽자 그 가문을 배신하고 독립하여 이런저런 전투를 거치며 승승장구하여 전국시대 3인방의 위치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때 이에야스는 그의 고향인 오카자키보다 그의 성장기를 보낸 슨푸에 애정이 많았는지 그곳을 안방으로 삼아 힘을 키워갔습니다. 오카자키성을 비롯해 그 도시와 슨푸 사이에 있는 하마마쓰성을 본거지로 삼기도 했습니다만 그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슨푸성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슨푸의 이마가와 가문에 의탁하고 숨죽이며 살았는데 그곳에 인질로 잡혀간 아들이 장성해 그곳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에도 입성 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성인 시즈오카의 슨푸성


이에야스는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에도에 새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히데요시가 그를 유일한 위협 세력으로 간주해 그를 가까운 곳에 두지 않고 당시는 촌에 불과한 저 멀리 에도로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곳에서 신도시를 건설하고 힘을 키우며 그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히데요시가 1598년 병사하자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노부나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았듯이 그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의 집권엔 죽은 주군의 아들을 보필해야 하는 가신의 임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배신이 공통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오대로(五大老)라 불리는 5명의 핵심 가신을 불러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가 배신의 선두에 선 것입니다. 결국 이에야스는 1600년 대권의 분수령인 세키가하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고 천하인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선 제가 본지에 기고한 <메이지 유신의 프리퀄 세키가하라 전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1603년 그의 나이 61세 때 이에야스는 교토의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줄여서 쇼군입니다. 그리고 에도에 막부를 열어 일본 정치의 중심을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에서 지금의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으로 옮겨놨습니다. 일본 역사에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 이은 세 번째 막부인 도쿠가와 막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의 슨푸에 대한 애정 지수로 보아선 슨푸에 막부를 열 법도 했지만 그는 그의 이름을 걸고 새로 건설한 에도가 아까웠는지 그곳에 도쿠가와 가문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1590년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음에도 쇼군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신분이 미천해서였습니다. 1192년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 때부터 쇼군은 겐지(源氏)라 불리는 귀족 혈족만이 오를 수 있게 해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그를 쇼군 대신 관백(関白)이라 부르게 했고 이후엔 태합(太閤)으로 스스로 승진을 하였습니다. 근대화기 천한 신분에서 출세해 천황 아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토 히로부미도 불렸던 바로 그 태합입니다. 사실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쇼군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그전에 그가 죽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가 일본 통일 후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 전념했다면 오사카에 도요토미 막부가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에도 막부가 시작된 시기인 17세기의 에도성과 주변 모습


에도에서 쇼군에 오른 이에야스였지만 슨푸에 대한 그의 귀향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과 취임 3년 만인 1605년 그 자리에서 내려와 마음의 고향인 슨푸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슨푸에서 죽을 때까지 11년간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마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 이방원과의 불화로 상왕과 태상왕이 되어 고향인 함흥으로 낙향한 것과 같이 이에야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성계와는 달리 실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의 불화도 없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슨푸성에서 상왕을 뜻하는 오고쇼(所)란 직책으로 그의 가신들을 접견하며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아직도 그가 할 일이 남아서였습니다.


이에야스는 1614년 겨울에서 1615년 여름까지 이어진 오사카 전투를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해 지휘하였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죽은 히데요시를 따르는 다이묘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아직도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가 살아있기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어 후환을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도 승리해 손주 사위였던 히데요리와 그의 모친은 자결을 해 도요토미 가문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장기전이 예상된 공성전이 끝난 것은 이에야스가 화친 조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화친의 조건으로 히데요리 편은 난공불락인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기로 했는데 그 메워진 해자 위 굳은 땅으로 이에야스 군이 입성을 해 항복을 받아낸 것입니다.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3인방 중 인내의 표상으로 곧잘 그려지지만 그 안엔 이처럼 많은 배신과 잔혹, 사기 행각 등을 벌여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오사카 전투의 승리로 마지막 남은 후환인 주군이었던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키고 마음이 놓였는지 그는 1년 후 슨푸성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마치 조선 건국기 태종 이방원이 아들인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예상되는 정적과 외척을 사전에 잔인하게 제거한 것과 같은 이에야스의 행보였습니다.


시즈오카가 된 슨푸에서 방문한 이에야스의 유적지는 그의 무덤이 있는 신사였습니다. 쿠노산에 있어 쿠노산 동조궁이라 불리는 그의 무덤입니다. 하지만 이곳엔 그의 빈 무덤만 있고 실제 그의 유해는 도쿄 북단의 닛코 동조궁에 있습니다. 1616년 죽은 이에야스의 유언에 따라 1년만 슨푸에 있었고 이후 닛코로 이장을 한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 에도 막부가 있는 간토 지방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신으로서 그가 거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동조궁()도, 그가 묘지로 지정한 닛코(日光)도 다 해가 뜨는 동쪽의 햇빛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일본을 비추는 태양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 이에야스를 무척이나 존경한 그의 손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닛코의 동조궁을 크고 화려하게 증축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무려 500여 개의 동조궁을 지었습니다. 지금도 130개 정도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본에서 동조궁이라 이름 붙은 곳이 있다면 그것은 이에야스의 신사입니다. 그의 가묘가 남아있는 시즈오카의 동조궁은 그 기원으로 인해 닛코 동조궁에 이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해가 사후 1년간 묻혀있던 시즈오카의 쿠노산 동조궁. 뒤편 상단 구조물이 묘지임


이에야스의 유해가 1년간 묻혀있었던 시즈오카의 쿠노산 동조궁은 특이하게도 시내에서 니혼다이라라 불리는 구릉지 정상까지 차로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반대편 아래쪽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야 도착하는 위치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시즈오카 시내에서 니혼다이라 너머 반대편 쿠노산까지는 차로 돌아가기엔 거리가 멀어 그 구릉지를 가로질러 올라가서 내려가는 코스로 개발한 듯합니다. 아마 그 동조궁의 어려운 위치는 그 이름에 맞춰 일본의 동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조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는 길인 니혼다이라 구릉지에선 저 멀리 후지산이 보였습니다. 날이 안 받쳐주어 희고 뾰족한 정상까지는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3,776m에 달하는 거산의 위용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거 슨푸 시절 이에야스는 그 산을 매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과거 영산이라 불리는 후지산은 여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되면서 비로소 입산이 허용되었습니다.


맑은 날 시즈오카의 니혼다이라 호텔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과 80km 밖 후지산의 모습 (출처, 니혼다이라 호텔)


이에야스의 유해가 1617년 슨푸를 떠난 후 251년이 지난 1868년 그가 살았던 슨푸에 또 한 명의 쇼군이 입주하였습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의 15대 쇼군으로 마지막 쇼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였습니다. 1867년 유신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고 천황에게 실권을 넘겨준 대정봉환의 당사자입니다. 그해 10월 그는 교토의 천황에게 쇼군의 사직서를 제출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동시에 이에야스가 창업한 도쿠가와 막부도 끝이 났습니다. 요시노부가 30세에 쇼군에 오른지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7월 그의 거처는 그 가문의 뿌리와도 같은 슨푸성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가 살던 도쿄의 에도 성터엔 오늘날 천황궁이라 불리는 황거가 들어섰습니다.


요시노부는 폐번치현으로 슨푸에서 시즈오카로 이름이 바뀐 곳에서 그의 꼭대기 할아버지인 이에야스와는 달리 말 그대로 은퇴생활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에야스와는 달리 상왕인 오고쇼가 될 수도 없었고, 아무 권력도 없었으며,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까요. 시즈오카에서 그는 유신 정부에서 주는 연금을 받으며 개화기 서양 문물인 자전거를 타고 차밭을 가꾸며 사냥, 낚시, 바둑, 그림, 당구, 사진 등을 즐기며 팔자 좋게 살았습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 그를 옹립하고자 하는 막부파들이 보신전쟁을 일으켜 잠시 난감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사면을 받아서 활동엔 제약이 없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1837~1913)의 막부 시절 쇼군의 모습과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의 모습  


그는 시즈오카에서 29년간 그렇게 야인 생활을 하다가 환갑이 되던 해인 1897년 본래 그가 살았던 에도에서 이름이 바뀐 도쿄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돌려준 메이지 천황이 하사한 공작 작위를 받고 우아하게 살다가 1913년 76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정치적 부담이 없어서인가 도쿠가와 가문이 낸 15명의 쇼군들 중 가장 장수한 요시노부였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존왕양이를 주장하며 그를 몰아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지사들인 사카모토 료마는 암살(1867)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할복(1877)으로, 기도 다카요시는 지병(1877)으로, 오쿠보 도시미치는 암살(1878)로 일찍 죽어 메이지 유신을 다 보지 못했지만 구체제의 상징인 쇼군 요시노부는 그것은 다 구경하고도 한참을 더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통상 메이지 유신의 기간은 1868년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작성한 일본 제국주의 헌법이 공표된 1889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렇듯 과거 슨푸였던 시즈오카는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쇼군인 이에야스와 마지막 쇼군인 요시노부가 쇼군으로 올라가기 전과 쇼군에서 내려온 후 장기간 거주하여, 가히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하겠습니다. 마치 264년간 이어진 에도 막부의 앞과 뒤에서 웅장한 서막을 알리고 조용히 정리를 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할을 한 도시로 여겨집니다. 물론 존재감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천하인 이에야스가 요시노부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에도로 쫓아내지 않았다면 그는 에도가 아닌 슨푸에서 막부를 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에야스의 연고가 없던 에도는 아예 개발되지도 않았을 테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도쿄도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수도나 큰 도시가 되지 못했겠지요. 아울러 교토(京都) 동쪽의 도읍지라는 뜻의 도쿄(東京)라는 이름도 못 가졌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설은 무의미하다지만 상상은 자유이니 그것만으로도 재미있고 가당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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