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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May 18. 2024

라데츠키와 행진곡 <하>

전쟁과 혁명이 만든 클래식

<라데츠키>는 왈츠 전문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앞의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의 <터키>나 <군대> 행진곡처럼 순수하게 연주용으로 작곡한 행진곡이 아닙니다. 1848년 그 곡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엔 작곡 의도가 분명한 행진곡이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주변 국가가 처한 국내외적인 상황 하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이 반영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일단 호두까기 인형과 장난감 병정처럼 동화적인 어감을 가진 제목 <라데츠키>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어감과는 달리 호전적인 군인의 이름입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의 모델인 오스트리아의 영웅 라데츠키 원수 (1766~1858)


라데츠키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무관의 최고 지위인 원수까지 오를 정도로 국가에 세운 공이 많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찬양하하기 위해 <라데츠키> 행진곡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체론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의 이름을 딴 이 곡전쟁과 혁명이 개입되어 있어 <라데츠키> 행진곡은 탄생기부터 지금까지도 일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당장 그 곡이 탄생했을 때 작곡자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인 2세와 갈라섰습니다. 아버지는 왕정파였고 아들은 공화파였기에 그랬습니다. 1세는 왈츠의 아버지로, 2세는 왈츠의 왕으로 불려 우아하고 아름다운 왈츠로 묶인 부자이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가 격변과 혼란의 시대였기에 그랬습니다.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한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1804~1849)


그 시작점에 나폴레옹이 있었습니다. 유럽에 혜성 같이 등장한 나폴레옹은 1814년 엘바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의 1차 실각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가 벌려 넣은 유럽의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습니다. 유럽의 질서를 다시 구체제로 돌려놓아 프랑스혁명과 같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발흥하지 못하게 함이었습니다. 모든 국가가 과거처럼 다시 절대왕정 체제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외무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해 9개월에 걸쳐 장기간 진행된 이 회의를 가리켜 빈 회의라 부르고, 이 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을 빈 체제라 부릅니다. 빈 회의는 당시 유럽의 90여 개 군소 국가들이 참여할 정도로 국제적인 회의였습니다. 오늘날 EU나 UN과 같은 국제적인 다자 협의체의 기원이 되는 역사적인 회의였던 것입니다. 당시 전 유럽의 VIP와 그의 시종들이 모인 빈에는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창녀들이 2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빈 회의 기간 중인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유유히 돌아와 다시 집권하였습니다. 빈 회의에 모인 인사들은 일순 긴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해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완전히 실각하면서 그의 집권은 백일천하로 끝이 났습니다. 빈에 모인 인사들은 다시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유럽은 다시 구체제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한번 흐름을 탄 반동의 물결은 사그라들지 않아 프랑스에선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났고 1848년엔 2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개월 후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를 무너트린 혁명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주인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당연히 그 민중혁명을 탄압했습니다.


이때 나온 행진곡이 <라데츠키>입니다. 그런데 <라데츠키>는 위의 프랑스혁명 때 나온 <라 마르세예즈>처럼 민중의 행진곡이 아닌 정부군의 행진곡이었습니다. 혁명군을 제압하는 정부군을 응원하기 위해 왕정을 지지하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이 곡을 만든 것입니다. 1848년 같은 해인 그때 라데츠키 장군이 이탈리아에서 사르데냐와 벌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빈의 음악회에서 이 곡이 초연되었을 때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기립해서 박수를 치고 세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할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마치 그 이전 영국의 조지 2세가 런던에서 헨델의 <메시아> 공연 시 <할렐루야>를 듣고 벌떡 일어난 이상의 리액션을 보인 것입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지형. 북부에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존재 (출처, 두피디아)


라데츠키 장군은 그 이전부터 이탈리아와 인연이 많은 군인이었습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부터 그에 맞서 싸워서 이탈리아 총사령관으로 복무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로로 그는 1815년부터 북이탈리아에 구축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북이탈리아를 철권으로 다스려 왔습니다. 그 와중에 1848년 사르데냐가 봉기하자 이탈리아의 그 독립혁명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라데츠키 장군은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볼 땐 영웅이었지만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 베네치아가 속한 북이탈리아에서는 침략자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북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하에서 걸출한 음악가가 출현하는데 그가 바로 주세페 베르디입니다. 베르디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했듯이 그도 조국 이탈리아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베르디는 행진곡이 아닌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 사람이니까요.


오페라의 왕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음악으로 공을 세운 베르디 (1813~1901)


1842년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가 바로 그 오페라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로 사는 북이탈리아인의 처지를 성서에 나오는 바빌론의 유수,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에 비유하여 만든 오페라입니다. 그때 <나부코>를 본 사람들이 무빙 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에 대한 염원이 들끓게 된 것입니다. 제목 <나부코>는 우리 성서에서 느브갓네살로 표기되는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영어)의 이탈리아명입니다. 그들 눈에 오페라의 나부코는 총독으로 와있는 라데츠키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르디의 <나부코>는 이탈리아 독립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오페라가 되었습니다. 음악의 힘입니다.


특히 3막에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로 프랑스혁명기의 <라 마르세예즈>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866년 북이탈리아에서 철수하여 41년간 지속된 오스트리아의 식민 통치는 끝이 났습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870년 이탈리아는 통일이 되었습니다.


통일의 해 베르디는 그랜드 오페라 <아이다>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개통을 축하하는 곡으로 의뢰받아 만들었지만 곡 중의 <개선> 행진곡엔 그가 조국의 통일을 기뻐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페라로 독립운동을 펼쳐 출세한 베르디는 그 사이 국회의원까지 되어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음악가와 정치가로 산 그가 죽었을 때 시민들이 그를 보내며 부른 장송곡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었습니다. 그의 관이 집을 나설 때 그것을 따라가며 그 노래를 합창했다고 합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3막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공연 장면 (출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프랑스혁명 초창기 나폴레옹이 출현했을 때 독일의 한 음악가가 그를 추앙하여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유럽의 구세주로 본 것입니다. 3번 교향곡으로 <영웅>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불멸의 곡입니다. 베토벤입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고 온 유럽을 침략하자 베토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대신 그는 스페인 독립전쟁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영국의 새로운 영웅을 지지하며 1813년 그를 위한 곡을 만들었습니다.


<웰링턴의 승리>라는 관현악곡으로 그 영웅은 곡 제목으로 붙여진 웰링턴 장군이었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베토벤의 응원에 부응하여 2년 후인 1815년 벌어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 승리해 그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었습니다. 베토벤의 두 번째 영웅이 첫 번째 영웅을 완전히 일그러트린 것입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지 않았다면 오늘날 <영웅> 교향곡은 원제였던 <보나파르트> 교향곡으로 불리고 있을 것입니다. 실망한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이름을 떼어내고 미상의 <영웅> 갖다 붙인 것입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나폴레옹 사후인 1880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그의 조국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서곡 <1812년>을 작곡했습니다. 승전 축하 행사에서 연주될 곡으로 그의 친구 루빈스타인이 의뢰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 곡에 적국인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의 멜로디를 넣어서 음악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투를 묘사했습니다.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 이윽고 러시아가 승리하자 그 순간 차이코프스키는 특수 악기(?)인 대포와 종을 등장시켜 승리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절정의 피날레로 마감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에 있는 기존 악기들로는 그가 생각하는 승리의 감동이 모자라 그렇게 시도했을 것입니다.


베르디는 그의 조국 이탈리아의 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했고 추측컨대 통일의 기쁨을 오페라 <아이다>에 담았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의 안위를 위해 행진곡 <라데츠키>를 작곡했습니다.


유럽의 음악 지도까지 바꾼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1821)


위의 곡들은 모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 그 여진이 이어진 19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혁명과 전쟁이 만든 음악입니다. 모두가 역사적인 배경 하에 음악가들이 조국이든 영웅이든 어느 한 편을 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곡들이기에 당시엔 정치색을 띨 수밖에 없던 음악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세기가 지난 지금은 모두 그 역사와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음악적으로만 즐기는 클래식이 되어 있습니다. 정치색은 안 보이고 인간의 희로애락이 들어간 음악 본연의 명곡으로 해석되고 감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데츠키> 행진곡을 들으며 그 시대의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연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치와 히틀러의 선동곡으로 연주되던 독일 제국의 <옛친구> 행진곡을 들으며 그 시대를 연상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옛친구>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그토록 사랑받는 행진곡으로 연주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제작 시 부각되었던 특정 목적이나 용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예술 본연의 것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음악은 음악으로만 들려지고, 마찬가지로 미술은 미술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라서 오늘날 반대 진영 국가에서 그의 작품을 폄훼하지는 않으니까요.


메가박스에서 실황 중계로 상영된 2024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포스터


2025년 1월 1일 새해가 밝으면 <라데츠키> 행진곡은 늘 그랬던 것처럼 또 연주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곡의 원산지인 오스트리아인은 물론 전 세계인은 경쾌한 그 행진곡을 들으며 힘차게 새해를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루틴에도 예외는 있습니다. 위에서 언뜻 언급했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부 논란 부분입니다.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와 베네치아가 속한 북이탈리아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은 아직도 환영받지 못하고 공식석상에선 연주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식민 지배의 상처가 긴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 <라데츠키> 행진곡은 우리로 치면 일본의 어떤 음악가가 일본 제국 시절 우리를 침략하고 괴롭혔던 자국의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찬양하기 위해 만든 행진곡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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