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과학의 시작점인 된 1666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엔 날씨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사과가 나무에서 스스로의 무게로 '툭'하고 떨어질 정도로 무르익으려면 날씨가 좋아야 하니까요. 쾌청한 햇살과 풍부한 일조량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관찰자인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누워있었다는 것도 날씨가 좋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춥거나 비가 오는데 나무 밑에 누워있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그 이전 사과의 성장기엔 과하지 않은 적당한 비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 법칙을 발견한 역사적인 그날, 그 하루만 사과나무 아래 누워있다가 단 한 번의 사과가 떨어진 것을 목격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확률적으론 지속적으로 몇 날이고 누워있다가 반복되는 사과의 낙과를 보면서 '유레카'를 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려면 날씨가 계속 좋아야 합니다. 고로 뉴턴은 그가 살았던 영국의 좋은 날씨 덕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날씨 조건을 갖추진 못한 나라였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덥고 습한 기운이 코 안으로 확 밀고 들어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 기운은 곧바로 땀을 생산해 제 몸을 두른 옷과 몸을 하나로 착 붙게 만들었습니다.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어제와는 다른 불쾌한 기운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불쾌지수(discomfort index)가 올라간 것입니다. 이러한 불쾌지수는 인간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여러 자연환경의 요인들 중에서 온도와 습도를 가지고 그 지수를 매긴 것입니다. 1959년 미국의 조사 연구가인 이씨 톰(E. C. Thom)이 개발했고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환경인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중요 지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도가 높고 습도가 높으면 당연히 불쾌지수는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체로 스트레스가 생성되어서입니다. 그래서 그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낮추어 활동에 적합한 환경으로 개선시켜야 합니다. 습도보다는 온도를 낮추는 에어컨이 가장 신속하고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기일 것입니다.
불쾌지수가 높으면 우리가 요즘 경험하는 것처럼 활동하기도 힘들고 기분이 좋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민감해져서 타인과의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줍니다. 당연히 업무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그 지수를 발표하고 그것을 예방하고 냉난방 조절을 권고하고 강제하기도 합니다. 흔히 불쾌지수가 80이 넘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온이 29도이고 습도가 70퍼센트이면 불쾌지수는 80입니다. 이렇게 습도가 결합된 더위를 가리켜 그냥 더운 것이 아닌 무덥다는 표현을 씁니다. 제가 글을 시작한 8월 첫 주 오늘 서울 한낮 온도는 34도이고 습도는 85퍼센트까지 올라갔으니 불쾌지수는 당연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상당히 무더운 날씨입니다. 조심해야 할 날씨입니다. 특히 실외에선 말입니다.
워털루 브리지에서 바라본 템스강의 아침 전경. 멀리 빅 벤과 런던 아이가 보임
지난 7월 말에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위의 인천 공항에 내린 것의 출발지가 영국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글래스고 공항에서 출발했습니다. 최초의 도착지는 런던이었습니다. 남부 잉글랜드의 런던에서 북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까지 영국의 본토인 브리튼섬을 나름 종단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 글은 영국을 기행하며 느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그 오해를 유발한 최초의 인지 시점인 저의 학창 시절 인문지리 시간에 잘못 받았던 교육에 대해 바로잡고자 쓰는 글입니다. 우린 영국은 살기에 자연환경이 안 좋은 나라로 배워왔으니까요. 늘 비가 오고, 뿌옇게 안개가 끼고, 으스스하게 춥고 습한 나라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머무른 8일 간 그런 날씨는 영국 남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마냥 청명하고 푸르른 하늘만 있었을 뿐입니다. 영국 하면 무조건일 것만 같은 비에 대비하기 위해 우산과 비옷을 단단히 준비해 갔지만 그것들을 꺼낼 일은 없었습니다. 비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뿌리다 그쳤기 때문입니다. 7월 말임에도 최고 온도는 22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은 바로 7월 말 한여름 기후가 이토록 안 덥고 시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짧게 만나는 공활한 하늘이 펼쳐진 가을날과도 같은 영국의 여름날이었으니까요. 짧은 바다 건너 올림픽이 열리는 파리가 있는 서부와 중부의 유럽은 더위 때문에 에어컨 문제로 몸살을 앓고, 심한 경우 스페인 남부의 경우는 한여름 50도 가까이까지 수은주가 올라가는데 영국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이런 날씨를 만난 것은 제가 운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영국의 여름은 늘 그렇다고 하니까요. 6월부터 9월까지의 날씨가 대체적으로 이렇게 10~22도 사이로 최적의 여행철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강수량은 월 50mm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에선 우산까지는 필요 없는 트렌치코트 정도로 비에 대비하며 사나 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올해 유난하긴 했지만 지난 7월 강수량은 400mm에 달했습니다.
그런 온도와 강수량으로 한여름의 영국에서 습도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여행의 본전을 뽑기 위해 15,000보 이상씩 빨빨거리며 걸었음에도 전혀 땀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일 밤 얼굴 세수는 해도 온몸 샤워는 그날은 패스하고 다음 날인 새벽마다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전혀 불편함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루종일 몸은 늘 뽀송했으니까요. 그랬던 저이기에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습함으로 바로 생성된 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덥지 않고 습도도 없으니 영국의 여름엔 불쾌지수가 올라갈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지수는 영국에선 사용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영국식 정원을 갖춘 바스의 로열 크레센트 내 호텔
여름이 무덥지 않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으로 볼 때 대단한 어드밴티지일 것입니다. 무더위는 인간을 지치게 만들어 그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을 저하시키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든 생각입니다. 영국이 역사상 남들보다 먼저 과학 문명이 발달해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그 문명의 힘으로 세계를 제패해 대영 제국을 이루고 1등 선진국이 된 것엔 바로 이런 자연환경의 영향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 인트로에서 절반은 우스갯소리로 날씨를 개입시킨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예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과거에도 긴 여름이 이어지는 기간 동안엔 느리게 일이 진행되거나 아예 일손을 놓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점부터 회사나 학교는 문을 닫고 휴가나 방학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캉스(vacance)가 한여름 프랑스인들이 더위를 피해 그가 사는 도시를 비우고 남부 지중해 바닷가로 피서를 떠나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마도 파리 올림픽이 끝나는 순간 파리지엔느들은 올림픽 때문에 미뤘던 바캉스를 미련 없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단어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영국인들의 피서는 접경 국가인 프랑스와는 달리 왠지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그들이 여름에 어디로 피서를 간다는 뉴스나 4면이 바다임에도 영국의 유명 피서지가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 대학의 학제가 타국과는 달리 3년제인 것도 이런 문제없는 여름을 이유로 해서 채택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들은 7~8월에도 마음만 먹으면 공부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요.
이렇듯 무더위는 인류의 적입니다. 인간이 가진 능력과 그것이 발현되는 생산성을 가로막는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더위가 이어지는 나라, 여름만 있는 나라들 중에서 선진국에 오른 나라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적도와 가까워질수록 문명화 지표는 반비례로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지치고 무기력해져 인간의 신체 활동과 뇌의 활동이 느려지고 무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같이 무더운 날엔 집중력의 저하로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블 영화에 나오는 아프리카 대륙의 초문명국 와칸다는 말 그대로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나라일 것입니다.
요크의 성벽길에서 바라본 요크 대성당. 앞은 고택을 개조한 호텔
인류는 이 무더위를 인위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왔습니다. 쿨링 시스템을 개발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물과 바람을 이용한 팬으로만은 한계가 있어 완전하게 극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1902년 캐리어(Carrier)란 미국인이 그의 이름을 딴 에어컨을 발명하기 전까진 말입니다. 20세기 초 에어컨이 발명되며 인류의 생산성은 획기적으로 올라갔고 생활 영역도 넓어졌습니다. 당장 캐리어의 조국 미국만 보더라도 플로리다주의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라스베이거스가 개발되었습니다. 뉴욕을 비롯한 동부에 살던 은퇴자들이 대거 플로리다주로 이주했고 도박과 유흥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그 사막 도시로 향한 것입니다. 에어컨이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이런 문제에 있어 그 이전부터 자유로웠으니 다른 문명국가보다 경쟁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엔 에어컨의 출현으로 모든 국가가 동등한 생산성을 보이게 됐다곤 하지만 에어컨이 실외까지는 커버할 수는 없기에 적어도 여름만큼은 여전히 영국이 유리할 것입니다.
여름을 논하는 김에 영국의 겨울도 한번 보겠습니다. 이 글에선 국가의 과학 문명 발달 과정과 계절을 연계해서 상관성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그렇다면 여름 더위 이상 가는 장애라 할 수 있는 겨울 추위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상 모든 생산성을 땅에 의존했던 과거 겨울은 오로지 생존에 집중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생산은 고사하고 그만큼 겨울을 넘기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겨울잠을 자는 곰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생산은 멈추었어도 농경이든 수렵이든 다음 봄을 위한 준비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겨울은 작업을 중단했던 시기였기에 역사상 겨울에 전쟁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농사든 목축이든 생업에 종사했던 자원들을 모집하기 쉬운 기간이었으니까요. 일본 전국 시대엔 특히나 겨울 전투가 많았습니다. 16세기 전후 120여 년간 봄여름가을엔 농사를 짓고 겨울엔 전투하는 식이었습니다. 당시 전쟁 유발자였던 다이묘들은 이듬해 새로 획득한 영지에서 그들 권력 크기를 상징하는 쌀 수확량을 늘리곤 했습니다.
저는 과거 회사 재직 시 출장으로 11월과 3월에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런던에서만 체류했었습니다. 일단 보듯이 그 시기가 한겨울은 아니었습니다. 통상적인 늦가을과 초봄을 경험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나라와는 달리 런던에서 쌀쌀한 한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한겨울인 12~2월 런던에서 거주한 지인들의 말을 빌어도 런던의 겨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지 않다고 합니다. 일단 아무리 한겨울도 영하로 내려가진 않으니까요. 런던의 1월 평균 기온은 영상 2~7도입니다. 강수량은 여름과 비슷한 50mm 수준으로 비슷하지만 춥지 않으니 눈 대신 비가 내립니다. 대신 그 비는 포근한 눈과는 달리 차게는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온도가 낮은 것은 아닙니다. 51.5도의 위도로 37도의 서울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안 추운 것입니다. 서울은 1월 평균 영하 8도~영상 2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세 마을 코츠월드에서 장난감 오리 경주를 즐기는 관광객
사실 런던도 그렇지만 서부와 중부 유럽은 대체적으로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런던과 거의 같은 위도인 베를린의 경우 1월 평균 기온은 영하 2도~영상 3도입니다. 하지만 내륙인 동쪽으로 가서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2도~영하 6도에 달합니다. 55도의 위도로 런던, 베를린보다 조금 높을 뿐인데 말입니다. 과연 181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만세를 부르고 제 발로 물러나게 했던 동토의 땅입니다. 더 동쪽 끝 태평양까지 도달하면 블라디보스토크가 1월 평균 영하 16도~영하 9도로 추위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위도상으로는 런던보다 남쪽인 48도로 프랑스의 파리와 비슷한데 그렇게 추운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은 멕시코 만류의 영향입니다. 영국은 한겨울에도 그 난류가 브리튼섬을 빙빙 돌고 있어 덜 추운 것입니다. 북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조차 1월 평균 기온이 런던과 비슷한 2~7도이니까요.
이렇듯 여름에 안 덥고 겨울이 덜 추우니 영국은 과거 냉방과 난방 시설이 개발되기 전부터 경쟁국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생산성에서 차이를 보이는 여름이 덥지 않았던 것은 남들보다 큰 축복이었습니다. 겨울이야 나무나 석탄 등의 불로 어떻게 하든 실내의 경우 온도를 높일 수 있었지만 여름엔 물을 사용해도 더위 제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인들은 일찍이 그런 환경에서 과학 문명을 발달시켜 산업혁명을 이루어 남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혁명의 아버지인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전 국토에서 양을 치던 목축의 나라가 목장의 울타리는 사라지고 그곳에 공장이 세워져 근대 공업 국가로 가장 먼저 변신했으니까요. 그 증기 기관으로 기차와 철도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은 인류의 또 다른 숙제인 교통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습니다.
영국은 그들의 신문명을 바다 건너 대륙으로 전이시켜 다른 유럽의 국가들을 팔로우어로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경쟁국들은 그 기술을 전수받아 그때부터 출발을 시작한 것이니 당연히 따라잡는 데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엔 동등하게 발전되어 왔던 유럽의 국가들이 마치 결혼할 때 자가 소유의 집을 갖고 시작하는 신혼부부와 임대로 시작하는 신혼부부 사이엔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영국 이니셔티브의 새로운 근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이라 부르는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힘으로 영국은 세계로 뻗어나갔고 그것을 과시하는 세계만국박람회를 가장 먼저 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날씨를 바탕으로 국민의 여가에 기여하는 축구, 골프, 럭비, 테니스, 배드민턴, 크리켓 등으로 스포츠 분야에서도 혁명을 이루었습니다. 모두 실외 스포츠입니다.
골프의 성지인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류스 GC 올드 코스의 쾌청한 정경
물론 잦은 비와 안개, 그리고 겨울엔 낮이 짧아 생활이 불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더위와 추위에 비하면 부차적인 핸디캡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날씨로 인해 영국은 과학의 선진성에 비해 음악과 미술 등의 예술적 성과에선 대륙의 다른 국가들보다 뒤졌을 것입니다. 일단 우리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악가는 엘가 정도뿐이니까요. 헨델은 독일에서 귀화했으니 정통 영국 음악가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음악은 중부나 동부 유럽의 찬바람 부는 날씨에 책상에 앉아 외투 깃을 세우고 작곡에 전념하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강세였습니다. 미술의 경우도 빛과 관련이 있기에 사시사철 햇살이 강한 프로방스를 가진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전통적으로 강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국은 독일의 한스 홀바인이나 벨기에의 반 다이크 등을 수입해서 궁정 화가로 고용했습니다. 영국 화가로는 윌리엄 터너, 존 엣킨슨 그림쇼 정도가 떠오릅니다. 물론 라파엘전파로 활동했던 일단의 화가들도 있긴 했습니다.
문학의 경우는 좋은 날씨에 더해 우울한 기운까지 감돈 영국의 자연환경이 이점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낭만주의의 시조인 워즈워드의 <무지개>는 영국의 비와 해, 하늘이 만든 것이니까요. 바이런, 테니슨, 브라우닝 등의 시인들과 셰익스피어, 브론테 자매, 제인 오스틴, 디킨슨, 스콧 등의 뛰어난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산업이 평준화되기 이전인 20세기 이전의 작가들입니다. 오늘날엔 자연환경과 문예의 상관성이 과거보단 낮을 것입니다. 실내 환경도 개선되었지만 작가가 원하면 어디든 옮겨 가서 작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브리튼섬이라 불린 고대 영국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과도 같은 원주민이 살았을 것입니다. BC 6세기 그 섬에 유럽 대륙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던 켈트족이 건너갔습니다. 이후 남부 유럽의 로마인인 라틴족이 들어가 그곳을 점령하고 브리타니아 속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프랑스인 갈리아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55년 경 그곳을 두 번 방문했습니다. 그 로마인들은 먼저 들어와서 살고 있던 켈트족들을 몰아붙여 서쪽 끝, 북쪽 끝, 그리고 바다 건너 섬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오늘날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시들해지며 410년 라틴족은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했습니다. 이후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브리튼섬의 주인은 서부 유럽에서 건너간 앵글족과 색슨족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잉글랜드의 주류가 되는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입성입니다. 그들은 7개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민족의 침략은 지속되어 이번엔 북부 유럽에서 바이킹이 그 섬을 노리고 남하했습니다. 특히 오늘날 덴마크인의 조상인 데인족의 침략이 거셌습니다. 하지만 9세기 알프레드 국왕이 바이킹을 물리치고 잉글랜드 왕국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이후에도 바이킹의 침략이 계속되는 가운데 프랑스인 노르망디에서 건너간 윌리엄이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열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어지는 영국 왕가의 시작입니다. 이후 영국은 여러 왕조를 거치며 프랑스와는 왕위 계승과 영토 문제로 침략을 주고받는 역사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 후로 영국에 상륙한 민족이나 나라는 없었습니다. 전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앵글로색슨족인 영국이 강대해져 세계로 뻗어나가는 반대의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런던의 중심 트라팔가 광장에서 오늘도 영국의 바다를 수호하고 있는 넬슨 제독
간략한 영국의 민족 이동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보듯이 고대로부터 영국은 유럽 전역에서 그 땅을 탐냈던 여러 민족들의 많은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이유는 그만큼 살기 좋아서였을 것입니다. 오로지 자연환경에 의존했던 과거에 그곳이 살기에 나쁘거나 불편했다면 그렇게들 목숨을 걸고 탐을 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특히 주목할 것은 로마 제국이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지중해를 내해로 가장 살기 좋은 곳들까지만 침공해서 그들의 제국으로 삼았었으니까요. 그런데 브리튼섬은 북쪽에 위치했음에도 막상 가서 보니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 하이랜드까지 광활한 목초지가 저지대로 끝없이 이어져 농경과 목축에도 적합한 땅이라 그들의 속주로 삼았을 것입니다. 12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브리타니아 북쪽의 방벽은 아마도 로마 제국의 최북단 국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북쪽도 살기에 좋았다면 로마는 바이킹이 살던 덴마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진격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또 하나 지표인 인구 측면에서 보아도 영국의 인구는 6천8백만 명에 달하는 대국입니다. 프랑스는 6천5백만 명, 독일은 8천3백만 명으로 인구로도 그들은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의 빅 쓰리입니다. 과거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공 등 많은 나라로 자국의 국민을 이주시켰음에도 영국은 이렇게나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토로 보면 프랑스, 독일, 영국 순으로 3국 중에선 가장 작습니다. 그러함에도 인구가 많다는 것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고 그만큼 유럽에서 살기 좋았던 땅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지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습하고 춥고 뿌연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가진 나라 영국입니다. 특히 인간이 활동하기에 가장 힘든 여름이 가장 행복한 나라입니다. 이 글을 마친 8월 8일 현재 런던의 최고 기온은 22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