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프라하프라하
우리가 갈 수 있는 동부 유럽의 끝이 체코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 시절 세계화라는 기치 하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배낭을 짊어지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던 그 시절 한 손엔 유레일패스, 다른 한 손엔 노란색 표지에 '유럽여행'이라고 쓰인 배낭여행 가이드북을 들고 그들은 그렇게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국경을 넘을 때마다 기차의 외관이나 인테리어가 변하는 것을 신기해마며 무한정 공짜인 것 같은 기차를 갈아타며 서부, 중부, 남부 유럽을 섭렵한 배낭족들은 동쪽의 땅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주로 수도인 비엔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 손에 쥔 유레일패스로 갈 수 있는 더 동쪽에 위치한 나라는 딱 하나만 남았습니다. 체코였습니다. 도시는 물론 수도인 프라하였습니다. 체코는 당시 유레일패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동구권 국가였습니다.
배낭족들은 비엔나에서 마음의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기수를 돌려서 아니, 기관차를 돌려서 다시 서쪽으로 갈 것인가, 아님 동쪽인 프라하로 들어갈 것인가를 말입니다. 프라하가 돈 없는 배낭여행객에겐 물가도 엄청 싸고, 생각보다 매우 좋다고 소문은 자자했는데 그때까지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사실 프라하는 비엔나로 보면 동쪽은 아니고 북쪽에 위치하는데 소련의 위성국들이 즐비했던 시절 동구 국가들은 왠지 서유럽이나 중부유럽 국가들보다는 무조건 동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당시 체코는 우리나라에서 세계여행 자유화를 시행한 1989년 벨벳혁명을 통해 소련의 위성국에서 벗어났고, 4년 후인 1993년엔 1918년부터 한 국가로 동거해온 슬로바키아와 벨벳이혼을 하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란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벨벳이라 함은 그 독립과 분리가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유혈사태가 없었음은 물론 벨벳처럼 부드럽게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져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1995년 배낭족으로 비엔나까지 간 저는 지체 없이 야간열차를 타고 프라하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와 요한슈트라우스의 발랄하고 화려한 나라에서 공산주의를 갓 졸업한 왠지 우중충하게 느껴지는 카프카의 나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차에 탑승한 저는 그 당시 개봉했던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드라큘라>에서 어둠 속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성으로 가는 마차 속 영국인 변호사 키아누 리브스를 떠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프라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미지의 도시였습니다. 보니 체코는 EU엔 2004년에, 나토엔 1999년 가입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유레일패스 여행이 가능했던 것을 보면 주변의 헝가리나 유고 연방보다는 개방성이 앞선 국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정 즈음 체코 국경을 넘을 때 잿빛 제복을 입은 군인인지 경찰인지 모를 젊은 남녀가 기차에 올라섰습니다. 입국 심사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제가 제출한 여권을 무거운 표정으로 훑어보고 있었는데 그때 전 준비해 간 빨간 말보로 담배 한 보루를 그들에게 쓰윽하고 건네주었습니다. 배낭여행 출국 전 체코 국경을 쉽게 통과하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해서 준비해 간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선물이라며 주는 것이라 했더니 그들은 이내 표정을 풀고 키득거리며 입국 도장을 바로 찍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침에 도착한 프라하 중앙역은 다른 유럽의 역들에 비해 지나치게 허름하고 낡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망보다는 국경에서의 일까지 오버랩되어 "그러면 그렇지"라 생각하며 개찰구를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선 "아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상아빛의 아름답고 화려한 바츨라프 광장이 시원스레 제 눈앞에 촤악~ 하고 펼쳐진 것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더 넓어 보이면서도 구석구석 다 보이는 기대 이상의 프라하의 봄에 저는 그렇게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8월 다시 프라하를 찾았습니다. 그 사이 20년 전인 2005년에도 프라하를 한 번 방문했었습니다. 관광객들이 찾는 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오래된 고도이고 그 고도성을 유지하기 위해 개발을 억제하므로 대체로 언제 가든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파리는 2백년 전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도 찾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까지 합니다. 제삿날 조상님들이 집을 못 찾아 헤매고 굶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우리나라와는 다른 유럽의 도시들입니다. 하지만 프라하의 모습은 그대로여도 관광객들이 많이 늘어 도시가 훨씬 활기차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20년 전인 2005년의 방문 때보다도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프라하가 되어있었습니다. 과거 공산권 국가의 도시 이미지는 흘러간 고리짝 시대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변한 것도 있습니다. 프라하는 더 이상 물가가 싼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위의 1995년 배낭여행 때는 소문이 허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배낭여행 첫 도시인 런던에선 햄버거만 먹었는데 프라하에선 맛있는 체코 맥주를 곁들여 스테이크를 썰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프라하의 명물인 광장의 천문시계탑 바로 아래 레스토랑에서 시계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프라하는 가난한 배낭족들에게 중간 반환지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서쪽 유럽에서 제대로 못 먹어 삐쩍 말라가다가 프라하에 들려 며칠 휴식을 취하며 살을 찌운 후 다시 남은 여행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한 도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번 시계탑 방문 때엔 그 아래 레스토랑에서 커피만 한 잔 하고 나왔습니다. 비싸기도 했지만 일단 밥 시간대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곳에 앉으니 기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 그곳에서 30년 전과 똑같은 스팟에서 떠올린 젊은 날의 회상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요.
체코는 슬라브족 중에서도 서슬라인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대를 거쳐가며 체코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독일, 오스트리아가 가까이 있어 게르만족의 개입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히틀러가 가장 먼저 침공한 나라도 체코(슬로바키아)였습니다. 하지만 1938년 단행한 그 침공은 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체코를 둘러싼 주데텐란트 지역에 게르만족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무력으로 합병한 것인데 이를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발톱을 슬며시 드러냈는데 주변 강국이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2022년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침공과는 달리 말입니다. 이에 히틀러는 이듬해인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전의 체코 침공은 오페라의 서곡 같은 대전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체코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인 이름은 보헤미아일 것입니다. 9세기부터 1918년까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기까지 그곳에 천년 넘게 존재했던 지역이고 나라입니다. 오늘날 체코는 보헤미아 지역에 그 동쪽 모라비아 지역까지 합쳐져 형성된 국가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지역임에도 보헤미아 사람을 뜻하는 보헤미안은 집시로 불리며 유럽의 천덕꾸러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제도와 규범을 지키지 않고 틀 밖에서 자유분방하게 방랑하며 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럽 여행 시 그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반복해서 듣곤 합니다. 그런 집시를 보헤미안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보헤미아 지역을 거쳐서 서부 유럽으로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이렇듯 보헤미안은 체코 입장에선 영예롭지 않은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보헤미안은 예술이나 문학에선 자유, 일탈, 낭만과 직통하기에 이미지상 꼭 손해만 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과 밴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에 나오는 보헤미안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보헤미아왕국은 14세기 카를 4세(1316~1378) 때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 스페인의 카를 5세 등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기틀을 세워 칭송을 받는 역사적인 왕들이 있는데 체코에선 그런 인물이 바로 카를 4세입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며 정복사업으로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고 프라하를 오늘날과 같은 유럽을 대표하는 도시로 키웠습니다. 프라하의 랜드마크인 아름다운 카를교도 그가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그 다리는 프라하를 남북으로 흐르며 도시를 동서로 양분하는 블타바강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에겐 좀 더 익숙한 몰다우강이라 불리는 강입니다. 몰다우는 독일어 호칭입니다. 그만큼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으로서 독어 문화권 영향을 많이 받은 체코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를교는 1357년 7월 9일 오전 5시 31분에 정확히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앞뒤로 읽어서 똑같은 숫자가 나오는 시간에 다리의 첫 돌을 얹은 것입니다. 영어로 읽으면 정확히 앞뒤가 같습니다. 점성술적으로 성공적인 건설을 기원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1402년에 준공이 됐으니 카를교는 600년이 넘은 돌다리입니다. 차는 건널 수 없는 보행교입니다. 프라하를 방문한 사람치고 그 다리를 건너지 않는 여행자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8월 제가 프라하에 머물 때엔 500m가 조금 넘는 그 다리를 인적이 드문 새벽에 건너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머문 곳은 프라하성 쪽이 아닌 시계탑 광장이 있는 강 동쪽이었습니다.
카를 4세는 종교적으로도 프라하를 대주교의 도시로 격상시켰습니다. 1344년의 일입니다. 프라하성에 우뚝 솟은 거대한 두 개의 고딕 첨탑, 비투스 대성당이 프라하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입니다. 아마도 그 성당은 동쪽의 동방정교회와 맞서 로마 카톨릭의 동쪽 끝을 사수하는 요새와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카를 4세는 학문적으론 중부유럽 최초의 대학인 카를대학을 1348년 세웠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한 카를 4세이기에 그는 오늘날 오래된 인물임에도 체코의 아버지, 국부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14세기 카를 4세가 이룩한 번영의 시대가 끝나고 15세기가 시작되며 논쟁과 그 논쟁으로 야기된 전쟁이 프라하를 휩쓸게 됩니다. 종교논쟁이 일어났고 그 논쟁을 관철시키려는 자와 막기 위한 자들 간에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논쟁과 전쟁 사이에 한 종교개혁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얀 후스(1370~1415)입니다. 그는 위의 카를 4세가 세운 카를대학의 총장이었습니다.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고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일반 신도들도 이해하기 쉽게 미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교황청의 미움을 사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1415년 화형을 당했습니다. 마녀와도 같이 이단자로 몰린 겁니다. 그러자 그의 순교를 지켜본 추종자인 후스파와 그를 억압하던 세력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후스전쟁(1419~1434)으로 불리는 종교전쟁으로 교황청은 이들을 제지하기 위해 십자군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결국 온건파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것입니다.
얀 후스가 실패한 개혁은 그의 예언대로 100년 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일으킨 종교개혁입니다. 그는 그 대학의 정문에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 격문을 붙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엔 이제 하나의 기독교가 더 생겨났습니다. 카톨릭과 정교회에 더해 우리에겐 개신교라 불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생겨난 것입니다. 체코에서 그런 개신교의 선구자 후스의 위상은 종교 지도자나 개혁가 이상으로 보입니다. 그의 동상은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고, 그가 생전에 입에 달고 살던 "진실은 승리한다(Pravda vítězí)"는 현재 체코의 국가 슬로건으로 사용되고 있으니까요. 체코의 민족정신과 자유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16세기가 시작되며 보헤미아엔 재앙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중부유럽의 맹주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일원인 페르디난드 1세는 1526년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보호 목적이었지만 그로 인해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의 구성국으로 전락을 했습니다. 더 이상 독립국이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식민지 국가가 것입니다. 카톨릭만을 인정하는 합스부르크는 보헤미아의 후스파 개신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이에 다시 종교전쟁이 터지는데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까지 번져간 30년전쟁(1618~1648)입니다. 보헤미아는 귀족들까지 합세해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에 저항했으나 결과는 패전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에 보헤미아는 400년간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거쳐가며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독일어 문화권의 나라가 되어간 것입니다. 프라하는 비엔나의 종속 도시가 되어갔습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패전국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보헤미아가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보헤미아는 독립하면서 지역명인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민족의 이름을 국가명으로 삼았습니다. 대신 체코민족과 동병상련인 옆나라인 슬로바키아민족과 하나가 되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습니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온 취약국 슬로바키아와 공업은 강하나 농업 기반이 약한 체코가 서슬라브족이란 동질감으로 한 나라로 뭉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5년을 동거했던 두 나라는 1993년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져 각자도생으로 갈라섰습니다. 이 글 위에서 벨벳이혼이라고 한 연방의 해체입니다. 체코는 체코대로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대로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합의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슬로바키아 입장에선 국가명이 슬로바키아체코가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인 것부터가 어느 시점부터는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400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은 체코, 그런 식민지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민족이든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음악에서도 국권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가 일어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체코에서도 역시 그런 체코민족의 한과 정서를 음악으로 표방한 음악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체코 국민음악파라 불리는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이 대표적인 음악가입니다.
1848년은 온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 해입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에 자극을 받아 3월엔 오스트리아와 북이탈리아, 그리고 스메타나(1824~1884)가 사는 프라하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 독립과 처우 개선을 부르짖는 혁명이었습니다. 스메타나는 혁명에 직접 가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용군 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을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진압되고, 그는 탄압을 피해 프라하를 떠나 스웨덴으로 건너갔습니다. 훗날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1880년에 그의 역작인 <나의 조국>을 완성했습니다. 유명한 2악장의 <블타바(몰다우)강>은 그가 카를대교 위에서 숱하게 지켜본 그 강을 떠올리며 작곡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강 위에서 직접 작곡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조국 체코 보헤미아와 그가 자란 프라하에 대한 뿌리 깊은 애정이 드러나있는 교향시 <나의 조국>입니다.
드보르자크(1841~1904)도 스메타나에 이어 그의 조국인 체코 보헤미아에 대한 애환과 그리움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체코의 민속 선율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슬라브 무곡>과 보헤미아의 민담을 소재로 만든 오페라 <루살카>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찍부터 들어온 경쾌한 <유모레스크>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드보르자크 하면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를 대표작으로 떠올립니다. 그가 취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체코의 민속적 요소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악과 아프리카 흑인 영가까지 결합시켜 만든 그 곡은 드보르자크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이의 고향과 고국을 그리는 국제적인 음악이 되었습니다. 좋은 음악은 국경을 초월하니까요. 특히 2악장 잉글리시호른의 느릿한 멜로디는 서정성과 향수를 극대화시킨 음악으로 우리에겐 번안곡까지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곡입니다.
사제관계이자 선후배인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는 죽어서 한 곳에 묻혔습니다. 체코 국민음악파의 쌍벽답게 매우 영예로운 곳에 묻혀있습니다. 체코 건국신화의 땅인 비셰흐라트의 국립묘지가 그들이 영면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 묘지는 체코의 국가 영웅 600여명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우리의 현충원 같은 곳입니다. 둘 간의 묘지는 100m도 안 될 정도로 가깝습니다. 블타바강이 내려다 보이고 그 강 따라 저 멀리 프라하의 구도심이 보이는 비셰흐라트 언덕이 체코의 성지인 것은 그곳에서 체코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단군왕검이 세운 신시와도 같은 곳인 것입니다. 건국의 신들이 그곳에 살았고 여신인 리부셰 공주는 블타바강 유역에 위대한 도시가 세워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렇게 예언이 실현된 도시가 프라하입니다. 스메타나는 그의 <나의 조국>에서 블타바강과 함께 비셰흐라트와 그곳에 살던 신들도 찬미하였습니다.
제 생애에 프라하를 언제 또 가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 번을 갔어도 그 익숙함과 함께 늘상 새로움이 솟아나는 도시 프라하입니다. 달래 봄을 독점하고 있는 도시 프라하가 아닌 것입니다. 몰타 기사단 담장에 그려진 팝스타 존 레넌의 벽, 프라하 시내의 카프카의 집과 프라하 성벽 한 칸에 자리 잡은 그의 작은 작업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머문 집 등 프라하엔 아직 이 글에서 얘기하지 못한 많은 매력적인 이야기와 장소가 숨어있습니다. 만약 또 가게 된다면 그땐 어떤 새로운 볼 것, 이야깃거리가 나타나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