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평균을 내보면 유럽의 최강국은 프랑스일 것입니다. 대항해 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어 그 바다를 차지한 네덜란드와 영국이 그 시기엔 절대강국이었겠지만 프랑스가 그런 시기에서조차 중간자나 약자의 위치에 있던 적은 없었습니다. 늘 유럽의 서쪽에서 오각형의 뾰족한 강국의 자리를 지키고 이어온 프랑스였습니다. 물론 현대사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굴욕적인 시기가 잠깐 있긴 했습니다. 이런 프랑스와 함께 영국, 독일을 오늘날엔 유럽의 3강으로 분류합니다. 그들 중 영국은 그들 왕조의 시작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정복왕 윌리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프랑스어는 한동안 지배층과 상류층의 언어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을 거치며 중부 유럽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독일도 프랑스의 기원인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된 동프랑크를 그들 역사의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프랑스는 로마 제국과 국경을 맞댄 덕으로 일찍이 야만의 굴레에서 벗어나 서로마 멸망 후 중세부터 유럽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갈리아라 불린 시절 최고의 로마인이라 불리는 카이사르가 개척한 땅이었습니다. 사상적으론 계몽주의가 발원해 근대를 꽃피웠고, 정치적으론 시민혁명을 통해 왕이 없는 공화정을 이루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치우침 없이 고루 발전하여 유럽은 물론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였습니다. 종교적으론 중세말 신의 대리인인 교황을 좌지우지해 교황청을 프랑스의 영토로 옮겨놓기까지 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오늘날과 같은 유럽의 지형으로 재편한 영웅 나폴레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난히도 콧대가 세고 자존심이 강한 프렌치입니다. 1896년 4월 6일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 올림픽을 연 쿠베르탱 남작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7월 26일 파리 올림픽을 여는 프렌치도 그들의 후예답게 그런 사람들입니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설치된 쿠베르탱 남작이 디자인한 올림픽기의 오륜 마크 (출처, AP)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쿠베르탱 남작이 처음부터 고대 그리스의 숭고한 이상을 받들어 근대 올림픽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육사를 다니다가 교육학자로 전향한 그는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그의 조국 프랑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라이벌인 영국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신생 독일과의 전쟁인보불전쟁(1870~1871)에서조차 패하는 것을 보고 그 안타까움에 조국의 부흥을 위하는 애국심으로 체육대회를 구상하였습니다. 나약한 프랑스 청소년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하지만 그것을 실행해 가는 과정에 그의 생각이 확장되고 판이 커지면서 그 체육대회가 올림픽이 된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소년체전 같은 국내 대회로 시작하려던 것이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가 된 것입니다.
당시 그런 올림픽은 올림픽의 원조국인 그리스와 유럽의 최강국인 영국에서도 먼저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쿠베르탱 남작이 기획하고 실행한 올림픽이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외교력과 실행력, 그리고 애국심과 세계주의가 그의 올림픽을 살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국에서 주도한 올림픽을 무력화시킨 것에 대한 기쁨이 컸을 것입니다. 전쟁을 떠나서 당시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인 이벤트와 크리스털팰리스와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 등 스펙터클한 경쟁을 벌여오던 영국에 승리한 것이었니까요.
올림픽의 성지 올림피아
근대와 고대, 이 두 올림픽은 시대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개최 장소일 것입니다. 근대 올림픽은 주지하듯이 사전에 개최지로 선정된 세계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가며 열리지만 고대 올림픽은 오로지 그리스의 한 도시에서만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고대 올림픽의 프리미엄으로 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아테네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 중 강국이긴 했지만 그곳과 멀리 떨어진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편에 위치한 올림피아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명을 따라 대회명이 올림픽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유력 12 신이 산다는 올림포스 산과는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고대 올림픽은 왜 올림피아라는 도시 한 곳에서만 열렸을까요? 그리스를 하나의 세계인 헬라스라 칭한 그들이었으니 그 세계에 있는 많은 폴리스들이 돌아가면서 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정답은 제우스 신 때문이었습니다. 올림피아에 그리스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만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를 위한 제전(祭典)이었습니다. 제우스를 기리는 제사를 겸한 스포츠 대회였다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올림픽을 가리켜 스포츠 제전이라 불리는 이유이고 유래입니다.
올림픽의 신 제우스
근대 올림픽을 쿠베르탱 남작이 창설했다면 원조인 고대 올림픽도 창설자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776년 열린 제1회 대회를 천하장사인 헤라클레스가 개최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제우스 신이 인간 여자인 알크메네와 바람을 펴서 탄생한 그였기에 평생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미움으로 고난의 길을 겪던 그였습니다. 드디어 헤라가 사주한 불가능한 12가지 과제를 모두 완수하고 그 기념으로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린 것이 고대 올림픽의 효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인간의 피가 섞인 신화 속 인물들 중 가장 체력과 힘이 뛰어난 헤라클레스였기에 이런 신화가 만들어진 듯합니다.
고대 올림픽은 오늘날 하계 올림픽과 같이 여름에 열렸는데 5일 간 최대 19종목이 열렸습니다. 첫날과 마지막날은 개회식, 선서, 시상식과 함께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경기는 2일차와 4일차인 3일 동안 집중되었습니다. 선수들은 당시 그리스의 전역의 모든 폴리스에서 온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였으며 여자는 참가도, 관람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참가한 모든 선수들은 발가벗고 경기를 했는데 그래서 여성의 참석이 불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투표권을 비롯하여 당시 낮았던 여성의 지위 때문이었겠지요. 이런 고대 올림픽의 전통을 이어받아 제1회 아테네 근대 올림픽은 남자 선수만 참가가 허용되었습니다. 여자는 2회인 1900년 파리 올림픽부터 참가가 허용되었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되며 여권 신장에도 기여한 올림픽이었습니다.
인체의 완벽한 균형.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 카피본, 대영박물관. 원본은 청동상으로 기원전 450년경 제작
제우스를 위한 제전이었기에 고대 올림픽엔 운동 경기만 열린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엔 그리스 연합의 모든 시인과 철학자, 연극인과 예술인들이 다 모였습니다. 경기는 경기대로 벌이고 그들은 그곳에서 연극제와 시 낭송회 등을 통해 제우스를 찬미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합제전인 올림픽에서 축제의 향연을 벌인 것입니다. 5일째 마지막 날엔 시상식 후 연회가 열렸는데 그날은 아마도 술에 취한 그 심포지엄이 절정에 달했을 것입니다. 경쟁을 끝내고 서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평소엔 도시 국가들 간에 각각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다가도 그리스 전체 위기가 오면 하나가 되어 동맹을 맺고 적과 대항했던 트로이 전쟁이나 페르시아 전쟁 등은 4년마다 올림픽을 통한 이런 교류와 화합의 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근대 올림픽도 고대 올림픽과는 목적성은 다르나 그때와 같이 올림픽 기간 중엔 많은 국제 행사와 예술제가 열리곤 합니다. 개최 도시를 세계에 알리는 다양한 도시 마케팅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번 파리 올림픽의 센강 개막식도 그런 마케팅의 일환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올림픽이 열리는 도시에선 고대와 같이 그 향연을 마음껏 즐기려는 자들로 인해 술의 판매량이 급증할 것입니다. 지금 파리의 카페와 레스토랑들도 올림픽 기간 중 영업을 위해 와인과 맥주의 물량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것입니다.
올림피아의 고대 올림픽 경기장 출입구
기독교가 끝낸 고대 올림픽
천년을 넘게 지속된 고대 올림픽은 393년 종료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로마에서 끝난 것입니다. 신흥 종교인 기독교가 그것을 끝냈습니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인은 문화적으로 우월한 그리스의 많은 것들을 계승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는 그대로 로마 신화가 되었습니다. 문패만 라틴어로 바꾸어 달아 제우스는 유피테르가 되고 그의 부인 헤라는 유노가 된 식입니다. 영어로 주피터와 주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의 신들을 그대로 섬기게 되니 그 신들을 위한 제전인 올림픽도 로마 시대에 계속해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저 아래 유대 속주에서 발원한 기독교가 탄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교세를 확장하더니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엔 공인을 받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때엔 국교로까지 승격이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추락하였습니다.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의 우군인 타이탄족과의 10년 전쟁인 티타노마키아에서 승리해 패권을 잡았던 제우스와 그의 수족인 올림포스의 신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40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선 패한 것입니다. 그간 나라는 바뀌어도 창씨개명을 하며 호강을 누려왔던 그들은 이제 뒷방으로 밀려나 신화 속 가십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을 찬미하던 제사와 제전도 모두 중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올림픽은 기독교가 국교로 된지 불과 1년 후인 393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은 올림픽 대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손자인 같은 이름의 2세는 할아버지보다 한 발 더 나아가 426년 이교신전파괴령을 공표해 제국 내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이교도의 신전을 파괴하였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대로 우상 숭배를 원천적으로 막는 조치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피아의 올림픽 신전과 유물 등도 이때 큰 피해를 당하여 상당 부분 훼손되었습니다. 불행은 더해져 그렇게 박대를 받았던 올림피아의 유적들은 6세기 경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그리스의 올림피아가 그런 인적, 자연적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고대의 수많은 스포츠 영웅들과 그의 기록들을 열람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시 함께 벌어진 문학과 철학, 예술 행사 등의 기록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렇게 신화처럼 꺼져버린 고대 올림픽이 지하에서 미라 상태로 깊게 잠들어 있다가 장장 1,503년이 지난 1896년 한 모던 프렌치에 의해 부활한 것입니다. 신화시대에 제우스가 만년 지하 감옥인 타르타로스에 갇힌 신들을 꺼내어 주었듯이 이번엔 쿠베르탱 남작이 올림픽을 꺼내어 준 것입니다.
이교신전파괴령과 지진으로 34개의 기둥 중 단 한 개만 남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출처, 위키피디아)
도시가 주최하는 국가대항전 올림픽
올림픽은 월드컵과는 달리 개최 장소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도시가 됩니다. 당연히 1924년부터 별도로 분리되어 시작된 동계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1988년 24회 서울 하계 올림픽과 2018년 23회 평창 동계 올림픽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개최한 것이 아니라 지자체인 서울과 평창이 개최한 것입니다. 하지만 개최의 주체는 그렇다 쳐도 올림픽의 유치와 개최엔 해당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파리 올림픽에 파리 시장은 물론 국가수반인 마크롱 대통령까지 센강에서 팬티만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나선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이벤트로 꼽히는 엑스포도 도시가 주체가 되어 실시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실패한 2030 부산 엑스포처럼 말입니다.
서울시는 현재 203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출사표를 던진 상태입니다. 글로벌 톱5 도시를 목표로 올림픽을 두 번 개최하는 도시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036년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개최 경쟁이 본격화되면 서울시는 그 사실을 전 세계에 어필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고, 시상대에서 애국가 대신 기미가요를 들은 손기정 선수의 개인 마케팅을 겸한 도시 마케팅과 국가 마케팅까지 동시에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는 지금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주 경기장이었던 잠실 운동장 리모델링과 주변 경기장의 신설 공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2036년 그 올림픽도 염두에 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8년 올림픽은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2032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리즈번으로 확정된 상태입니다.
24회 근대 올림픽인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이번 파리 올림픽에 우리나라는 양정모 선수가 대한민국 최초로 금메달을 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역대 최소 인원의 선수단이 참가합니다. 현재 확정된 출전 선수가 21개 종목의 142명에 불과하니까요. 가장 많은 선수가 참가한 대회는 역시 우리가 개최한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당시 477명이 출전했습니다. 그 이후로 200명 이하는 이번 파리 올림픽이 처음입니다. 축구와 배구 등 단체 구기 종목에서 출전권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출전 선수가 적은 만큼 좋은 성적을 내기도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양궁, 펜싱 이외에 최근 부상하는 수영, 근대5종, 클라이밍 등 신흥 종목에서 선전을 한다면 톱10 진입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룰 뜨거운 7말8초에 파리에서의 시원한 낭보를 기대합니다. 그간 애쓴 우리 선수들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7월 26일 개막일 센강 위를 가르는 태극기와 우리 선수들이 그려집니다. 다시 심장이 뜁니다.
* 위의 글 중 고대 올림픽 부분은 1년 전 이곳에 게재한 <기독교가 퇴출시킨 고대 올림픽> 내용 중 일부를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