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란 인천에선 어린 시절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서양인입니다. 개화기 제물포항을 통해선교사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이 들어왔고, 6.25 전쟁 시 인천상륙작전 때에도 많은 외국인이 들어왔음에도 1980년대까지 그 큰 도시에서 외국인을 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고 시절까지는 멀리서 외국인이 보이면 뛰어가서 보는 친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몰몬교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만큼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울이라 해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1992년 제가 회사 연수로 해외로는 처음 나간 일본의 도쿄에서 가장 놀란 것들 중의 하나는 외국인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은 그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물론 역시 외국인인 우리 일행에게도 그랬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우리 일행이 우리말로 떠들어도 주변에서 쳐다보는 일본인은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반대의 경우라면 우린 그때 한 번쯤은 고개를 돌렸을 시절입니다. 확실히 당시 도쿄는 이미 국제화된 도시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서울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2주 아주 오래간만에 연속적으로 두 번이나 북촌 한옥마을을 방문해 인산인해를 이룬 외국인을 보고 놀라서 떠올린 과거였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에 어느 날 외국인이 대량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특정 국가가 아닌 무려 160여 개의 국가에서 일시에 몰려들었습니다. 1988년 9월에 열린 제24회 서울올림픽 때였습니다. 당시 방문한 외국인은 참가 선수만 8,400여 명이고 각 국의 관계자와 기자단, 그리고 순수 경기 관람자와 관광객까지 합해선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관광객만 24만 명이 넘게 다녀갔으니까요. 그래서 88서울올림픽은 당시엔올림픽 역사상 역대 최대, 최다 올림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올림픽 역사상 최고 흥행을 기록했던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정경 (1988. 9. 17)
그 이전까지 23회를 치른 올림픽(하계)은 선진국, 또는 강대국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리스와 같이 올림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나라와 멕시코 정도만이 그 리그에서 예외적인 국가였습니다. 그런 그들만의 리그에 생경해 보이는 아웃사이더인 아시아 동쪽 끝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과 도시인 서울이 들어간 것입니다. 1896년부터 시작된 근대올림픽 100여 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2024년 오늘날 우리나라를 연상하면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81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의향서를 제출할 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GDP)은 1,700달러 정도였습니다. 일본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치를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그간 물가 수준을 비교하면 매우 큰 차이일 것입니다. 일본은 그때도, 아니 그 이전부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들어가 있었으니까요. 1988년 올림픽을 열던 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4,748달러, 일본은 25,059달러였습니다. 5배의 차이가 났습니다. 이런 열등한 상황에서 우리는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입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을 치른지 35년이 지난 202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근소하게나마 일본을 추월했습니다. 일본은 2012년 50,000달러를 넘기며 정점을 찍더니 이후 하락세를 보여 전년도인 2023년 35,793달러를 기록했고 우리나라는 36,194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슈퍼 엔저의 영향도 있다곤 하지만 격세지감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일본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1981년 당시 올림픽 유치전에서 서울의 경쟁 도시가 일본의 중경(中京)이라 불리는 나고야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압도적인 격차를 극복하고 서울이 나고야에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무려 52 : 27로 이겼습니다.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작은 온천 휴양지인 바덴바덴에서 터진 이 뉴스에 우리는 물론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투표장에 들어가 직접 투료를 한 IOC 위원들조차도 놀랐다고 합니다. 서울이 대역전극을 펼친 것입니다. 지금도 제 귀엔 그때 IOC 위원장이었던 사마란치의 '쎄울(Seoul)!'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덴바덴의 기적, 서울이 1988년 올림픽의 도시로 확정되는 순간 (1981. 9. 30)
지난 10월 25일 저는 이 글의 주제인 88서울올림픽과 관련한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재단법인 노태우센터에서 주관한 '노태우 정부 시기 서울 올림픽의 대내외적 의미'란 타이틀의 세미나였습니다. 보듯이 주연은 올림픽이 아니라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서거 3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생전에 이룬 일들 중 올림픽만을 뽑아서 연 세미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10월 26일이 그의서거일이라그날에 맞춰 열린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날 서거한 노 대통령이었습니다.
세미나는 당연히 노 대통령 재임 시절 주요 인사들이 주도하였습니다. 그들 중 노 대통령과 함께 올림픽에 관여한 인사들이 유치 과정과 준비 과정, 그리고 올림픽 D데이와 자체 평가에 대해 발표를 했고 학계의 교수들이 발표와 토론을 통해 그것의 대내외적인 의미와 해석을 발표했습니다. 그 세미나를 통해 제가 몰랐던 88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부는 이 글에 포함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 때였습니다. 대망의 1980년을 바라보며 70년대 국가 슬로건이었던 '1인당 국민 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 조기에 달성되자 그 자신감으로 올림픽 유치를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을 중심으로 올림픽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박 대통령이 그 해 10.26 사태로 서거하자 1980년 1월 최규하 대통령이 포기를 선언하면서 백지화되었습니다. 올림픽을 발의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유야무야가 된 것입니다. 당시 국력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추진하기 힘든 올림픽을 그런 비상 상항에서 안고 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올림픽은 새롭게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순식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국내와 국외의 관심을 끌면서 국가를 단번에 도약시킬 수 있는 해결사로 국제적인 이벤트인 올림픽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것엔 1964년 도쿄올림픽으로 경제 부흥을 이룬 일본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1981년 2월 88서울올림픽 유치 의향서가 IOC에 접수됩니다.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무총리부터 올림픽 망국론을 내세우며 유치에 반대를 했습니다. 1976년 올림픽을 개최한 캐나다의 몬트리올의 경우 2조 원이 넘는 대형 적자를 기록했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올림픽 유치 성공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의 우리 국력으론 유치가 불가능한데 왜 헛일을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이전 23회 동안 올림픽을 유치했던 15개국들의 면면을 보면 이상할 것이 없는 반대였습니다. 그 와중에 경쟁자인 부자 나라 일본의 나고야는 일찍부터 유치 운동을 해서 이미 앞으로 한참 나가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IOC 위원조차 현재 우리 표라고 해봤자 미국과 대만 정도로 3표에 불과하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자국에 던지게 될 1표 포함입니다.
한편에선 국민들의 반대 여론도 높아갔습니다. 국가적인 대형 개발 사업과 메가 이벤트를 거행할 때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반대가 서울올림픽 유치 때에도 등장한 것입니다. 최근 파리올림픽에서 센강의 수질 문제로 파리 시민들이 반대했듯이 말입니다. 휴전선 너머 북한은 반대를 넘어 방해 공작까지 실시하였습니다. 에이즈 창궐 등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우리나라와 서울을 깎아내린 것입니다. 평양과 서울이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제안이 먹혀들지 않자 태세를 전환한 북한이었습니다. 북한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등을 일으키며 집요하게 국내 정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가장 우려했던 올림픽 기간 중에 북한의 테러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최 측은 끝나는 날까지 가슴을 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올림픽이 개최될 때 참가한 국가들 중엔 우리와는 미수교이고 북한과는 수교한 나라가 무려 25개국이나 참가했습니다.
88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점화된 성화 (1988. 9. 17)
올림픽 유치에서 당시 정부의 책임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1981년 군에서 예편하자마자 그는 제2정무장관의 신분으로 그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유치가 성공한 후엔 초대 체육부장관과 대한체육회장, 올림픽조직위원장 등을 거치며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각계각층의 반대 의견을 정리해 가며 올림픽 유치 작업과 올림픽을 준비해 나간 것입니다. 위의 북한의 테러 등으로 88서울올림픽 개최가 무산 위기에 빠질 때엔 IOC로 직접 날아가 그것을 무마하기도 했습니다. 88서울올림픽의 안전을 자신하며 올림픽이 열리지 못한다면 잠실 스타디움은 IOC 위원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결기까지 보여줬습니다.
1981년 유치전에선 기업인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투표를 위해 바덴바덴에 와있던 IOC 위원들의 호텔 방에 매일 아침 꽃다발을 보낸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갯잇송사의 주도권을 쥔 위원들의 부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짜낸 감성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그런 다방면의 노력과 우리 민족 특유의 빨리빨리 추진력과 위기 돌파 능력으로 우리의 서울은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 승리했습니다. 그것엔 그때 국제 정세에서 갈수록 영향력이 세지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여러 강대국의 심리도 작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커나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 브랜드인 미즈노와 아식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아디다스는 물밑 로비를 통해 나고야의 유치를 방해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우주의 좋은 기운이 우리나라로 몰린 것입니다.
그리고 7년 후인 1988년 9월 17일서울올림픽이 개막되었습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란 슬로건에 걸맞게 지구촌 세계인이 서울로 모여 주제가인 '손에 손잡고'처럼 함께 어우러져 한마당 축제를 벌인 올림픽이었습니다. 그 전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인종 차별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불참했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은 동서의 냉전으로 서로의 올림픽을 외면해 반쪽 올림픽으로 전락했는데 비로소 근대올림픽의 아버지인 쿠베르탱 남작이 꿈꾸던 완벽한 올림픽이 열린 것입니다. 그날 올림픽 주무 책임자에서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은 전 세계 시민을 향해 88서울올림픽 개회를 우렁차게 선언했습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88서울올림픽에서 개회 선언을 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1988. 9. 17)
그 1년 전인 1987년 6월 29일에도 노 대통령은 온 국민을 상대로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땐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의 자격으로 한 비장한 선언이었습니다. 6.29선언입니다. 골자는 4.13 호헌을 철폐하고 국민이 원하는 대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직선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5년 단임제인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그 선언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6공화국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6.29선언은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선 6월항쟁을 보고 그것을 수용해 한 것이긴 하지만 그 선언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온 국민이 염원하던 민주주주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롯이 국민의 선택으로만 국가의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6.29 선언을 할 때 노 대통령은 그다음 해 열리기로 되어있는 88서울올림픽도 떠올렸을 것입니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위로 서울에서의 올림픽이 무산될 가능성도 국내외에서 제기되었으니까요. 국가의 커다란 위기가 넘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88서울올림픽은 우리의 민주화도 앞당기는데 기여를 하였습니다. 올림픽도 치르고 민주화도 이룬 것입니다.
88서울올림픽으로 우리나라는 이제 아시아의 변방 국가가 아닌 세계가 주목하는국가가 되었습니다. 세계 그 많은 국가들 중에 올림픽을 치른 16번째 국가가 되었으니까요. 노태우 대통령을 이은 문민정부의 슬로건은 '세계화(Globalization)'였습니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이듬해인 1989년 실시된 해외여행 자유화로 우리 국민과 기업이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되면서 만들어진 슬로건이라 할 것입니다. 동시에 88서울올림픽 때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161개국의 외국인들과 기업들도 많이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몰랐던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결과일 것입니다.
남북 간의 대결에서도 88서울올림픽은 대외적으로 우리가 우위에 선 첫 시점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볼 때 남북한 체제전에서 남쪽의 코리아가 북쪽의 코리아를 완벽하게 이긴 것으로 인지하게 만든 이벤트가 된 것입니다. 일례로 그전까지는 해외에서 'Korean'이라 하면 'North or South?'라고 반드시 물었지만 그로부턴 으레 남한으로 여기곤 했습니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히는 북방 외교도 88서울올림픽이 만든 결과라 할 것입니다. 미수교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을 비롯해 동구권 국가들이 올림픽에 참가하며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기 시작한 것이니까요. 덧붙여 88서울올림픽 직후 동서의 냉전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소련이 개방을 택하면서 소련은 물론 동독을 비롯해 동구 공산권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니까요.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 88서울올림픽이었습니다.
세계 평화의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 88서울올림픽에서의 오륜기 입장 (1988. 9. 17)
88서울올림픽을 치르기 전 우려했던 재정도 2,520억 원의 흑자를 냈습니다. 방송 수입 등을 비롯한 정상수입과는 별개로 올림픽 주화와 선수촌 아파트의 민간 분양 등을 통해 낸 수익이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이래저래 참으로 잘 된 88서울올림픽이었습니다.
지금 서울은 또 한 번의 올림픽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2036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노태우센터의 세미나엔 현재 서울시 정무 부시장도 참석을 했습니다. 그는 88서울올림픽을 공부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또 올림픽을 유치한다면 우리나라와 서울은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요? 이제 서울은 외국인이 꽉 찼는데 말입니다. 일본의 도쿄는 최근인 2021년 올림픽으로 두 번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현재 올림픽(하계) 최다 개최 도시는 3회를 기록한 런던, 파리, 로스앤젤레스(2028년)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은 이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유치 결정부터 신청까지 단기간에 속전속결로 진행해서 단 한 번에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으니 말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나 로마 도시에 비할 바가 안 되는 개발도상 국가와 도시가 만든 놀라운 성공이었습니다. 올림픽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의 결과일 것입니다. 하지만 2018평창동계올림픽의 경우는 그 로마의 격언에 부합했습니다. 세 번의 노력 끝에 유치에 성공했으니까요. 88서울올림픽 이후 로마급의 나라가 되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만사는그것이 정상적인 프로세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6서울올림픽 유치전에선 또 한 번, 단 한 번의 승리를 기대해 봅니다. 1981년 그날의 기적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