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야만의 시대에 살다 간 화가가 있습니다. 광기는 종교이고 야만은 전쟁이며, 그 화가는 고야입니다. 고야는 그의 조국 스페인이 대내외적으로 겪은 시대의 아픔을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그 어느 역사학자의 장문보다 리얼하게 전달되는 그의 그림들입니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그 펜보다 강한 것은 붓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이번 글에선 그런 그의 그림이 있는 프라도 미술관으로 입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출연하는 영화도 한 편 감상하겠습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주변국 수도인 런던이나 파리, 리스본처럼 역사에 오래전부터 출현한 도시가 아닙니다. 그리고 본래부터 그 나라의 수도도 아니었습니다. 1492년 카스티야 연합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연합의 페르난도 왕의 결혼동맹으로 통일을 이루었을 때까지도 그 도시의 존재감은 없었습니다. 당시 수도는 통일의 맹주였던 카스티야의 수도인 톨레도였습니다. 이후 스페인은 카스티야의 북부인 바야돌리드로 천도를 했고, 이윽고 신흥 도시인 마드리드로 또 천도를 해 비로소 수도가 확정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전성기를 이룬 펠리페 2세가 1561년 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그곳이 수도가 되어야 한다며 수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마드리드는 이전 수도였던 톨레도와 바야돌리드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치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에 수도 캔버라가,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토론토 사이에 수도 오타와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후 마드리드는 500여 년간 대국 스페인의 수도로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를 비롯한 모든 것의 중심지가 되어왔습니다. 그런 연유로 마드리드엔 톨레도나 세비야,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등의 고도들에 있는 오래된 유적지나 모스크를 개조한 대형 성당이 없습니다. 대신 마드리드엔 스페인 최고이자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입니다. 마드리드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미술관입니다. 전 세계에서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여행객들 중에 프라도 미술관을 보지 않고 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 미술관엔 세 개의 입구가 있는데 그 앞엔 마치 그곳을 지키는 수문장과도 같이 스페인을 대표하는 3인의 미술가 동상이 서있습니다.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입니다. 이들 중 무리요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스페인 현지에선 그곳에 동상이 서있을 정도로 지명도가 매우 높은 화가입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엘 그레코는 스페인 화가로 분류됨에도 출생지가 그리스라 이 프라도 트리오에선 탈락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에서 온 사람이라 엘 그레코가 된 그입니다. 고야는 사라고사 근교 출신이고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는 세비야 출신입니다.
스페인엔 그들 이후 그 나라를 빛낸 유명 미술가인 피카소, 달리, 미로도 있습니다. 프라도 트리오의 후예들로 스페인 현대 미술의 신 트리오라 불릴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요? 이 글 말미에서 밝히겠습니다.
이 글은 고야에 대한 글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제가 본 창작물인 그의 영화와, 제가 아는 실제의 그와, 그가 살던 스페인의 당시 역사를 엮어서 씨줄날줄로 풀어가겠습니다. 제가 본 영화는 <고야의 유령(Goya's Ghost)>입니다. 그 영화를 보았을 때 언젠가 고야에 관한 글을 쓰겠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때가 되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야 찾아보니 그 영화는 2006년 해외 개봉되었고 국내엔 2년 후인 2008년에 극장에서 개봉되었습니다. 귀에 낯선 만큼 흥행 성적은 시원치 않았습니다. 저도 그땐 그 영화의 유무를 알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몇 년 전 케이블 TV를 통해 우연히 본 그 영화는 제 눈을 화면에서 멈출 수 없게 하였습니다. 야심한 시각 극장이 아닌 집에서 TV로 영화를 보면 산만해지거나 졸기도 하며, 때론 이 산이 아닌가벼 하며 중도에 포기하고 침대로 향하기도 하는데 끝까지 완주한 것입니다.
일단 <고야의 유령>은 재미를 떠나 제목에서 유추될 법한 예술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의 화가 고야가 타이틀에 턱 하니 올라와 있으니 당연히 고야의 작품과 연계된 인생 전체 전기이든, 일부 시절의 전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빼고 그의 삶만을 오롯이 다룬 영화도 아닙니다. 영화는 그를 통해 본 당시 스페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고야는 그 내용을 들려주는 화자로 등장합니다. 때론 본인도 본류에 개입하여 일정 역할을 하면서 말입니다. 정리하면 <고야의 유령>은 고야가 등장하는 미술 영화가 아니고 그가 목도한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고발성 영화입니다. 그가 본 유령은 그 광기와 야만을 가리킵니다.
영화는 <아마데우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로 유명한 밀로스 포만 감독이 연출했고 스페인의 명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로렌조 신부 역)과 이스라엘 출신의 여우인 나탈리 포트만(이네스 역)이 출연합니다. 고야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두 남녀가 주인공입니다. 고야는 언급했듯이 시대에 함몰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관찰자이면서 때론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존재로 나옵니다. 고야 역으론 여러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스웨덴의 스카르스고르드가 맡았습니다. 모두가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입니다.
고야를 통해 당시 스페인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 <고야의 유령> 포스터 (2006)
<고야의 유령>은 18세기 말인 1792년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고야의 조국 스페인은 그가 목도한 광기와 야만이 휩쓸던 시대였습니다. 광기는 종교이고 야만은 전쟁입니다. 광신의 광풍이 불어 카톨릭의 종교 재판으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여주인공 이네스는 터무니없는 그 재판으로 인해 재판관인 로렌조 신부에 의해 모진 심문을 받고 마녀임을 고백당해 감금되고 처형의 위기에 놓입니다. 이때 궁중화가였던 고야가 그녀의 흑기사로 등장합니다. 귀족의 딸인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네스가 그의 작품의 뮤즈였기에 그녀를 구제하기 위해 애를 쓰는 존재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야로 인해 그녀 삶의 마지막 과정까지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울러 그녀를 철저히 망가트린 악당인 로렌조 신부의 삶도 보게 됩니다.
고야는 이 시기의 불행한 역사와 사회상을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대 이전까지는 귀족의 초상화를 주로 그린 그였는데 광기와 야만이 그의 눈에 보이면서 그의 작품도 그것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에도 나오듯이 그 역시 종교 재판에 연루됩니다. 1792년 그의 나이 46세에 제작한 판화집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카프리초스>란 제목이 붙은 그 사회 고발성 판화집에부패한 사제들을 기괴한 괴물로 묘사한 작품들이 있어서였습니다.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종교 재판의 화는 피해 갔습니다. 궁정화가로서 스페인 왕족이나 귀족, 사제들에게 작품을 인정받고 어느 정도는 영향력이 있던 고야였으니까요. 당시 그들이 사는 궁전이나 저택엔 고야가 그려준 멋진 초상화가 한 점 이상씩은 다 걸려있었을 것입니다. 고야의 <카프리초스>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라는 명언급의 부제가 붙은 작품입니다.
음주에 빠진 사제의 모습을 기괴하게 묘사한 고야의 판화집 <카프리초스>의 한 작품
판화집 제목인 <카프리초스>는 변덕, 즉흥이란 뜻으로 음악에서도 종종 시도되는 카프리치오(capriccio)와 같은 장르입니다. 같은 의미의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차이겠지요. 형식이나 기존의 정형성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작품을 말합니다. 고야는 눈치 안 보고 그런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음악에서 카프리치오는 우리말로는 기상곡(綺想曲/奇想曲)이라 불립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안 기상곡>과 림스키코르샤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등이 유명합니다.
고야는 이후 그린 그의 대표작 <옷 벗은 마하>(1800)와 <옷 입은 마하>(1803)로도 종교적인 구설수에 오르게 됩니다. 같은 누드화라도 그 이전 화가들이 그린 신화 속 여신의 나체와는 다른 실제 여자의 나체를, 그것도 금도를 넘어서 그렸기에 그랬습니다. 그만큼 작품을 위해서라면 타협하지 않고 용기를 보인 고야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린 마하는 3년 후 옷을 입혔음에도 그를 더 이상 방어해주지 못해 그를 궁정화가의 지위에서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관직을 잃고 백수가 된 것입니다.
고야를 궁정화가에서 물러나게 한 <옷 벗은 마하>, 1800
<옷 벗은 마하>에 옷을 입힌 <옷 입은 마하>, 1803
광신의 종교 재판이 판을 치던 광기의 시대에 이어 야만인 시대인 전쟁이 스페인을 치고 들어옵니다. 그의 작품 세계의 분수령이 된 영화 속 1792년에서 보듯이 당시는 이웃 나라인 프랑스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 불길은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혜성 같이 출현한 나폴레옹에 의해 잠잠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 국내적으로 그런 것이지 그 불길은 외국인 유럽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침략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스페인도 그 화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틈바구니에 있던 스페인은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되었고 스페인의 왕으로 그의 형 조제프가 부임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독립운동이 시작되는데 스페인 자력으로는 불가해 프랑스와 견원지간인 영국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 전쟁을 가리켜 이베리아반도전쟁(1808~1814), 또는 스페인독립전쟁이라 부릅니다. 스페인 역사에 야만이 판을 치던 최악의 비극이 펼쳐지던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무려 백만 명이나 죽었으니까요.
고야는 이 프랑스 침략기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학살과 처형의 모습을 묘사한 그 유명한 <1808년 5월 2일, 마멜루크족의 진격>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의 처형>이 그 작품들입니다. 전작은 그해 5월 2일에 봉기를 일으킨 마드리드 시민들을 과격하게 진압하는 프랑스군과 그들이 고용한 이집트의 용병인 마멜루크족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후작은 그다음 날인 5월 3일 체포된 시민들을 총살로 즉결 처분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사진이 없던 시절 이와 같은 화가의 그림은 그 어느 역사학자가 기술한 장문의 기록보다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리얼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펜보다 더 강한 것은 붓입니다.
프랑스의 침공에 대항하는 마드리드 시민의 모습을 그린 <1808년 5월 2일>, 1814
마드리드의 봉기로 처형당하는 시민의 모습을 그린 <1808년 5월 3일>, 1814
* 다음 주말엔 말년의 고야와 그의 작품 세계, 그리고 당시의 스페인 역사에 대해 쓰겠습니다. 그리고 고야가 왜 프라도 미술관의 제왕인지에 대해서도 쓰겠습니다. 그런데 가엾은 고야의 이네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