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바밤 빠바밤 빰빰밤바 빠바바바빰바밤!" 이것은 멜로디의 높낮이와 길이는 없지만 실제 연주를 제대로 들어보면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한 곡입니다. 그 곡을 나팔로 안 불고 제 입으로 불고 옮겨 적은 것입니다. 오선지 악보가 없던 시절엔 이렇게 기보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곡은 매년 1월 1일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고풍스러운 콘서트홀에서,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의 지휘에 맞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음속보다도 빠른 속도로 전 세계 90여 개 국가로 울려 퍼집니다. 힌트가 되셨나요? 그 콘서트홀은 빈 음악 협의체의 음악당을 뜻하는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이며, 2024년 올해의 지휘자는 독일인인 크리스티안 틸레만이었고, 그 오케스트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빈 필하모닉입니다. 지휘자의 경우 연도를 특정한 것은 빈 필하모닉은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매년 열리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지휘자는 달라집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입니다. 이 곡이 다른 곡과는 달리 매년 연주되는 것은 그 음악회의 엔딩 앙코르 곡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구상에 존재하는 행진곡들 중에, 아니 최고 권위의 교향곡까지 포함시켜 전 음악을 통 털어 가장 호사를 누리는 곡을 꼽으라면 이 <라데츠키>일 것입니다. 통상 행진곡(march)이라면 학교와 군대에서 사기 진작과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행사와 행진용으로 주로 브라스 밴드로 편성되어, 연주 장소도 음향 시설이 잘 갖춰진 콘서트홀이 아닌 행사장 또는 야외인 연병장이나 운동장에서 연주되곤 하는데, <라데츠키> 행진곡은 브라스가 아닌 풀 편성된 오케스트라에서, 그것도 수준급 오케스트라의 수준급 연주자가 애지중지하는 비싼 악기로, 매년 세계 음악의 수도 빈에서, 콘서트홀에 온 관객뿐이 아닌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연주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매년 1월 1일 빈의 무지크페라인에서 열리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2014. 지휘자 바렌보임)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연주된다는 것은 빈의 그 음악당에 가지 않고서도 그 신년음악회를 리얼 타임으로 즐길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마치 TV 생방송으로 스포츠 중계를 보듯이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선 2013년부터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메가박스에서 그 음악회를 실황 중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그 음악회의 인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제가 갔던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의 경우 무려 8개 관에서 그 음악회를 상영했으니까요. 제가 이르게 예매를 했을 때엔 관 수가 적었는데 예매가 폭주하니 상영관을 대폭 늘린 것입니다. 1회성 반짝이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를 능가하는 인기라 할 것입니다.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희소성과 브랜드 가치에 더해 온 가족이 모이는 1월 1일 휴일, 우리 시간대로 저녁에 가성비 높은 호사를 누린다고 생각해 그렇게 많은 관객이 몰렸을 것입니다. 물론 빈 현지의 무지크페라인에 앉아있는 관객들은 그 호사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이겠지요. 영화관의 관객들은 그날 스크린 음악회의 마지막 곡으로 나오는 경쾌한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으며 빈의 그들처럼 힘차게 새해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지휘자에 호응하며 그들과 똑같이 박수를 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라데츠키>는 대체 어떤 행진곡이기에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에서 이런 특급 대우를 받고 있을까요?
<라데츠키> 행진곡 연주 시 관객들의 호응 유도를 위한 바렌보임의 익살스러운 지휘 모습 (2014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소싯적에 저는 학교에서 브라스 밴드부를 했고 그 연으로 군대도 군악대를 다녀왔기에 행진곡은 제가 애착이 많이 가는 장르입니다. 모든 연주자가 그러하듯 어떤 곡을 귀로만 감상하는 것과 실제 입과 손발로 실연을 한 곡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라데츠키>도 그 연주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악기를 놓은지 오래됐으니 지금은 위와 같이 입으론 돼도 손은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데츠키>는 처음 접했을 때 같은 행진곡이라도 뭔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귀족적이고 고급지게 느꼈던 것입니다. 아마도 <라데츠키>가 여타 행진곡들과는 달리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브라스 밴드로 넘어온 혈통이 다른 곡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했나 봅니다. 그 곡의 작곡자는 왈츠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니까요.
실제로 <라데츠키> 말고 브라스 밴드(이하 군악대 포함)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행진곡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차르트의 <터키>, 슈베르트의 <군대>, 엘가의 <위풍당당>,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 나오는 <개선>,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쇼팽의 <장송> 행진곡 등은 야외에서 실제 행진 시 거의 연주되지 않으니까요. 주로 실내 오케스트라에서 감상용으로만 연주된다는 것입니다. 아, 바그너와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도 마찬가지겠네요. 이렇게 보면 <라데츠키>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작곡한 행진곡들 중에 브라스 밴드에서 행진용으로 연주되는 거의 유일한 곡이라 할 것입니다. 이때 브라스 밴드라면 통상 트롬본, 트럼펫, 호른, 유포니움 등의 금관악기만 있는 것이 아닌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등의 목관악기와 사이드 드럼, 베이스 드럼, 심벌즈 등의 타악기도 포함된 밴드입니다. 오케스트라 편성에서 현악기와 건반악기가 빠진 구성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군(軍) 축제인 계룡군문화축제의 무대에 선 육해공군 연합 군악대
브라스 밴드 행진곡은 크게 국내에서 만들어진 국산 행진곡과 외국에서 수입한 외산 행진곡으로 나뉩니다. 국산 행진곡으론 우리말인 <태극>, <충정>, <화랑>, <애국>, <타령>, <고향 그리워 & 바위고개>, <방아타령>, <밀양아리랑> 등의 행진곡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우리의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곡들과 우리의 정서가 깃든 민요와 가곡을 행진곡으로 변환한 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합주했던 기억 속의 곡들이기에 지금도 이 곡들이 연주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연주되고 있고 이 리스트에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행진곡이 추가되었을 것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아닌 궁상각치우 음계로 작곡된 우리 고유의 행진곡도 있습니다. 그 곡은 브라스 밴드 악기로는 연주되지 않고 국군의 날이나 외국 VIP 의전 행사 등에 군악대와 함께 보이는 취타대가 연주합니다. 옛날엔 임금이 행차할 때 주로 연주되었겠지요. 우리 군은 육군 군악대 내에 별도의 국악 요원을 두고 있습니다.
행진곡에 외국의 곡이 많은 것은 그것을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의 악기가 모두 서양의 악기라는 점에 기인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일찍이 미군의 영향으로 미국 행진곡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미국엔 행진곡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 필립 수자가 있습니다. 수자는 미국에서 국가 이상으로 연주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비롯하여 <워싱턴 포스트>, <뇌신(Thunderer)>, <맨해튼 비치>, <지성(Semper Fidelis)>, <사관후보생> 등 많은 행진곡을 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작곡했습니다.
과거 초중고교 각종 행사의 음악을 담당한 학내 브라스 밴드부
수자의 특이한 이력은 악기도 발명했다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중 가장 저음인 튜바가 행진하며 연주하기엔 불편하기에 그것을 개조하여 그의 이름을 딴 수자폰을 발명한 것입니다. 통상 브라스 밴드의 마지막 줄에서 어깨 위에 걸치고 연주되는 대형 관악기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첼로, 더블베이스, 하프, 피아노 등의 큰 악기는 행진용으로의 개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행진을 위한 브라스 밴드의 음악이 별도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이 있는 오스트리아엔 합스부르크 왕조의 문장인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를 노래한 <쌍두 독수리 아래에>란 행진곡도 유명합니다. 흔히 <쌍두치>라 줄여서 부르는 곡입니다. 그리고 독일엔 <옛친구>라는 독보적인 행진곡이 있습니다. 제목은 <옛친구>로 소프트하지만 히틀러가 나오는 전쟁 영화에 거의 예외 없이 나오는 곡으로 나치의 군가로도 많이 불리는 곡입니다. 이 곡은 오늘날까지 빈 필하모닉과 쌍벽인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종종 연주되곤 합니다. 오스트리아에 <라데츠키>가 있다면 독일엔 <옛친구>가 있는 것입니다. 둘 다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행진곡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밴드부 때 그 곡 악보를 처음 받았는데 당시 <구우>로 적힌 제목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옛친구>를 한자로 쓴 <구우(舊友)>였습니다. 그땐 그렇게 불렸습니다.
국가적인 배경과는 별개로 영화의 OST로 유명해진 행진곡들도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코넬 보기(보기 대령)> 행진곡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에 나오는 동명의 행진곡으로 이 곡들은 지금도 스크린 밖에서 자주 연주되곤 합니다. 또한 프랑스혁명기 때 만들어진 "행진하라"를 반복하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는 그 자체로 행진곡이라 할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군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벌이는 대규모 시가행진 - 2013년 건군 65주년 국군의 날 (출처, 연합뉴스)
위의 행진곡들은 제목이 생소할 수는 있어도 들어보면 "아하!" 할 곡이 많을 것입니다. 과거 학교 조회 시간에, 그리고 남자의 경우는 군대에서 많이 들어본 곡들일 테니까요.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브라스 밴드의 행진곡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로 번졌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 글의 본류를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제목에서 보듯이 <라데츠키 행진곡>이 아닌 <라데츠키와 행진곡>이니까요. 행진곡 일반도 절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글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데츠키>를 통해서 제가 아는 한 행진곡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라데츠키>로 가겠습니다. 그 곡은 사연이 얽혀있는 행진곡입니다. 이 글의 부제인 전쟁과 혁명이 등장합니다.
* 다음 주말엔 이 글 끝에서 고지한 대로 <라데츠키> 행진곡에 얽혀있는 역사와 정치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나온 다른 곡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