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종교전쟁 명예혁명
가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서 그 당사자를 가문 내에서 살해하는 것을 명예살인(Honour Kill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법부의 판단이 아닌 가문의 판단으로 그 구성원이 직접 처형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때 피해자는 그 집안의 딸인 경우가 많습니다. 명예살인은 주로 성(性)과 정조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딸을 참을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 합작해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들 기준엔 천금 같은 자식보다 그 낡고 비뚤어진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벌일 것입니다. 이런 후진적인 명예살인은 여권 의식이 낮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나 중동의 국가들에서 오늘날에도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명예는 혁명도 일으키게 했습니다.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입니다. 혁명이란 이름이 거창하게 붙는 이 혁명은 과연 누구의 명예를, 또는 무슨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을까요? 혁명급 명예이니 대단한 명예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명예혁명은 한마디로 딸과 사위가 작당하여 아버지인 왕을 몰아내고 그 부부가 함께 왕위에 오른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에 역사는 명예혁명이란 아주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군주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시대에 현역 왕인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딸과 사위가 왕좌에 오른 엄청난 사건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응당 있을 법한 양자의 유혈 사태가 없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명예혁명은 원제가 영광혁명(Glorious Revolution)입니다. 그런 부도덕한 사건에 명예이든 영광이든 온당하지 않은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막장혁명이라면 모를까요.
아버지가 딸에게 버림받는 것은 그 이전 60년 전 셰익스피어가 펴낸 <리어왕>을 연상하게 하고, 유혈 사태 없이 왕좌를 넘겨준 것은 1392년 조선 건국 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태조 이성계를 떠오르게 합니다. 또한 유혈 사태 없는 권력 이양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 도쿠가와 막부의 최고 권력자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 1867년의 대정봉환과도 유사합니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교토의 니조성에서 중신들과 회의를 거쳐 264년간 이어온 그 가문의 권력을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진정 쿨가이였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이 두 경우는 권력의 주체가 바뀐 혁명이었지만 영국의 명예혁명은 같은 스튜어트 왕조 내에서의 권력 이양이었습니다. 이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버지는 제임스 2세, 딸은 메리, 그리고 사위이고 남편은 오렌지 공이라 불린 네덜란드 총독이었습니다. 혁명 성공 후 그들 부부는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로 공동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혁명에서 조연은 왕을 저버리고 딸과 사위 편에 선 의회였습니다. 그들이 연합해서 제임스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것입니다.
혁명의 이유는 통상적인 왕의 폭정과는 달리 종교 문제였습니다. 제임스 2세는 재위 기간이 3년(1685~1688)에 불과해 의회와 국민이 신음을 낼만한 폭정을 휘두를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개신교 국가가 된 잉글랜드였지만 이후 왕들이 바뀔 때마다 카톨릭과의 갈등이 이어졌었는데 100년 넘게 이어온 이 갈등과 분쟁이 명예혁명으로 대폭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개신교로 완전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명예혁명은 잉글랜드의 종교전쟁이고 종교혁명이었습니다. 피 한 방울 안 흘렸다는 것이 혁명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위의 조선 건국과 메이지 유신에 명예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의 결과로 조연이었던 의회가 거둔 부수적인 성공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진정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왕과 의회와 국민의 관계가 정확히 정리되었습니다.
그 이전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의 승리로 세운 잉글랜드 공화국(1649~1660)은 그가 죽자마자 무너지고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되었습니다. 찰스 2세는 25년(1660~1685) 동안 통치를 했는데 그 기간 잉글랜드, 특히 런던에선 커다란 비극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흑사병(1665)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런던 대화재(1666)가 발생해 온 도시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대재난이 잇따라 터지면서 런던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갔습니다. 런던의 80%를 날려 보낸 대화재로 흑사병은 사라졌고, 그 잿더미 속에서 런던은 오늘날과 같은 세련된 도시로 리뉴얼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신흥 국교인 개신교와 카톨릭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찰스 2세는 프랑스 공주였던 엄마의 영향과 크롬웰 집권 시 왕자의 신분으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피신 가있었던 영향으로 카톨릭에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의회는 그런 찰스 2세를 견제하고자 카톨릭교도는 공직에 나갈 수 없는 반카톨릭법인 심사율(Test Act, 1673)을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사망 시 성공회 사제의 종부성사를 거부하고 카톨릭 사제 곁에서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카톨릭에 진심이었습니다. 영국의 국교는 개신교인 성공회인데도 말입니다. 동생인 요크 공작은 그런 형의 마음을 알고 왕궁 뒷문으로 카톨릭 사제를 불러들여 형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카톨릭에 더 호의적이었으니까요.
그 동생이 바로 찰스 2세의 후임인 제임스 2세입니다. 난잡한 여자 문제로 유명했던 찰스 2세가 후사가 없이 죽어 동생인 제임스가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선 제임스 7세가 됩니다. 잉글랜드는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튜더의 피가 외가 쪽으로 섞인 메리 여왕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시켰습니다(1567).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입니다.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은 그가 제임스 2세이자 제임스 7세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국가나 의회까지 통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국가를 한 왕이 다스린 것입니다. 이렇듯 한 군주가 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라고 부릅니다.
제임스 2세는 1685년 즉위하자마자 국교인 성공회를 강화해 확고한 개신교 국가가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왕당파인 토리당의 의원을 성공회교도들로 채웠습니다. 그래서 의회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카톨릭에도 우호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어느 종교든 상관없이 잉글랜드에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관용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왕인 찰스 2세 때 제정한 심사율을 무시하고 카톨릭교도들을 공직에 앉히니 의회가 반발한 것입니다. 제임스 2세는 심사율 폐지를 추진하고 카톨릭교도들과 비성공회 개신교 신자들과 함께 양심의 자유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학장에 카톨릭교도를 앉히려고까지 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임스 2세는 55세인 1688년 늦둥이 왕자를 출산했습니다. 왕자의 탄생은 의회에 대단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갓난아기라도 그가 왕위 승계 서열 1위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의회는 장성한 두 딸인 메리와 앤이 모두 개신교도라 그녀들이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며 늙은 제임스 2세의 친 카톨릭 정책을 참고 있던 것이었는데, 어리고 창창한 카톨릭교도 왕이 다시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왕위 서열 1위인 메리가 2위로 밀려났으니까요. 의회는 무언가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그간 서로 반목해오던 왕당파인 토리당과 의회파인 휘그당이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역모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제임스 2세의 큰딸 메리는 26세로 바다 건너 네덜란드의 총독인 오렌지 공과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잉글랜드의 의회는 이 부부와 뜻을 같이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맹을 맺고 카톨릭교도인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나쁜 딸이고 나쁜 사위입니다. 특히 딸이 더 그래보였습니다. 같은 혈육인 친부를 왕위에서 쫓아내고, 남동생의 미래 왕위를 빼앗는 것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오렌지 공이 지휘하는 네덜란드의 전함이 잉글랜드에 상륙했습니다.
초창기 제임스 2세는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는 강국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주였으니까요. 그에겐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직한 상비군도 있었습니다. 또한 강력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도와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빚청산을 우려한 제임스 2세는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렇듯 제임스 2세는 관용성에 순수함까지 갖춘 군주였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던 것입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그의 편은 갈수록 줄어만 갔습니다. 의회는 물론 지방의 세력가들도 하나둘씩 오렌지 공의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만큼 개신교의 힘이 커진 탓일 것입니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주를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 비어있는 궁전에 입궁한 오렌지 공과 메리는 의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개신교도였으니까요. 이어서 그 부부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공동 군주로 취임하였습니다(1689). 동시에 그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의회는 지속적인 충성의 대가로 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의회와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왕에게 디밀었습니다. 권리장전( Bill of Rights)입니다. 영국 최초로 왕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 마그나카르타(1215), 청교도혁명 때 제정된 권리청원(1628)과 함께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상징하는 마지막 계약서가 작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명예혁명은 완수되었습니다. 종교적인 갈등은 사라지고 정치적인 안정까지 이룬 혁명이 완수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피를 한 방울도 안 흘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윌리엄 3세의 즉위는 흡사 1066년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가를 연 선조인 정복왕 윌리엄 1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둘 다 모두 대륙에서 건너와 외국인 신분으로 잉글랜드를 접수했고, 왕명도 공교롭게 같은 윌리엄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후사가 없었기에 그다음 왕은 쫓겨간 제임스 2세의 둘째 딸인 앤 여왕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윌리엄 3세 부부 중 메리 2세는 취임 5년 후인 1694년에 죽었고, 윌리엄 3세는 8년을 더 살아 1702년까지 단독으로 왕위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아버지인 제임스 2세는 선왕인 찰스 2세와 형제로 왕위를 이어갔고, 그의 딸인 메리 2세와 앤 여왕은 자매로 왕위를 이어갔습니다. 재미있는 영국의 역사입니다.
명예혁명은 완수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 기간 이어졌습니다. 프랑스로 도주한 제임스 2세의 복권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복권은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오렌지 스튜어트 왕가로 바뀐 잉글랜드에 정통 스튜어트 왕가의 재입성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자코바이트(Jacobite)라 불렀고, 그들이 일으킨 복권 운동은 자코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s, 1688~1746)이라고 불렸습니다. 카톨릭 군주였던 제임스 2세의 지지 세력이기에 그들은 주로 카톨릭교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잉글랜드 국내는 물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카톨릭교도까지 그 난에 참여하였습니다. 혁명 과정엔 피가 없었다지만 혁명 결과가 많은 피를 부른 것입니다. 자코바이트는 우리가 흔히 야곱이라 부르는 제임스(James)의 라틴어 이름인 야코부스(Jacobus)에서 유래합니다.
1701년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서 한을 품은 채 죽었어도 자코바이트의 난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정통 스튜어트 가문의 씨앗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임스 2세의 늦둥이 아들인 프랜시스 에드워드, 그리고 또 그의 아들인 찰스 에드워드 대까지 그 난은 이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자코바이트의 난은 조지 2세 때인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자코바이트가 패배함으로써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 그 사이 영국의 왕가는 스튜어트 왕가에서 독일계인 하노버 왕가로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제임스 2세의 둘째 딸인 앤 여왕도 후사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국사에서 이 부분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메리 2세도, 앤 여왕도 후사가 없으면 본래 왕위 서열 1위였던 정통 스튜어트 가문의 적자인 제임스 2세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보듯이 왕세자인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버젓이 살아있었는데 말입니다. 대신 힘겹게 족보를 찾아 올라가 보헤미아로 시집간 찰스 1세의 누나 손자인 외국인인 조지 1세에게 왕위를 계승시켜 새로운 하노버 왕가가 시작되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제임스 2세가 싫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도 보듯이 미운털이 박힌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했어도 적손인 그의 아들 정조는 왕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종교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58년간 지리멸렬하게 이어진 자코바이트의 난에서 보듯이 잉글랜드는 카톨릭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원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영국은 17세기 중기와 말기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등 2개의 혁명을 거치며 정치적인 안정과 사회적인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보듯이 그 두 혁명엔 종교 문제가 깊게 개입되어 있었고 이후에도 자코바이트의 난 등으로 종교가 개입된 후유증을 치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룬 안정성을 바탕으로 그다음 영국의 18세기는 문명과 물질의 혁명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세계 최강의 대영제국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청교도혁명은 바로 전 이곳에 쓴 <영국에 공화국이? 청교도혁명>이란 글에서 그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별개로 그 글에서도 밝혔듯이, 그리고 이 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두 혁명의 이름은 저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있습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청교도혁명엔 청교도가 없고 명예혁명엔 명예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아주 미미하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청교도혁명은 그 이름보다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명예혁명은 왠지 잉글랜드 종교전쟁으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실제로 청교도혁명은 영국에선 잉글랜드 내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서양사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역사가들이 그렇게 번역을 해서 우리도 그렇게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명예혁명 후 잉글랜드는 1707년 앤 여왕 때 연합법에 의거 스코틀랜드를 통합하고 그레이트브리튼(GB)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01년 조지 3세 때엔 역시 같은 프로세스인 연합법에 의거 아일랜드까지 통합하며 유나이티드킹덤(UK)이 되었습니다. 웨일스는 그 이전인 13세기 초부터 독립된 왕국이 아닌 공국으로 잉글랜드 왕세자의 지배를 받다가 헨리 8세 때인 1542년 잉글랜드에 완전히 편입된 상태였습니다. 그 후 예나 지금이나 정통 카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이주민이 많이 살아 개신교가 강세였던 북부 아일랜드 지역을 제외하고, 치열한 투쟁 끝에 1937년 독립하여 왕이 없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UK에서 빠지고, 영연방국가에서도 탈퇴한 완전한 독립국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영국(UK)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합집산 속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듯이 그 변화엔 종교도 매우 중요한 팩터로 작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