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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Jun 08. 2024

'마이 러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황주리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었습니다. 이 글 제목에서 연상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아니라 그 책과 저자를 회상하며 쓴 <마이 러브 프루스트>라는 황주리 작가의 신간 소설을 이릅니다. 2주 전 일요일 오후 저는 반나절만에 그 책을 다 읽고 말았습니다. 책이 아직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기도 전이었는데, 그리고 온라인 서점인 알라딘에서도 그다음 주 화요일에나 배달될 것이라고 예약 메시지가 떴는데 웬일인지 그날 아침 바로 책이 배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 장을 열었는데 그 책이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해서 끝까지 읽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전 책을 구입한 일반 독자들 중에선 그 책을 가장 먼저 읽은 1호 독자일지도 모릅니다. 신박한 그 소설이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마음속에 잃어버린 시간의 프루스트가 살아나서 그랬을 것입니다. 제겐 왠지 모를 빚을 져온 것만 같은 그입니다.


황주리 작가가 그 소설을 언제부터 쓰기로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젊은 어느 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프루스트와 그 작품을 그때보다 많이 늙은 어느 날 어떤 계기로 불현듯 떠올리고,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그와 그 작품을 만지작 거리다가, 또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비로소 펜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설을 어떤 심경으로 쓰기로 했는지도 역시 모르겠으나 어쩌면 젊은 날 프루스트에게 진 빚을 갚는다는 심경으로 썼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가 그에게 진 빚은 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펼치긴 했으나 끝까지 읽지 않은 해묵은 빚이었을 것입니다. 위에서 심경을 밝힌 저와 같은 그 빚입니다.


통상 젊은 날 그렇게 유보된 책은 훗날 적정 시간에 읽음으로써 상황이 종결되지만 그녀는 완독 후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를 오마주하는 소설까지 썼습니다. 빚을 갚아도 원금만 갚은 것이 아니라 이자까지 쳐서 후하게 갚은 격입니다. 역시 프루스트에게 빚을 진 것만 같은 저는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책까지는 당장 아니더라도 그 작가를 오마주해서 쓴 황주리 작가소설을 후딱 읽어 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나마 일단 대속을 받아 괜한 죄책감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심경이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황주리 작가가 프루스트를 오마주해서 썼다는 것은 그녀의 소설 책장을 넘기지 않더라도 제목에 떡하니 올라온 고백만 봐도 분명합니다. <마이 러브 프루스트>이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의 사랑 프루스트에게" 쓴 연애편지와도 같은 그녀의 소설입니다.


화가로 더 알려진 황주리의 신간 소설 <마이 러브 프루스트>, 휴먼앤북스 2024. 5


3주 전쯤 SNS에 올라온 황주리 작가의 신간 소설 소식을 접하는 순간 대학교 1학년 초에 잃어버린 그와 그 작품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프루스트? 맞아! 그와 그 소설이 있었지"하며 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그 책과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독후감과도 같은 글을 책을 읽지도 않고 쓰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요? 프루스트를 오마주하는 소설 <마이 러브 프루스트>를 따끈하게 읽었다고는 하지만 그 소설의 절반 지분은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인데 말입니다.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In Search of Lost Time)>는 마치 한 세트처럼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딱히 이 프랑스 작가의 다른 작품은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딱 한 권 이 책이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평생 단 한 권의 소설을 쓴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작가와 작품 세트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대개의 독자들의 경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책으로 읽든, 영화를 통해서 보든 그 스토리를 얼추라도 기억하고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기억을 떠나 원천적으로 그 책의 내용을 입력한 적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 작가와 책의 유명세는 알고 있지만 완독한 독자들이 많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읽었다 해도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사실 미지수입니다. 그 책은 그런 책이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이 러브 프루스트> 본문에서 소개하듯이 1999년 영화화가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까뜨린느 드뇌브가 출연한 그 영화는 7부작인 그 책의 마지막 챕터인 <되찾은 시간(Time Regained)>만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되찾은 시간>입니다. 금시초문이라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되었는지 알고 싶어 찾아보니 개봉 소식은 안 뜨고 2018년 전주영화제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는 뉴스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인 1984년에도 제레미 아이언스와 알랭 들롱이 출연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지만 그 또한 그 소설의 1부만을 다루어 제목도 <스완의 사랑(Swann in Love)>으로 개봉되었습니다. 모두 프루스트의 모국인 프랑스가 관여한 영화입니다. 그러니 프루스트의 7부작인 그 소설을 온전하게 영화화한 작품은 없는 것입니다. 맨 앞과 맨 뒤만이 있고 중간 몸통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황주리 작가의 <마이 러브 프루스트> 중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만이 영화화된 격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영화를 다 안 봐서 무어라 평할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을 각색 없이 영화적인 줄거리로 구성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 속의 미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랬습니다. 저도 잠깐 경험했지만 그 책은 구성이 없는 소설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무려 4천 페이지가 넘는 긴 내용으로 7부, 7권으로 쪼개어 구성된 대하소설입니다. 프루스트는 그 책을 1909년에 쓰기 시작해 1922년에 끝냈고, 그해 죽었으며, 출간은 1913년에 시작해 1927년에 완료되었습니다. 14년에 걸쳐 쓰고 15년에 걸쳐 출간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후에 출간된 5부부터는 자신의 책을 보지 못한 입니다. 한마디로 죽는 순간까지 쓴 그 책은 그에겐 인생의 미션이었고 필생의 대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그 책은 20세기 최고의 소설이 되었습니다.


프루스트가 14년에 걸쳐 쓴 7권의 원작을 한국외대 김희영 교수가 10년에 걸친 번역 작업 끝에 13권으로 완간한 한글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2022   


이런 여러가지 난망함으로 인해 현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면서도 그 소설이 지금까지 알만한 유명 영화로 온전하게 개봉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소설 이래로 유명 작가의 유명 소설들은 대작으로 영화화가 되어 책의 독자보다 더 많은 영화 팬들이 원작의 각색 여부와 상관없이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을만한 영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이 제대로 된 시도조차 없었고 그나마 일부를 떼어내서 만든 영화도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원작인 책은 안 읽고, 제대로 각색한 영화나 드라마도 없으니 마니아나 전공자가 아니고선 그 책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그 작품을 인지하고 고, 최고로 추켜세우니 이것은 대단한 미스터리라 하겠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고 좋다고 생각하지만 소유하기는 힘든 열망(wannabe) 명품 브랜드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과도 같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단 한 권의 책으로 20세기 최고의 작가에 오른 마르셀 프루스트 (1871~1922)


중고교 시절 사춘기에 들어서며 손에 들게 되는 외국 작가들의 소설이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련한 원스 어폰 어 타임과도 같은 그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작가들의 더 많은 소설들이 있었지만 당시 제 또래 집단에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독보적으로 입문서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치 그 시절 영어 참고서 중에서 안현필 선생의 <영어실력기초>가 영어 문법 문서로 모두가 가방 속에 넣고 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희미해졌지만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 이야기가 떠오르고 제목인 <좁은 문>의 유래에 대해서도 생각이 납니다. 별개로 작가인 지드는 외사촌인 마들렌과 결혼했으며 평생 그녀와 잠자리를 안 했는데 그 이유가 그녀가 너무 순결해 보여 그랬다는 사춘기적인 스토리도 신화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생아 딸을 남겼습니다.


특이하게도 제3세계인 레바논 작가인 칼릴 지브란의 <부러진 날개> 또한 그 시절 많이 읽혔습니다. 지브란과 연인인 셀마와의 순정을 그린 소설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소설은 모두 자전적 소설입니다. 이렇게 첫사랑을 주요 소재로 한 소설로 입문한 청춘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여러 소설들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시점 한 소설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바로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입니다. 이 책을 비롯하여 독일인인 그의 작품들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열풍은 대단했습니다. 제 경우도 그의 작품의 경우는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것은 모두 다 읽었을 정도로 팬이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데미안과 싱클레어, 에바 부인이 나오는 <데미안>은 독보적이었습니다. 내용 중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프락사스는 숱하게 인용되었고 그때 성행했던 각종 퀴즈 프로에 단골 문제로 출제되곤 했습니다. 이렇듯 <데미안>까지는 첫사랑을 비롯해 성장통과 연관 있는 소설들이 많이 읽혔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면 읽는 소설의 스케일이 장대해졌습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 쪽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청춘 독서의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책이 바로 문제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습니다. <좁은 문>에서 출발해 중간 지점인 <데미안>에서 집합하고 끝내는 피라미드의 상부 꼭짓점과도 같은 그 소설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마치 <영어실력기초>에서 시작해 <성문기본.핵심.종합영어>로 실력의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소설도 그렇게 단계를 밟으며 난이도를 높여갔습니다. 그 사이 어린 독자들은 중고 교복을 벗어던지고 대학 캠퍼스에 입장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뿌듯한 마음으로 그 책을 손에 넣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게 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 발음마저도 귀족적인 프랑스 이름의 작가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뭔가 있어 보이는 근사한 제목에, '스완네 집 쪽으로' - 첫 편부터 백조와도 같은 우아한 제목이 나오니 정말 기대감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상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통상 알던 소설이란 장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20년 인생에 생판 접해보지 못한 생경한 산문이 전개되고 있어서입니다. 책은 펼쳤지만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그리곤.. 짧은 정지와 같은 페이지 반복을 거듭하다가 그 책은 조용히 덮여집니다. 훗날, 독서 내공이 높아진 더 어른이 된 날 읽을 것을 기약하면서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방황하다가 그 시간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약 없는 다짐은 마음의 빚으로 남게 됩니다. 그땐 순수의 시대였으니까요.


프루스트가 직접 수정을 가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1부 스완네 집 쪽으로> 초판 교정쇄, 1913 (출처, 위키피디아)


위의 청소년기의 독서 이야기는 순전히 저의 경험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시대마다 그 경험은 다를 것입니다. 이렇듯 저는 그 독서 하이어라키의 최종 관문은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열정으로 시작해 순식간에 냉정으로 끝나버린 저의 첫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으니까요. 그리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땐 그 이별이 이렇게 길게 갈지 몰랐습니다. 물론 아직도 이별 중입니다. 황주리 작가는 그녀의 소설 <마이 러브 프루스트>에서 아래와 같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그 제목만으로 구십 프로 먹고 들어간다. 그 누군들 잃어버린 시간을 빼고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으랴. 하지만 이 길고 지루한 독서 여행을 끝마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프루스트 사랑하기는 끝까지 오르지 못할 산 정상에 올라가는 사람의 기분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프루스트를 사랑하는 시간은 영원한 짝사랑의 시간이다. .. 끝까지 읽지도 않을 거면서 그냥 사서 꽂아둔 바라만 봐도 뿌듯한 책, 역시 오랜 세월 무슨 계시라도 받은 무작정 제목이 좋았다. 사실 내가 그려온 그림 세계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다름 아니다. 번이나 읽다가 말고 읽다가 말고 여러 번 되풀이.. - 서문에서 발췌


아무리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 밑도 끝도 없는 책 - 본문 중 '마담 프루스트'에서 발췌


어쩌면 그 책은 문학을 꿈이거나 도피거나 취미로 삼았던 젊은이들에게 늘 미완의 아쉬움으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 아직도 그 책은 끝까지 읽지 않을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전 세계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 본문 중 '프루스트, 프루스트'에서 발췌



이렇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하는 진기한 생각과 경험의 시간은 저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어렸을 때부터 글과 그림에 묻혀서 살아온 황주리 작가마저도 이렇게 그 책을 대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글과 그림 중 그림을 전공해 화가로 먼저 이름을 날리고 이후 그간 빗장을 걸어놓았던 글의 문도 열어 소설, 에세이, 칼럼 등을 쓰며 잃어버린 시간의 절반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으로 그린 풍경화라 불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논함에 있어 최적화된 인물이 화가이자 소설가인 황주리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 소설은 미술 이야기가 많이 나와 미술사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글과 그림을 다 갖춘 배경의 그녀조차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독서의 넘사벽과도 같은 고백을 하고 있으니 그녀보다 글과 그림의 거리가 한참 먼 저를 포함한 일반인들에 대해 제가 위와 같이 일반화하는 것은 그렇게 무리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원고지를 화폭으로 작업한 황주리 화가의 <추억제>, (출처, <마이 러브 프루스트> 삽화)


황주리 작가의 <마이 러브 프루스트>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7부로 구성된 것처럼 7개의 단편, 중편이 이어지는 연작소설입니다. 프루스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직설적으로 보이는 프루스트 따라하기입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큼 방대하거나 난해하지 않기에 초장부터 멈출 일은 없습니다. 그 7편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7명의 주인공과, 그와 짝을 맞춘 프루스트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 마담, 책방, 헤어, 프루스트, 의자,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프롤로그 등 총 7개의 프루스트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또 한 명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프루스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8번째 주인공과 그의 프루스트입니다.


바로 책을 읽는 독자 자신입니다. 책 밖에 있는 독자가 본문의 잃어버린 시간이 반복되면서 그 역시 책 안으로 빠져 들어가 어나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부지불식 중에 그의 기억 속에 입력되어 있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들 중 잃어버린 시간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황주리 작가가 책의 서문에서 "그 누군들 잃어버린 시간을 빼고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으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프루스트를 사랑하고 안 하고와는 별개일 것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언제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될까요?



뇌량절개술, 황주리 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어떻게 한사람이 이렇게 상반된 두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그림은 한없이 따뜻한데 글은 냉정하고 차갑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랑이 불씨처럼 남아있다. 가끔 재미있고 때론 슬프고, 그리고 아름답다. - 추천사, 김창완(가수 그리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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