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Jun 01. 2024

프라도의 제왕 고야 <하>

영화 <고야의 유령>과 스페인

프랑스가 스페인을 식민 통치하는 기간 중 그들에게 붙어서 출세하는 스페니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역사로 치면 일제 침략기의 매국노처럼 말입니다. 조국을 등진 자들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고야의 유령>에서도 그런 모습의 인간들이 나옵니다. 혼란과 격변의 시기로 내일을 알 수 없는 뒤엉킨 역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간악하지만 또 한편 무기력한 것이겠지요. 살아남기 위해 그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프랑스로부터 독립이 되자 그런 스페인의 기회주의자들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전세역전이고 사필귀정입니다. <고야의 유령>에선 그런 시대의 전환에 따라 약자와 강자가 뒤바뀌는 모습들이 계속해서 보여집니다. 물론 악당은 탈만 바꿔 쓰지 다른 악당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신해 갑니다. 악역이 잘 어울리는 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로렌조 신부가 바로 그런 자입니다. 그런 그의 실체를 모르고 그에게 사로잡힌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고야의 가엾은 이네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그의 작품에 담은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 고야 (1746~1828)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구세주는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독립전쟁에서 승전해 멀리 비엔나에서 이를 지켜보던 악성 베토벤의 새로운 영웅이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유럽의 구세주로 여긴 나폴레옹을 위해 <보나파르트> 교향곡을 작곡해 그에게 헌정했는데 그가 1804년 황제에 오르고 유럽의 침략자가 되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담은 3번 교향곡 제목도 미상의 <영웅>으로 바꾸었습니다. 대신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을 위해 1813년 <웰링턴의 승리>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해 그의 새로운 영웅에게 헌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웰링턴이 승리한 것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으로 인해 그와 그의 주력군이 스페인에 부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링턴은 그 전쟁에서 나폴레옹과 맞장을 떴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훗날 고백을 했습니다. 그 정도로 나폴레옹은 전술에 관한한 천하무적의 명장이었습니다. 웰링턴은 2년 후인 1815년 나폴레옹의 최후의 전투가 된 워털루 전투에서 비로소 그와 맞장을 떠서 승리하지만 그때도 승인은 그의 전술이라기보다는 프로이센의 구원군이었습니다. 이는 2023년인 최근 개봉한 영화 <나폴레옹>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선 프로이센 군이 오기 전에 전투를 끝내려는 나폴레옹과 프로이센 군이 올 때까지 전투를 이어가려는 웰링턴의 모습이 교차해서 나옵니다.


외국인인 베토벤이 스페인에서 활약을 펼친 웰링턴을 위해 곡을 쓰는 마당에 자국민인 고야도 그의 조국을 위해 애를 써준 그 영웅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토벤이 그를 위해 음악을 작곡했듯이 그를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위대한 음악가와 미술가답게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본래 많은 초상화를 그렸던 궁정화가 고야였기에 독립전쟁이 끝난 해인 1814년 그는 그 실력을 발휘하여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근사하게 그렸습니다. 작업한 내용 그대로 <웰링턴 공작의 초상>이란 제목이 붙은 문제적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문제적 작품이라 표한 것은 훗날인 1961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던 이 그림이 도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엉뚱하게도 당시 영국에서 일었던 TV 시청료 거부 운동과 연계되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이 명화 도난 사건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전 세계에서 때 아니게 고야를 호출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웰링턴 공작의 초상>이란 그림 제목으로 개봉되었는데 원제는 <The Duke>입니다. 이 영화 매우 유쾌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보고 감흥이 커서 이곳에 <웰링턴 공작과 TV 시청료>란 제목으로 감상문을 써서 올리기도 했습니다.


고야가 그린 스페인독립전쟁의 구세주 <웰링턴 공작의 초상>. 1814


2022년 우리나라 실존 재벌 가문을 모델로 한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종편 TV의 드라마가 히트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드라마에선 부자간 사이에도 냉혹한 재벌가를 빗대어 한 명화를 등장시켰습니다. 바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란 그림입니다. 사투르누스는 로마 신화의 이름으로 그리스 신화에선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새턴으로 그는 신들의 신인 제우스의 아버지입니다. 즉, 그 그림은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그림입니다. 크로노스는 아들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권좌를 잡는다는 예언을 듣고 그것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제우스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었습니다.


하지만 6형제의 막내인 제우스는 엄마인 레아의 기지로 살아나서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던 그의 형제들을 모두 토해내게 하고 그들과 힘을 합쳐 아버지의 형제인 티탄족과 지축과 하늘이 흔들리는 거대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해 제우스는 신계와 인간계의 제왕이 된 것입니다. 신화의 소재인 이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여러 유명 화가들이 그렸는데 그중에 제일 유명한 그림이 바로 고야가 그린 그림입니다. 일단 가장 무시무시하고 그로테스크합니다.


'검은 그림' 연작에서 야만의 시대를 묘사한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0년대)


고야는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이 그림을 말년에 그렸습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와 독립전쟁으로 스페인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민은 피폐해져 인간의 존엄성은 무너지고 참혹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런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당시 궁정화가에서 내려온 그는 마드리드를 떠나 만사나레스란 곳에서 귀머거리의 집이라 이름 붙인 집에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집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세상과 단절되어 살겠다는 그의 의지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그 집에서 그린 배경이 어두운 그의 그림들을 가리켜 '검은 그림' 연작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그는 희망이 없는 암흑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이전부터 전쟁을 묘사한 판화 연작인 <전쟁의 재난>(1810~1820)도 제작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1824년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의 보르도에 머물다 4년 후 사망하였습니다. 건강 문제라곤 하지만 프랑스 침략의 고발자 역할을 했던 그가 프랑스로 건너가 살다가 죽은 것은 다소 의아스럽습니다.


이렇듯 고야는 영화 <고야의 유령>의 시작점인 1792년 46세까지는 평범한 궁정화가의 삶을 살다가, 그때부터 종교와 전쟁으로 인한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살았고, 82세에 프랑스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작품의 변화에서 보듯이 격랑의 시대를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의 눈엔 침략국인 프랑스프렌치는 물론 조국인 스페인의 스페니쉬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말년으로 갈수록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그의 뮤즈인 이네스도 끝내 행복해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고야의 헌신적인 수고는 물론 그녀가 다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영화 관객의 바람까지 외면하여 해피엔딩이 안 된 것입니다. 비극의 시대를 살다 간 스페니쉬들이었습니다.


<전쟁의 재난> 판화 연작의 한 작품.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묘사 (1810~1820)


위에 열거한 고야의 작품들 중 <웰링턴 공작의 초상> 하나 빼고는 모두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치 고야의 전용 미술관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그의 작품들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웰링턴 공작의 초상>은 당시 스페인, 아니 유럽 최고의 화가인 고야가 그려준 그림이니 웰링턴 공작이 그의 나라인 영국으로 귀국 시 싸갖고 갔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이 그토록 고야에 공을 들인 것은 그가 궁정화가로 활동한 영향도 있겠지만 위에서 보듯이 스페인의 드라마틱한 역사와 함께 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떠나 화가로서 스페인은 물론 낭만주의의 대가로서 전 세계 화단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단 점도 그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게 했을 것입니다.


고야의 작품이 프라도 미술관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전시된 작품의 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미술관엔 현재 7,950점의 회화 작품이 있는데 그중 고야의 그림은 무려 592점으로 전체 작품의 7.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1,800여 점을 보유한 스페인 화가들 중에선 약 1/3이 그의 작품입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115점, 무리요의 작품은 96점이 있으며, 엘 그레코의 작품은 40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 홈페이지를 인용한 자료(2024. 5. 19)입니다. 과연 프라도의 제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고야입니다. 그 미술관은 본래 스페인 왕가가 수집한 예술 작품을 모아놓은 왕실 전용 미술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19년 국립 프라도 미술관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참 잘한 일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역사성이 부족한 마드리드에 예술의 색깔을 입히고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니까요.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작품은 그들이 태어나고 주로 활동했던 세비야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 그레코의 작품 역시 그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톨레도에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톨레도를 방문했을 때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르가스 백작의 죽음>을 감상하였습니다. 그 작품에선 과연 매너리즘의 대가인 엘 그레코답게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게 묘사된 인물들이 매우 인상적으로 보였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엔 당연히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 엘 그레코의 작품들 이외에 많은 외국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드리드의 랜드마크 프라도 미술관의 출입구. 우측에 고야의 동상이 서있음 (2024. 3)


하지만 그곳에 피카소, 달리, 미로의 작품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20세기 들어 찬란한 스페인의 현대 미술을 선보인 트리오인데 말입니다. 본래는 그곳에 있었으나 다른 미술관으로 이전해서 그렇습니다. 1992년까지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도 프라도 미술관에 있었습니다. 작품 수가 넘쳐나면서 공간이 문제가 되어 그들의 작품들을 이전한 것입니다. 기준은 작품의 제작연도나 화가의 활동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프라도 미술관엔 19세기와 그 이전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우고, 20세기 이후의 작품은 근처의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로 옮겨졌습니다. 즉, 그림이 이전된 그 미술관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현대미술관입니다. 우리의 과천 현대미술관이나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처럼 말입니다.


지난 3월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위에 나온 고야의 모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으로 채워진 별도의 방이 있을 정도로 고야는 프라도의 제왕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두 그림은 서로 곁에서 나란히 누워있어 같은 인물인 그녀의 탈의와 착의 상태를 비교해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침공 시 마드리드의 비극을 다룬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도 역시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그 이틀간 벌어진 스페인의 역사를 실감 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제 생각과는 달리 사이즈가 많이 작았습니다. 판화 연작인 <카프리초스>와 <전쟁의 재난> 시리즈도 다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간 사진을 통해서만 보던 작품들과, 제가 실제 본 적도 없으면서 다른 글에서 다루었던 작품들을 코앞에서 감상한 것입니다. 엄격한 보안 정책으로 사진은 찍을 수 없었습니다.


명작을 실제로 보았을 때의 경이와 환희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실물 영접보다 더 센 만남이 있을까요? 숱하게 영상이나 지면을 통해서만 보아오던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인 <시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그림을 볼 때 그림 속 이젤 뒤의 벨라스케스의 눈과 마주쳤을 때는 숨이 턱 하고 멈추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제가 무엇을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이 촉박해 더 많은 작품들을 보고 오지 못한 것이 글을 쓰는 지금 꽤나 한스럽게 생각됩니다. 프라도(prado)를 사전 검색하니 그 단어는 초지, 풀밭, 산책길 등을 뜻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 생애 또 한 번 프라도 미술관을 갈 일이 있다면 그땐 정말 푸른 초원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아주 게으르게 감상할 생각입니다.


보너스> 세비야, 그라나다, 론다 등의 고도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수도 마드리드의 클래식한 버스킹 (2024. 3)




  


작가의 이전글 프라도의 제왕 고야 <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