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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14. 2023

일본 근대화의 첨병 해군

사카모토 료마와 해원대

규슈의 나가사키는 17세기부터 일본에서 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라 불렸습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도쿄)에 무사정권인 막부를 열면서 서양의 배들은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를 통해서만이 일본에 들어올 수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당시 막부는 그 항구의 사용권을 네덜란드와 독점으로 계약하여 서양의 문명과 물자는 네덜란드의 꼬리표를 달고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식자층에서 유행했던 서양의 학문이 난학(蘭學)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 시절 동양에 온 네덜란드인들은 과거 네덜란드가 독립국 지위를 얻기 전 거점 지역인 홀란드 출신이라고 본인들을 소개했는데 일본인들은 그 홀란드를 오란다라 불렀고 한자로는 화란(和蘭)으로 쓴 것에서 난학은 유래했습니다. 그렇게 서양을 대표하는 네덜란드인들이 오갔던 나가사키의 고지대에 올라 그 도시를 내려다보면 지리적으로 그곳이 외부 세계와 교류하는데 유리한 천혜의 항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수심 깊은 바다가 도시 안까지 깊숙이 밀려 들어와 있으니까요. 이후 개화기 시절 그 언덕엔 많은 서양인들이 몰려와 서양식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구라바엔(グラバー園)이라 불리는 지역입니다.    


일본의 개화기는 일본의 개항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스스로 내부에서 자력으로 단기간에 근대적인 변화를 일으키긴 쉽지 않으니 외세의 힘이 작용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외세는 당연히 서양입니다. 그런 서양의 파고가 몰려왔던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선 그 조짐을 먼저 깨달은 개화파 선각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일본이 서양과 대등한 근대 국가가 되기 위해선 우물 안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시다 쇼인과 후쿠사와 유키치였습니다. 1850년대 요시다 쇼인이 주창한 정한론(征韓論)이나 1880년대 후쿠사와 유키치가 기고한 탈아론(脫亞論)은 극동의 바다에 고립된 섬나라 일본이 대륙과 대양으로 진출해 아시아권에서 벗어나고 세계적인 국가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에게 군사력은 필수였으며 그중에서도 해군력은 가장 중요한 전력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야 대륙에 닿을 수 있고 대양을 지나야 아시아를 벗어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일본의 선각자들이 그렇게 마음을 먹은 데에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몰고 온 흑선(黑船) 함대의 영향이 무엇보다도 컸을 것입니다. 당시 대포를 장착한 2천5백 톤의 거대한 증기 철선인 흑선의 모양과 위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도쿠가와 막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두 차례에 걸쳐 에도 앞바다에 출몰한 그 흑선에 굴복한 막부는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연 후 정확히 250년간 굳건히 닫혀 있던 일본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유일한 창구였던 나가사키의 조그만 인공섬 데지마에서 벗어나 일본 전역인 시모다, 가나가와, 하코다테, 니이가타, 효고, 나가사키 등의 메인 항구에 네덜란드만이 아닌 모든 서양 배들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이어진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의 결과입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자격으로 흑선을 몰고 와 일본을 개항시킨 메튜 페리 제독 (1794~1858)


일본의 개항은 도쿠가와 막부에겐 항복과도 같은 굴욕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페리 제독은 주저하는 막부의 쇼군에게 협박과도 같은 전쟁 압박을 가하기도 했으니까요. 결국 막부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이런 불평등한 개항은 개혁파들에게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주게 됩니다. 막부를 무너트리고 천황을 옹립하여 외세인 서양을 몰아내자는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운동의 선두에 위의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이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1867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교토에 있는 메이지 천황이 에도로 와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도쿠가와 막부를 상징하는 에도(江戶)는 도쿄(東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천황이 살던 교토(京都)의 동쪽에 있는 도읍지라는 뜻입니다. 일본은 이렇게 미국의 흑선이 에도 앞바다에 뜬 지 15년 만에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막부의 해군력이 미국의 흑선을 압도했다면 일본의 개항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 메이지 유신도 모를 일입니다.


1853년 에도 앞바다에 떠있던 그 흑선을 유의 깊게 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에도 막부의 가신인 가쓰 가이슈입니다. 훗날 그는 유신 개혁파들이 에도 막부의 지휘부를 향해 군사를 몰고 들어올 때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반막부파의 수장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이에서 중재를 맡아 유혈충돌 없이 대정봉환을 성사시킨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막부파 내 메이지 유신의 일등공신입니다. 그는 에도 출신이므로 자연스레 그 흑선이 떠있는 것을 한동안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현장을 바라보며 해양방위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이후 그의 진로를 바꾸게 하였습니다. 근대화로 가는 일본 해군의 최고위급 인사가 된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훗날 그는 메이지 유신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 사쓰마번(가고시마현)과 조슈번(야마구치현)이 손을 잡은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인물입니다. 그가 성사시킨 삿초동맹으로 인해 그 연합 세력에 위협을 느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권력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시코쿠의 도사번(고치현) 출신인 그는 에도에 검술 유학 시절인 10대 후반 에도의 파견 경비대에서 복무를 하며 그 흑선을 목격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흑선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해군력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일본 최초의 근대 해군이라 불리는 해원대(海援隊, 가이엔타이)를 창설한 것입니다.


삿초동맹의 성사자로 일본 근대화의 대표적인 유신 지사가 된 사카모토 료마 (1836~1867)


사실 그 흑선과 연루된 또 한 명의 유명 인사가 있습니다. 위의 정한론과 존왕양이를 주창한 일본 보수의 혼이라고 불리는 요시다 쇼인입니다. 조슈번 출신인 그는 그 배에 잠입하여 미국으로 밀항까지 하려 했다가 발각되어 하선을 하고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정도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큰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돌아가 고향인 조슈번의 하기라는 조그만 마을에 송하촌숙(松下村塾, 쇼카손주쿠)이라는 학교를 열었는데 기라성 같은 그의 제자들은 훗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유신을 촉발한 다카스기 신사쿠와 기도 다카요시, 유신 1세대 후 집권하여 우리나라에게 많은 아픔을 준 만능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와 군국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군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그의 제자였습니다.


도사번 시골의 하급 무사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와 에도 막부 정부의 고위 관료 집안 출신인 가쓰 가이슈, 출신과 배경이 다른 이 두 사람은 애국심과 지향점이 같아서인가 1862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스승과 제자 관계로 친밀한 사제의 연을 맺게 됩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13년 연상인 그에게 서양 문물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쓰 가이슈는 사카모토 료마에게 스승이자 족쇄와도 같은 탈번(脫藩)의 죄를 면하게 해준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번주의 허가 없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는 탈번은 중범죄에 해당됐는데 가쓰 가이슈가 도사번의 번주에게 힘을 써 그런 상황에 처해있던 사카모토 료마를 구제해 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해군력 배양이라는 같은 생각을 공동의 방식으로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서 최종 목표인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을 향해 달려갑니다.


1853년 미국의 흑선을 보고 놀란 도쿠가와 막부 역시 해군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막부는 1855년 나가사키에 서양식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해군전습소를 세웁니다. 가쓰 가이슈는 그가 작성한 해양방위 보고서를 유심히 본 막부에 의해 그곳에 감독관으로 보내져 감독 임무를 수행하며 교육도 받았습니다. 나가사키에 해군전습소가 생긴 것은 그곳에 네덜란드인들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천혜의 항구이기에 해군 교육기관이 자리하기에는 최적의 위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해군전습소에 파견된 가쓰 가이슈는 본래부터 난학에 능했기에 네덜란드 교관의 통역을 맡으며 3년 반 동안 난학과 항해술, 과학 등을 감독하며 배웠습니다. 하지만 막부의 이 해군전습소는 1859년 폐쇄되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으로 메이지 유신의 막부 측 공신인 가쓰 가이슈 (1823~1899)


이후 1862년 가쓰 가이슈는 막부 내 해군 최고 직위인 군함봉행(軍艦奉行)에 오르며 일본의 모든 해군 정책을 총괄하게 됩니다. 군함 제작까지도 맡는 자리였습니다. 그 전인 1860년에 그는 함장으로 일본 최초로 배를 몰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세계에 일본의 항해술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는 항해였습니다. 군함봉행으로 있으면서 그는 1864년 효고현의 고베에 해군훈련소를 세웁니다. 오사카에서 가까운 고베항의 전략적 위치를 높게 보고 그곳에 해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막부의 자제들뿐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그 학교를 개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군학교의 설립엔 에도에서 흑선을 목격했던 사카모토 료마도 함께 했습니다. 그가 스승의 지시로 오늘날 후쿠이현의 번주에게 모자라는 학교 설립 자금을 빌려온 것입니다. 과연 그로부터 2년 후인 1866년 삿초동맹을 성사시킨 설득과 현상의 달인답게 그는 그 일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고베 해군훈련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군훈련소는 막부의 심기를 건드린 가쓰 가이슈의 파직으로 인해 1865년 해산되어 사카모토 료마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설립자인 가쓰 가이슈는 1866년 막부의 부름으로 복직되어 다시 에도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일본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역사 인물인 사카모토 료마의 홀로서기가 시작됩니다. 가쓰 가이슈에게서

독립한 그는 역시 또 근대적인 해군 양성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는 고베 해군훈련소에서 나온 1865년 그 해 나가사키에 해원대(전신은 가메야마 조합)를 설립했습니다. 나가사키는 이렇게 서양인뿐만이 아니라 일본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도 관심을 가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해원대는 오늘날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는 근대적인 해군 양성뿐만이 아니라 무역 회사 성격도 가진 일종의 군산복합체 성격을 띤 단체였습니다. 그가 사쓰마번의 자금을 지원받아 해원대를 세웠기에 해원대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가사키 가자가시라 공원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의 동상. 그 옆 깃발은 그가 설립한 해원대의 표식 (출처, 나가사키현 관광 홈페이지)


해원대에서 료마는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다양한 일을 하였습니다. 검술에 능한 사무라이 출신답게 해군으로서 실제 배를 타고 조슈번과 막부 간에 벌어진 조슈정벌에 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그가 입안한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 불리는 정책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 신정부에서 거의 그대로 채택될 정도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혁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1867년 에도로 가는 배 위에서 세운 정책입니다. 그 8가지 정책 안엔 역시 또 그의 신념이기도 한 해군 양성도 들어가 있습니다. 생전에 그가 한 일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받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삿초동맹도 해원대 시절인 1866년 이루어진 일입니다. 서로 대립해 오던 두 번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는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유신 3걸을 만나러 다닐 때 해원대 대장이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1867년 말 그가 죽은 이듬해인 1868년 해원대는 해산되었습니다.  


해원대 시절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근대화에 위에 등장한 인사들과는 다르게 기여한 두 명의 인사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이와사키 야타로로 그는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도사번 출신입니다. 그는 나가사키에 무역상으로 와있었는데 그곳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만나 친분을 나누며 서로의 사업을 진전시켰습니다. 넓은 일본땅 전역을 돌며 활동하던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 내에서 작고 마이너한 지역인 시코쿠의 도사번 사람을 만났으니 그에게 이와사키 야타로는 꽤나 반가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아 둘은 고향 친구처럼 서로 친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카모토 료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해원대가 해체된 후 이와사키 야타로는 그의 고향 사업체에 해원대의 일부를 합체해 1870년 독자적인 기업을 세우게 됩니다. 그 회사가 바로 그 유명한 미쓰비시입니다.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자가 사카모토 료마의 고향 친구였던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과 함께 창업한 미쓰비시는 이후 유신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정경유착의 표본이 되어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최대 기업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와사키 야타로는 해원대 해산 후 그 대원들을 미쓰비시의 직원으로 모두 흡수하였습니다. 이렇듯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엔 유신 지사 사카모토 료마의 이름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동향 출신인 미쓰비시 그룹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1834~1885)


사카모토 료마가 해원대 시절 만난 또 한 명의 인사는 이 글 처음에 등장하는 구라바엔에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던 토마스 글로버라는 영국인입니다. 그가 설립한 글로벌 상회는 해원대와 거래하며 일본의 근대화에 적잖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단 글로버는 서양의 앞선 무기를 해원대에 공급해 주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그 무기를 사쓰마번의 이름으로 무기가 필요한 조슈번에 공급하고 쌀농사가 없는 사쓰마번엔 조슈번의 쌀을 공급하는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서로 강대 강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연합한 삿초동맹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메워준 료마의 지략이 통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무역 파트너였던 글로버는 일본의 인재 양성에도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는 조슈 5걸이라 불리는 조슈번의 젊은이들과 사쓰마번의 젊은 인재 19명의 영국 유학을 주선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유학원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들 유학생들은 돌아와 모두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도 그들 중 하나로 그는 조슈 5걸의 멤버였습니다. 글로버는 또 사카모토 료마를 통해 알게 된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와의 인연으로 미쓰비시 그룹의 간부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이 모여있어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구라바엔은 글로버의 일본식 이름에 정원(Glover Garden)을 결합한 것입니다. 그 시기 그 동네엔 오페라 속이지만 풋치니의 나비부인도 살았습니다. 그녀 초초상은 구라바엔 언덕 위 집에서 매일 항구를 내려다보며 미국으로 떠난 애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해외 무역 파트너 토마스 글로버 (1838~1911)


사카모토 료마는 그가 세운 해원대에서 3년간 복무하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불꽃같이 살다 간 그의 인생을 가장 화려하게 불태운 기간입니다.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을 위해 그의 한 몸을 바쳤으니까요. 그리고 31세의 젊은 나이에 자객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사무라이다운 죽음입니다. 그의 죽음에 누가 관여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적대적인 반대 위치의 막부파나 무혈의 평화로운 방법을 선택하는 그의 일처리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 내 과격파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1867년 대정봉환 한 달 후인 12월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달 후인 1868년 근대화된 일본인 메이지 유신의 해가 밝았습니다.


메이지 유신기 일본은 사카모토 료마의 염원대로 해군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여 해양강국으로 우뚝 올라섰습니다. 19세기 후반 일본이 가장 자랑하던 수출품인 도자기를 유럽의 만국박람회에 가서 팔면 돌아오는 길에 그 판매 대금으로 군함을 사 갖고 올 정도로 해군력 배양에 공을 들인 결과입니다. 일본은 서양에 700만 점에 달하는 도자기를 팔았는데 그 도자기는 임진왜란 후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만든 도자기가 일본이 군사대국으로 가는 데에 일조하여 일본이 또 조선을 침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입니다.


1894년 일본은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지루하게 경쟁해 오던 청나라를 조선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일본의 해군은 조선 앞바다에서 청이 자랑하는 북양함대를 물리치고 청의 본토인 웨이하이의 해군 기지까지 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1904년 러시아와 벌인 러일전쟁에선 아시아에 정박한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물론 멀리 유럽의 발트해에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3만 km를 돌아서 온 전통의 발틱함대까지 모두 박살내어 그들을 조선(대한제국)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아시아의 대국 중국에 이어 유럽의 대국 러시아에게까지 승리한 것입니다. 이제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는 일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개화기 요시다 쇼인과 후쿠사와 유키치가 주장했던 정한론과 탈아론이 모두 실현된 것입니다.


이윽고 1941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발을 감행합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것입니다. 전투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침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투기들을 태평양을 횡단해 하와이 근처까지 싣고 간 일본의 해군력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해군력의 첨단이자 핵심인 항공모함의 숫자와 기술력이 미국을 능가했기에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맞설 정도로 항공모함을 개발하기 이전에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의 전함들을 격파할 때 그들은 1853년 에도 앞바다에 뜬 미국의 흑선을 경외감으로 바라보고 굴복했던 과거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예상과 달리 미국은 단기간에 항공모함 전력을 극대화해 이어진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 일본에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맨해튼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트려 태평양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동시에 끝내버렸습니다. 공교롭게도 1945년 8월 9일 마지막 원폭인 팻맨(Fat Man)이 떨어진 도시는 개화기 가쓰 가이슈의 해군전습소와 사카모토 료마의 해원대가 있었던 나가사키였습니다. 그 도시에 일본의 전함을 건조하고 보수하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나가사키의 구라바엔 언덕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그 조선소의 거대한 크레인이 눈에 들어옵니다.


구라바엔 언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항구 나가사키 전경. 우측 위로 미쓰비시 중공업이 보임

     


* 일본 근대화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제가 이곳에서 5회에 걸쳐 연재한 <일본 근대화의 기수>에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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