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년도인 2024년 우리나라의 국제결혼 비율은 10프로에 달합니다. 초혼 재혼을 포함해 결혼한 커플 10쌍 중 1쌍은 외국인과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우리나라 남자와 외국 여자의 결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베트남이었습니다(5,017명). 여자의 경우는 배우자로 미국 남자를 가장 많이 선택했습니다(1,479명). 남녀를 통틀어서는 역시나 베트남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국제결혼을 여자보다는 남자가 훨씬 많이 하기도 하지만, 여자의 경우도 베트남 남자와 결혼하는 비율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베트남 남자를 배우자로 선택했습니다(771명). 그런데 그중 거의 다라 할 수 있는 728명은 재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로 시집온 베트남 여자가 한국인 남편과 이혼 후 그들 고국의 남자를 불러들여 재혼을 한 것입니다. 결국 베트남 여자와 베트남 남자가 국내에서 결혼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럴 경우 두 사람의 국적은 모두 한국이 됩니다. 이혼을 해도 그녀의 한국 국적은 유지되고 그녀와 재혼한 베트남 남자의 국적도 그 순간부터는 한국이 되니까요.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현상도 나오고 있지만 우리나라 남녀의 국제결혼은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엔 일본 여자와 결혼하는 우리나라 남자들의 비율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년엔 1,176쌍의 한남일녀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베트남, 중국, 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입니다.
제가 자랄 때에는 국제결혼한 부부를 보기 힘들었습니다. 아니, 인천에서 고교 시절까지를 보낸 제 경우는 주변에서 한 커플도 못 보았습니다. 화교 부부는 있었겠지만 눈에 띄는 서양인 배우자는 못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서울에서는 국제결혼을 한 커플이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글로벌화가 안 되었던 시절이라지만 명색이 대한민국의 수도이니까요. 그리고 그 훨씬 이전인 1934년 서울에 살았던 어떤 남자도 국제결혼을 했으니까요. 그 커플은 둘 다 재혼이었습니다. 신부는 오스트리아 여자로 당시엔 호주(濠洲)댁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국적을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지리(墺地利)댁으로 불려야 맞았습니다. 그렇게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구분하지도 못했던 시대에 그녀는 비엔나에서 대한민국 서울로 시집을 왔습니다. 아니, 1934년이니 대한민국이 탄생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입국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에 남편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승만 대통령엔 그가 국제결혼한 프란체스카 여사도 더불어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엔 국제결혼이 그만큼 희귀했던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서양인 자체를 볼 수 없던 시절에 일반인도 아니고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부인이 벽안의 백인 여성이니 당시엔 더 주목이 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국제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식민지 상태에 있는 아시아의 가난하고 조그만 나라에서, 어렵게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가 강국인 오스트리아 여자를 신부로 맞고 국제무대에 함께 다녔으니 말입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라 불리지만 그녀가 우리나라 호적에 직접 한글로 올린 공식적인 이름은 푸랜시스카입니다.
인천을 꺼냈으니 에피소드 하나 더하자면 제가 고교 시절까지 인천에서 볼 수 있는 서양인은 선교사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흰색 셔츠에 까만 바지와 까만 넥타이, 그리고 역시 또 까만 네모난 가방을 든 2인 1조의 몰몬교 선교사였습니다. 제 친구 중엔 어쩌다 길에서 그들이 보이면 멀리서라도 뛰어가 인사를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몰몬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 원어민과 영어 대화를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어서였습니다. 놀라운 영어 향학열이었습니다. 저는 어쩌다 내 앞에 그들이 나타나면 혹시라도 말을 시킬까 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갔습니다. 저 멀리서 보여도 말입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외국인이 희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외국인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의 북촌이나 서촌, 고궁을 가면 외국인 때문에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미어터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나라에서 온 나라에 국제결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1980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열렸을 때였습니다. 그때 그런 미인대회는 가장 권위 있던 미스유니버스뿐만이 아니라 미스월드, 미스인터내셔널 등 모든 대회들을 공중파 TV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를 했습니다. 그 정도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수영복 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회 후 그 대회에 참가한 미스 프랑스가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한다는 뉴스가 떴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시끄러워진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서양에서 가장 콧대가 높다고 하는 프랑스 최고의 공식 미녀가 무명의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니 그 뉴스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되었습니다. 남자는 본인을 화성에서 온 왕자라 소개하고 그때 우리나라에 온 미스 프랑스를 금성에서 온 공주라고 칭했습니다. 운명적인 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TV에서 본 그는 그녀와 연결되어 편지로 구애한 끝에 결혼까지 한 것입니다.
진짜 화성왕자 금성공주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름도 독특하게 유리마라 불린 그 남자는 그 공주가 사는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그림과 같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연히 그 뉴스는 당시 독보적인 연예지인 선데이서울은 물론 여성지 전성시대답게 모든 여성 잡지와 주류 언론인 일간지와 TV 뉴스까지 도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나무꾼이 숨겼던 옷을 찾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녀도 금성으로 돌아갔는지 어느 시점 이혼 뉴스가 떴습니다.
7월의 마지막 주말 저는 저와 친분이 있는 어느 노부부의 회혼식을 다녀왔습니다. 회혼식(回婚式)은 결혼한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입니다. 태어난 지 60년 되는 것을 회갑으로 부르는 것처럼 결혼도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동양에선 예로부터 이렇게 삶에서 육십개의 간지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인 갑으로 돌아오는 데에 걸리는 60년을 중시했습니다. 그것을 육십갑자(六十甲子)라 부르고, 줄여서는 육갑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60년 한 바퀴를 다 돌아 다시 갑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갑이나 회혼은 인생이든, 결혼이든 60년 정도면 볼 거 다 보고, 살 거 다 살아 그때부터는 보너스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수명이 길어져 회갑연은 초대장을 받을 일이 없어졌지만 과거엔 그 정도로 경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은혼식이라 부르고 50주년을 금혼식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60주년은 회혼식이라고 부르지만 금강혼식으로도 불립니다. 은, 금, 다이아몬드 순으로 그 귀함의 서열을 매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혼식의 경우는 75주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금강혼의 경우 두 날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으로 60세가 되는 회갑, 또는 환갑은 흔해졌지만 회혼식은 현대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결혼한 해부터 기산 되기에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그리고 이혼이 만연한 시대에 한 배우자와 헤어지지 않고 꼬박 60년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당장 저의 부모님부터가 선친의 사망으로 어느 시점 불가능해졌습니다. 아니 두 분은 50년을 함께 사는 금혼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단골로 듣게 되는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말이 그렇지 현실에선 불가능한 햇수입니다. 현실적으로는 회혼식이 덕담으로 들려주는 백년해로의 최고점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 흔치 않은 잔치인 회혼식을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참석했습니다. 식장은 당연히 매우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혼식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제목에도 나와있고, 위의 설명에서도 자락을 깔은 것처럼 그날의 주인공들은 오래전 국제결혼을 한 부부이기에 그렇습니다. 남편은 한국인이고 아내는 독일인입니다. 2025년의 회혼식이니 그 부부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5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자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을 하고 1950년대 말 독일 괴팅겐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1960년에 독일 여자를 만나 5년 연애 후에 결혼을 한 것입니다. 독일에서 했습니다. 당시 남자의 나이는 30세였고 여자의 나이는 29세였습니다.
당시 국제결혼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에 버금가는 매우 드문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부부는 이 대통령 부부와는 달리 모두 초혼이었습니다.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냐면 그 남자가 유학을 떠나던 1950년대 말 김포공항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이역만리 장도를 떠나는 대한의 건아.." 아마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유력 일간지에도 어제 유학을 떠난 학생의 이름들이 실렸다고 합니다. 그런 고리짝 시절 그 남자는 그렇게 인터뷰도 하고 신문에도 나오고 하며, 독일 괴팅겐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교사를 하던 독일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남매를 낳고 공부를 이어가다가, 1982년 온 가족이 귀국을 하였습니다.
그날 회혼식은 이채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혼혈이지만 독일인에 훨씬 가까워 보이는 장성한 딸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까지 했는데 한국식과 독일식을 혼합했습니다. 일단 참석자들은 이름표가 있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구 등 그룹으로 온 손님들도 모두 흩어져 원탁에 앉아야 했습니다. 주최자인 딸이 그렇게 자리를 배정했기 때문입니다. 저부터도 당장 어색해하는 100프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파티 방식이 독일식이라며 자리 이동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행인 가족과 떨어져 앉았고 처음엔 불편해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좌우 옆자리엔 회혼식 주인공 중 남편의 지인인 90세 전후 노신사들이 앉았는데 한 분은 고등학교 동기분이었고, 또 한 분은 괴팅겐 유학 시절의 후배분이었습니다. 연세가 들었지만 모두가 그 자리에 올 정도로 건강한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통해 회혼식 주인공 부부의 몰랐던 고교 시절과 유학 시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화제가 되었던 연애사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순간 "아, 이런 효과가 있군요"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주최자가 자리를 모르는 사람들과 섞어서 앉게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면의 사람들이라 옆자리의 참석자들과는 그날 초청자나 호스트에 관해 본인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통 소재가 그것 말고는 없으니 다른 사담이나 잡담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주인공을 더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자리배정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식입니다.
회혼식의 자리에 하나 안타까운 것은 회혼식을 맞은 아내의 건강이 안 좋아 휠체어에 앉아서 회혼식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 파파 할머니입니다. 의식도 흐릿해 명확하게 그 상황을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그날의 주인공이기에 회혼식의 아내는 예쁜 전통 한복을 입고 오는 손님들로부터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습니다. 역시 파파 할아버지인 남편과 딸은 아내와 엄마인 그녀에게 의미 있고 좋은 날 조금이라도 더 기쁨을 주고자 애를 썼습니다. 딸은 엄마를 위해 화관을 준비해 머리에 씌워 드렸고,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엄마를 대신해 아빠와 춤을 추었습니다. 파티 분위기를 한껏 낸 것입니다.
그리고 스피치를 통해 그들 남매를 정성으로 키워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했고, 특히 아버지에게는 지금까지 엄마를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60년을 함께 산 남편에게 말을 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대변해서 한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아내와 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포옹을 나눴습니다. 병마로 인해 표현을 못 하는 그녀의 의식과 인지 상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내와 엄마로서 남편과 딸이 그렇게 차려준 축복스러운 회혼식 정경은 그녀에게 전달되고 입력되었을 것입니다.
회혼식을 위해 만든 영상이 전면의 스크린을 채웠습니다.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니 그 부부의 1965년 결혼 즈음부터 2025년까지의 지나온 모습이 참석한 하객들에게 보여졌습니다. 일단 저는 두 분이 젊었을 때의 인물을 보고 놀랐습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미남미녀였기 때문입니다. 아, 이것은 솔직한 고백입니다. 물론 두 분은 제가 처음 본 날에도 멋지고 아름다우셨고, 이후에도 간간히 뵐 때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그런 파파 할아버지와 할머니이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아름다움도 젊음을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달래 헤르만 헷세가 작품으로까지 쓴 청춘은 아름다워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누구든 마찬가지이고 그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그래서 추억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회혼식은 제가 처음 가볼 정도로 드문 잔치인데 훨씬 더 드문 국제결혼한 부부의 회혼식을 다녀와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국제결혼, 아니 꼭 국제결혼이 아니어도 결혼과 부부의 모범을 보이며 60년간 끌어주고 밀어주며 살아오신 두 분이십니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면서 결혼과 부부 생활에 정답은 없다지만 그래도 60년을 동고동락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위대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회혼식을 맞이한 그날의 부부에게 이 글을 통해 또 축하를 드립니다. 60년 전 결혼식 때 숱하게 들었을 백년해로에 60프로 도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100프로를 이루셨다고 생각됩니다. 부디 남은 여생도 행복한 삶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위의 회혼식 부부 중 남편은 독일에서 돌아와 중앙대 독문학과에 재직한 최두환 교수이고, 독일에서 그를 따라온 아내는 서강대 독문학과에 재직한 레기네 교수입니다. 최두환 명예교수는 후학 양성과 함께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와 연가인 <서동시집>, 그리고 역시 독일의 작가인 <실러 - 생애.작품.시대>를 번역해 국내에 출간했습니다. 아내인 레기네 교수가 많이 봐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시인 김지하와 박희진의 시들을 모아 독일어로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부창부수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암기할 정도로 애송하고 있는 독일 시들을 모아서 번역한 시집 <네가 좋아하는 사슴을, 그 무엇보다도>도 출간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