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유럽의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도 뜨겁게 가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갈수록 올라가는 수은주 때문도 그렇지만 연이은 대형 스포츠 대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TV 화면을 달구는 파리 올림픽은 지난 7월 26일 개막식부터 8월 11일까지 이어집니다. 그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인 6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유럽은 한 달간 축구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프랑스 바로 옆 국가인 독일에서 열린 UEFA 유로 2024 대회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회는 월드컵을 주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이 아니라 유럽축구연맹(UEFA)이 주관하는 대회로 유럽 국가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유럽인들에게 그 대회의 열기는 현재 올림픽보다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축구에 광적인 사람들이니까요.
그들 중 혹자는 유로 대회를 세계 국가 대항전인 월드컵 이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국가가 일정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유럽 축구로 볼 때 그럴 법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유럽 축구의 열기와 배타성은 유럽의 지나온 역사 속에서도 연유합니다. 유럽이 오늘날과 같은 국가로 지도 위에 안착되기 전 그들은 타 대륙 대비 좁은 그 땅을 놓고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르었는데 지금은 일정 부분 축구가 그 역할을 대리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즉, 국가 간 지역 간 전쟁을 막아주는 방패막 역할을 축구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구에 목숨을 겁니다.
지난 7월 15일 열린 유로 2024 대회의 결승전은 영국과 스페인의 대전이었습니다. 아니 영국이 아니고 잉글랜드였습니다. 축구의 강국 간에 붙은 흥미로운 경기였는데 우승컵은 스페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경기가 열리기 직전 매우 흥미로운 지도가 SNS를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유럽의 국가들이 잉글랜드와 스페인 중 어느 나라를 응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응원 지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그 지도에서 보듯이 유럽의 많은 나라들 중 잉글랜드를 응원하는 국가는 자국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많은 나라들 중 잉글랜드 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렉시트의 영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무튼 유럽의 모든 국가가 그 전쟁과도 같은 결전에서 잉글랜드의 적으로 등장했습니다.
SNS에 등장한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UEFA 유로 2024 결승전의 유럽 응원 지도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스페인을 응원하는 나라들 중엔 영국을 구성하는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도 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영국이라는 국가엔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그 지역들도 한 국가로 되어있는데 그들이 모두 자국의 구성원인 잉글랜드보다는 스페인이 이기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또는 적어도 잉글랜드가 우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선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응원 지도가 정밀한 조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누군가 만든 일종의 짤이었겠지만 이 사실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그런 나라이니까요.
라이언 긱스라는 축구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EPL)의 최고 구단인 맨체스타 유나이티드의 전성기인 90년대부터 2015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그 구단의 전설로 평가받는 선수입니다. 우리 박지성 선수와도 잘 아는 사이일 것입니다. 그런 선수임에도 그는 유럽 국가 대항전인 위의 유로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월드컵도 한 번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조국이 잉글랜드가 아니라 웨일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웨일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그가 선수 생활 시절엔 본선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는 인기와 기량이 높은 그를 월드컵에 나가게 하기 위해 귀화를 강력히 종용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나서서 그가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월드컵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여타 선수들처럼 축구 선수로서 그의 꿈도 유로 대회와 월드컵 무대에 서는 것이었겠지만 그의 조국이 웨일스이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위해선 뛰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잉글랜드 사람이었음에도 가정사로 인해 웨일스 사람인 어머니의 나라를 조국으로 선택한 그였습니다. 그런 그의 신념대로 지조를 끝까지 지킨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뛴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에겐 그저 외국의 직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박지성 선수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그는 웨일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영국이라는 한 국가 안에서 귀화를 논하다니요? 더 이상한 것은 그도 올림픽엔 영국 대표로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계속 이상하지만 이 사실들이 꼭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그런 나라이니까요.
주지하듯이 영국의 영어 국가명은 유케이(UK)입니다. 이 UK는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약어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명을 가진 나라입니다. 킹덤인 것은 공화국이 아닌 왕이 있는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어서입니다. 킹덤을 이끄는 현재 왕은 찰스 3세입니다. 보듯이 4개의 국가 연합인 UK에서 북아일랜드는 별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국가명에 보이지 않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섬나라인 영국의 본토인 그 큰 섬의 이름이 브리튼 섬이기에 그것을 칭하고 그곳에 그레이트를 붙인 것입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을 브리타니아라 부르며 그들의 속주로 삼았습니다. 유나이티드 킹덤이니 찰스 3세는 이 4개 국가의 통합왕인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그들의 전성기였던 시절을 대영 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국명에 있는 그 그레이트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당시 정확한 대영 제국의 명칭은 브리티시 엠파이어(British Empire)였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대영 박물관이라 부르는 곳도 사실은 영국 박물관이 맞습니다. 그 박물관 문패엔 브리티시 뮤지엄(The British Museum)으로 쓰여있으니까요.
통상 대영 박물관으로 불리는 런던에 소재한 The British Museum 정문
UK에서 북아일랜드를 별도로 표기한 것은 브리튼 섬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본토 옆 아일랜드 섬의 북쪽 지역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또한 4개의 구성 국가들 중 가장 나중에 영국에 편입되어서도 따로 명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북아일랜드 남부엔 그 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영어로는 아일랜드이고 아일랜드어로는 에이레인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도 한때는 영국이었습니다. 지금은 독립해서 왕정이 아닌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4개 국가의 연합인 UK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잉글랜드였습니다. 잉글랜드가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순차적으로 그들 왕국에 복속시켜 연합 왕국인 UK가 된 것입니다. 그 잉글랜드가 한자로 음차된 국가가 우리가 부르는 영국(英國)입니다. 애초엔 영길리(英吉利)였습니다. 프랑스를 불란서(佛蘭西)라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편적으로 통합 영국인 UK를 영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국은 잉글랜드도 되고 UK도 되는 것입니다. 위에 나온 EPL은 엄밀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이지만 영국 프리미어 리그라 불러도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아, 위의 대영 제국의 예에서도 보듯이 브리튼도 영국이 되겠네요. 참으로 복잡한 영국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영국엔 더 많은 영국이 있으니까요. 한때 워낙 큰 부잣집이 시대가 바뀌고 가산이 줄어들면서 재산 정리를 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들로 봐야 할 것입니다.
UK를 구성하는 4개의 나라
다시 올림픽으로 되돌아갑니다. 올림픽엔 GB라는 나라가 출전합니다. 물론 이번 파리 올림픽에도 출전했습니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그 나라의 수도는 이번 파리가 세 번의 올림픽을 개최하기 이전엔 올림픽을 세 번이나 개최한 유일한 도시였습니다. 그 나라는 영국이고 그 도시는 런던입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이은 2024년 파리,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으로 이 세 도시는 올림픽 역사상 세 번을 개최하는 트리오 시티로 등극했습니다. 이것은 영국, 프랑스, 미국이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GB는 보듯이 Great Britain의 약자로 영국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국가명입니다. 국가 대항전인 올림픽에서 영국은 그들의 공식 국가명인 UK로 출전하지 않고 이렇게 GB라는 이름으로 출전합니다. 영국 선수들의 유니폼엔 그들 국가를 칭하는 GB, GBR, Great Britain, 또는 Team GB가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Team GB는 영국의 복잡한 국가 사정을 고려한 일종의 마케팅 브랜드입니다. GBR은 영국의 올림픽 국가 코드입니다. 우리나라가 KOR이듯이 말입니다. 세 글자를 맞추기 위해 Britain의 r까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딜 봐도 어엿한 국명인 UK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영국은 올림픽에서는 UK를 안 쓰고 GB를 사용할까요? 그리고 Team을 붙일 거면 Team UK를 쓰는 것이 온당해 보이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2024 파리 올림픽에 Team GB로 출전하는 영국 (출처, The Sun)
사실 올림픽을 제외한 통상적인 스포츠 경기에서도 UK가 쓰여있는 유니폼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흥행성 높은 종목의 국제 대회, 특히 구기 대회에서 그들은 UK라는 이름으로는 거의 출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의 축구 예에서 보았듯이 영국은 UK이지만 월드컵이든 유로 대회이든 그들은 영국을 구성하는 각각의 국가명으로 출전합니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출전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특권과도 같은 이상한 사실이지만 최초 시점 각각의 출전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나가겠다고 해서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관례적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위세이고 기득권의 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을 주최 측이 받아들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의 경우 축구 종주국의 권위를 내세워 버티다가 4회 대회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출전을 했습니다. 이때 종주국에서 같은 영국이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제외입니다. 그곳에도 각각의 축구협회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골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영국이 골프의 종주국이기에 그렇게 각각의 국가명으로 출전이 허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경우 USA로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주가 각각 출전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종주국이라는 것은 그 경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점도 있지만 그 게임의 룰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존중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럭비와 크리켓의 경우에도 축구처럼 4년마다 각각의 월드컵을 개최합니다. 물론 이 경기들 또한 영국은 각각 4개의 국가명으로 따로따로 출전을 합니다. 영연방에 소속된 56개 국가들(2022년 기준)과 그 종목에 관심 높은 국가들은 그 경기가 열릴 때엔 그 열기가 축구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럭비와 크리켓은 우리에겐 비인기 종목이라 그 세계는 우리가 잘 모릅니다. 제가 과거 광고 현업에 있을 때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으로 해외 촬영을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지 매니저로부터 도저히 호텔 방을 구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멜버른에서 럭비 월드컵이 열리기 때문에 그곳은 난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 럭비 월드컵 소식은 우리나라 언론에 단 한 줄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이지만 올림픽엔 통합 국가명인 GB로 출전하는 것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것은 근대 올림픽을 개최한 IOC가 1896년 1회 대회 때부터 영국이 4개의 개별 국가명으로 출전하겠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서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 올림픽은 어디까지나 국가 대항전이니까요. 더구나 그 올림픽을 만든 사람은 영국과 영원한 라이벌 국가인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었으니까요. 그의 눈에 기존 스포츠 대회에서 보여준 영국의 그런 입장은 꽤나 눈꼴사나웠을 것입니다. 또한 영국 입장에서 봐도 통합 국가명으로 출전하는 것이 나아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올림픽은 축구의 월드컵이나 골프의 브리티시 오픈처럼 개별 종목이 아니라 많은 종목이 출전하기에 통합 관리가 효율성 측면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영국이 왜 UK가 아닌 GB라는 국가명으로 출전하는가는 숙제는 남습니다. 그 자체로도 이상하지만 국가명에서 보듯이 GB는 지역적인 섬을 가리키기에 그 안에는 북아일랜드는 포함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영국의 역사성과 전통이라는 측면에 기인합니다.
각 나라엔 올림픽을 주관하는 협회가 있습니다. 국제올림픽을 주관하는 IOC 산하의 체육 단체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한체육회(KSOC,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가 그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영국엔 영국올림픽협회(BOA, British Olympic Association)가 있습니다. BOA는 영국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적용하고 있는 Team GB를 만든 단체입니다. 이 협회는 1905년에 발족했습니다. 최초부터 UK 올림픽위원회란 이름 대신 지역명을 강조한 브리튼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림픽에 나갈 때 국명도 UK가 아닌 GB로 명명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 GB 안에 북아일랜드는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는 BOA가 Team GB를 만들 때에도 Team UK로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그것은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BOA 입장에서 볼 때 그럴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Team GB를 표방한 2012 런던 올림픽의 휘장
현재 영국은 올림픽 출전 시 과거 대영 제국 시절에 형성된 영국 자치령 중에서 개별 올림픽협회가 없는 지역들의 선수들까지 관장하여 출전시키고 있습니다. 영국의 왕실 속령인 건지섬, 저지섬, 맨섬 등과 해외 영토인 지브롤터, 포클랜드제도, 세인트 헬레나섬 등까지 영국올림픽협회인 BOA가 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의 잔재가 남아있는 곳들로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가 포함된 UK로 정의된 나라에는 포함되지 않는 영토들입니다. 그래서 Team UK로 하면 이들 지역의 선수들은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거부터 사용되어 온 국명인 GB에서 비롯된 Team GB를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드를 귀히 여기는 영국이기에 유지하고 있는 전통과 해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북아일랜드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 시 국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본국 개념이 되어버린 GB란 나라로 출전할 수도 있고, 그들이 사는 지역의 본래 주인인 아일랜드란 국적으로도 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흥미로운 영국의 올림픽 출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본토인 잉글랜드에서 건너가 성공회를 믿는 후손들은 영국 국적인 GB를 선택할 것이고, 카톨릭을 믿는 본래 아일랜드인의 후손들은 아일랜드(에이레) 국적을 선택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아일랜드와 영국,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종교와 크게 관련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올림픽 출전 시 북아일랜드 선수들에게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재량권을 준 것은 아일랜드의 헌법에서도 기인합니다. 1999년까지 아일랜드의 헌법 2조에는 "아일랜드의 영토는 아일랜드섬 전체와 그 부속도서 및 해역으로 간주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1921년 영국에서 독립하며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 넘어갔지만 아일랜드는 그곳까지 그들의 영토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에 준해 그 이전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영국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한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선 영국이 그들의 영토 북쪽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지역적으로 북한까지를 대한민국 영토로 정의하고 있는 우리나라 헌법과도 같은 케이스라 하겠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 올림픽에서 북아일랜드 선수들은 아일랜드를 출전국으로 선택할 수 있음
하지만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을 통해 아일랜드의 헌법에서 영토에 대한 이 조항은 사라지고 대신 3조에 "아일랜드의 통일이 민족의 확고한 의지임을 선언하되 통일은 아일랜드 전체 주민의 동의를 거쳐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즉, 현재는 영국 영토로 되어있는 북아일랜드이지만 모든 주민이 원한다면 다시 하나의 아일랜드로 과거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적인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이 또한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통일 방안과 비슷한 방향일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인해 북아일랜드 선수들은 올림픽 출전 시 그들 지역이 빠진 영국인 GB와 같은 지역인 아일랜드 중 원하는 국가를 선택하여 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잉글랜드는 웨일스를 1542년 침략을 통해 복속시켰습니다. 6번의 결혼으로 잘 알려진 헨리 8세의 업적입니다. 그래서 웨일스는 진작부터 잉글랜드의 영토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1707년 잉글랜드의 앤 여왕 시절 양국의 필요에 의해 연합법(Acts of Union)을 발효시켜 통합을 하였습니다. 그레이트 브리튼(GB) 왕국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는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주민 투표를 통해 UK에 편입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가 웨일스와는 달리 분리 독립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잉글랜드가 정복한 것이 아니라 양자의 합의에 의해 통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의 이익이 확실하게 크거나,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면 다시 분리될 소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들로 위의 유로 2024 축구대회에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보다는 스페인을 응원한 것입니다. 합의였지만 그 이전부터 감행되어 온 침략과 괴롭힘의 결과로 이루어진 결과였기에 그렇습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침략으로 완전 병합이 되어서 분리를 논하기는 힘들지만 위의 라이언 긱스의 예에서 보았듯이 민족 감정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잉글랜드는 정복국이었으니까요. 영국엔 웨일스와 유사한 콘월이라 불리는 제5의 나라 아닌 나라도 하나 더 있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에 GB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웨일스의 축구 영웅 라이언 긱스
잉글랜드의 유니폼을 입고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의 출전을 거부했던 웨일스의 라이언 긱스는 평생 꿈이었던 국제 대회에 드디어 출전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39세가 되던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였습니다. 올림픽에선 잉글랜드가 아니라 GB라는 통합 영국 대표로 출전하기에 Team GB의 일원으로 출전을 영예롭게 받아들이고 주장 완장까지 찬 것입니다. 그동안 잉글랜드라는 이름으로 출전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GB 안엔 그의 조국 웨일스도 포함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개최지인 런던은 그에겐 잉글랜드의 수도가 아니라 GB 또는 UK의 수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그 대회엔 잉글랜드의 축구 영웅인 데이비드 베컴도 강력하게 출전을 희망했으나 체력 문제로 출전이 좌절되었습니다. 라이언 긱스보다 2살 어린 그였는데 말입니다.웨일스인들은 그런 라이언 긱스를 통해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축구팀은 그 GB 축구팀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올림픽협회(BOA)는 그간 올림픽에 GB라는 이름으로 출전하며 뭔가 부족함을 느껴 1999년 늦게나마 Team GB라는 올림픽용 국가 브랜드를 개발했을 것입니다. GB 안엔 공식 국명인 UK의 통합 아이덴티티가 빠져있다고 생각되었을 테니까요. 그런 그레이트 브리튼(GB)에 Team이라는 단어를 넣음으로써 통합이 강조되었습니다. 4개의 국가이지만 올림픽에서 Team GB로 원 팀 스피릿을 노린 것입니다. 이렇듯 가뜩이나 얘깃거리 많은 영국에 올림픽의 GB까지 더해져 더욱 흥미로운 나라 영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