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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08. 2020

마이센 & 드레스덴

흔히 유럽 4대 도자기 하면 영국의 웨지우드,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를 이야기합니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세브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등 각 국가마다 그들만의 명품 도자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각 도자기의 생산 지역이 곧 그 명품의 브랜드 네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럽 도자기의 기원이 바로 중국, 차이나에서 유래하기에 그런 것으로 보여집니다. 처음부터 도자기를 차이나(china)로 불렀고, 그래서 영어 단어 도자기로까지 정착된 차이나이기에 이후 그 관습성으로 유럽의 도자기 생산지는 곧 브랜드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차이나 하면 도자기일 정도로 도자기에 대한 관심도와 애정은 대단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유럽 도자기들 중 최고를 뽑으라면 단연 독일의 마이센입니다. 서양에서 순수 서양인의 기술로 독자적으로 제조된 가장 오래된 도자기이기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니다. 바꿔 말하면 마이센은 최초의 유럽 도자기입니다. 드레스덴과 불과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만 도시 마이센에서 서양 도자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작센주의 군주로 드레스덴을 통치하던 아우구스트 2세는 중국에서 철저하게 제조법을 숨겨온 도자기를 직접 만들기 위해 그 제조법이 유사해 보이는 연금술사들을 통해 도자기를 개발케 하였습니다. 절치부심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이윽고 1708년 마이센의 한 가마에서 뵈트거라는 장인이 도자기를 굽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드레스덴 근교 마이센의 토양이 중국의 그것과 비슷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후 이러한 도자기 제조법은 유럽의 각 도시로 퍼져나가 위에 열거한 많은 팔로잉 브랜드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마이센 하면 위와 같은 이유에서 드레스덴도 항상 같이 언급이 되지만 드레스덴 역시 유명 도자기 브랜드로서의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이센 시골에서 만들고 드레스덴 도시에서 판매하는 구조의 영향도 있지만 드레스덴이 워낙 문화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는 도시이고, 도자기 수요 급증에 따라 마이센에서 나온 도공들이 드레스덴에도 많은 자기 공방을 개업함에 따라 본연의 오리지널리티가 모호해져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마이센과 드레스덴은 태생부터 공생의 불가분한 관계로 실제 전문가들도 구분하기 힘들고 때론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에 언급한 영국의 웨지우드는 유럽 도자기 중 태생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단 브랜드 네임부터가 지역명이 아니라 설립자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보시듯 통상적인 상품의 네이밍 방법을 따른 것이지요. 마이센과는 달리 중국 차이나의 제조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제조해서 그렇습니다. 바로 본(bone) 차이나입니다. 차이나는 차이나인데 소뼈 가루를 넣어 본차이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기존 자기보다 가볍고 견고해 본차이나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정착되었습니다. 과연 불굴의 영국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제로썸 게임이라 승자가 있으면 그 승자에게 재물을 바치는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엉뚱하게도 본차이나 개발로 인해 이후 대서양 건너 북미 대륙의 들소 버펄로들이 떼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왕족과 귀족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많은 소뼈 가루가 필요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버펄로를 주식으로 해서 사는 북미의 인디언들은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도자기 효과가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본차이나 계열로는 역시 영국의 로열덜튼이 있습니다. ,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도 본차이나가 주종이지요. 근세 이후 유명세를 탄 일본의 유명 도자기인 노리다케도.. 노리다케는 나고야의 지역명입니다. 이렇게 보니 전통의 명품 도자기 중 지역명을 택하지 않는 브랜드는 영국의 자기들 뿐이네요. 과연 이번엔 특이한 영국인입니다.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유럽 대륙과 떨어진 만큼 다르게 그들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취해오고 있는 차고 넘치는 영국인의 사례에 도자기를 추가해도 되겠습니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가 동방을 다녀간 이후 비단길이 열리면서 중국의 여러 상품들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그중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장 감탄하고 선호한 것은 바로 차와 도자기였습니다. 사실은 차가 먼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죽하면 영국엔 티타임이라는 말과 풍습이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오늘도 우린 홍차는 입에도 안 대면서 티타임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풍속이 만들어낸 대단한 언어 지배력이지요. 도자기는 차를 따라 마시는 기로서 차와 함께 곁다리로 유럽에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트와 찻잔에도 유럽인들이 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 특히 백자, 백자 중에서도 코발트 기운이 감도는 청화백자는 거의 대저택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고 금보다도 귀해 하얀 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와 차 인기가 절정에 달한 18세기 당시 중국은 청 왕조였는데 이때 세계 무역의 거래 화폐는 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미 대륙 식민지에서 착취한 유럽의 은이 청나라로 대거 흘러 들어가 심각한 무역 역조 현상이 생겼습니다. 남미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위의 버펄로 사례처럼 도자기 하나가 또 이렇게 5대양 6대륙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청나라 전성시대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엔 영토만 넓어진 것만이 아니라 차와 도자기 수출은 보유고가 최고조에 달아 국가의 부도 매우 커진 시기였습니다. 유럽인으로선 참으로 배 아픈 일이었겠지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 서양은 마이센을 기점으로 도자기 자체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질적이었던 동서 문명의 차이를 평등화한 대단한 사건입니다. 아울러 차는 로버트 포춘이라는 영국의 한 식물학자가 청나라로부터 몰래 종자를 훔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와 실론섬(스리랑카)에서 재배에 성공하게 됩니다. 훨씬 이전 우리의 고려말 사신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고 훔쳐온 것과 똑같은 초식입니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유럽인들은 더 이상 중국에 비싼 은을 주고 차와 도자기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이하니다.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옵니다. 도시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히틀러도 가장 사랑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미운 털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많은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문화 예술이 융성하였는데 자기 공예도 그러한 측면의 일환으로 이곳에서 발전했을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설명드린  강성왕이라 불리는 아우구스트 2세의 강한 성격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마이센으로 대표되는 유럽 자기 공예의 특징은 차이나와는 달리 매우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차이나가 단아 절제하고 선 굵은 바로크라 하면 마이센과 드레스덴은 섬세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상류사회의 취향이 그대로 공예에 반영이 된 것이겠지요. 또한 이러한 자기들은 인형공예뿐만이 아니라 주방집기나 생활용품에 까지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전반을 망라하는 모든 용품으로 광범위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요즘 같은 형태의 화장실 변기가 그때도 사용됐더라면 그것도 틀림없이 마이센이나 드레스덴 목록에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 여행 종착지가 중국 원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였다면, 그리고 그가 당시 고려자기를 보고 반해서 이것을 서양에 소개했다면 오늘날 도자기는 차이나가 아니고 코리아(korea)로 불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도자기 하면 한가락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조상님들이니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임진왜란 후 많은 도공들을 일본에 뺏긴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 침략 전 벌써 유럽 문물을 접한 그들이기에, 그 문화적 가치를 알았기에 왜인들은 그렇게 했을 겁니다.


당연히 마이센과 드레스덴의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타일이나 사기가 아닌 완성된 도자기이니 말입니다. 현지 박물관에 전시된 고풍스러운 자기들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억대를 넘어가기도 하니 그들 후손이 만든 벤츠에 버금가는 고가입니다. 사진의 벽화는 드레스덴 도시의 상징물인 '군주들의 행렬' 부조입니다. 드레스덴 자기 공법과 똑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그 길이가 101미터나 된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101미터짜리 자기.. 자기라서 세계대전의 그 엄혹한 폭격에도 이 작품은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그 뜨거운 가마 속에서 고열의 불을 오래오래 견뎌내고 탄생했으니 말입니다.



* 저작권이 체크 안 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일 수정)


흔히 유럽 4대 도자기 하면 영국의 웨지우드,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 독일의 마이센, 헝가리의 헤렌드를 이야기합니다. 이외에도 프랑스의 세브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등 각 국가마다 그들만의 명품 도자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통점은 각 도자기의 생산 지역이 곧 그 명품의 브랜드 네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럽 도자기의 기원이 바로 중국, 차이나에서 유래하기에 그런 것으로 보여집니다. 처음부터 도자기를 그것이 온 차이나(china)로 불렀고, 그래서 영어 보통 명사로까지 정착된 차이나이기에, 이후 그 관습성으로 유럽의 도자기 생산지는 곧 브랜드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유럽 도자기들 중 최고를 뽑으라면 단연 독일의 마이센입니다. 서양에서 순수 서양인의 기술로 독자적으로 완성한 가장 오래된 도자기이기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마이센은 최초의 유럽 도자기입니다. 드레스덴과 불과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만 마을 마이센에서 유럽 도자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작센주의 군주로 드레스덴을 통치하던 아우구스트 2세는 중국에서 철저하게 제조법을 숨겨온 도자기를 직접 만들기 위해 그 제조법이 유사해 보이는 연금술사들을 통해 도자기를 개발하게 하였습니다. 절치부심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이윽고 1708년 마이센의 한 가마에서 뵈트거라는 장인이 도자기를 굽는 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드레스덴 근교 마이센의 토양이 중국의 그것과 비슷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후 이러한 도자기 제조법은 유럽의 각 도시로 퍼져나가 위에 열거한 많은 팔로잉 브랜드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마이센 하면 위와 같은 지리적 이유에서 드레스덴도 항상 같이 언급되지만 드레스덴 역시 유명 도자기 브랜드로서의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이센 시골에서 만들고 드레스덴 도시에서 판매하는 구조의 영향도 있지만 드레스덴이 워낙 문화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는 도시이고, 도자기 수요 급증에 따라 마이센에서 나온 도공들이 드레스덴에도 많은 자기 공방을 개업함에 따라 본연의 오리지널리티가 모호해져서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마이센과 드레스덴은 태생부터 공생의 불가분한 관계로 실제 전문가들도 구분하기 힘들고 때론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위에 언급한 영국의 웨지우드는 유럽 도자기 중 태생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단 브랜드 네임부터가 지역명이 아니라 설립자의 이름을 따랐습니다. 보시듯 통상적인 상품의 네이밍 방법을 따른 것이지요. 마이센과는 달리 중국 차이나의 제조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바로 본(bone)차이나입니다. 차이나는 차이나인데 소뼈 가루를 넣어 본차이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기존 도자기보다 가볍고 견고해 본차이나는 독자적인 카테고리로 정착되었습니다. 과연 불굴의 영국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제로썸 게임이라 승자가 있으면 그 승자에게 재물을 바치는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엉뚱하게도 본차이나 개발로 인해 이후 대서양 건너 북미 대륙의 들소 버펄로들이 애먼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족과 귀족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많은 소뼈 가루가 필요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버펄로를 주식으로 해서 사는 북미의 인디언들은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도자기 효과가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본차이나 계열로는 웨지우드와 함께 역시 영국의 로열덜튼이 있습니다. 아, 덴마크의 로열코펜하겐에도 본차이나가 있지요. 이렇게 보니 전통의 명품 도자기 중 지역명을 택하지 않는 브랜드는 영국뿐입니다. 과연 이번에도 특이한 영국인입니다.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유럽 대륙과는 다르게 그들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취해오고 있는 차고 넘치는 영국인의 사례들에 도자기를 추가해도 되겠습니다.           


중국 차이나에 이어 유럽에서 유명세를 탄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규슈 지역에 터를 잡고 구운 가마에서 나온 상품들이었습니다. 유럽이 그러했듯이 일본도 16세기가 될 때까지는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그것을 해낸 것입니다. 이삼평, 심당길, 백파선 등 그때 활동했던 조선 도공의 후예들은 지금도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도자기 가업을 그곳에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역시 생산지인 지역명을 따라 오늘날 가고시마 현의 사쓰마야키와 사가 현의 아리타야키가 당시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친 일본의 도자기입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일본의 노리다케는 계보가 다른 본차이나가 주종으로 20세기 들어서 론칭한 브랜드입니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가 동방을 다녀간 이후 비단길이 열리면서 중국의 여러 상품들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는데 그중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장 감탄하고 선호한 것은 바로 차와 도자기였습니다. 사실은 차가 먼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죽하면 영국엔 티타임이라는 말과 풍속이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오늘날 우린 홍차는 입에도 안 대면서 티타임 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풍속이 만들어낸 대단한 언어 지배력입니다. 도자기는 이 차를 따라 마시는 집기로서 유럽에 함께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트와 찻잔에도 유럽인들이 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중 특히 백자, 백자 중에서도 코발트 기운이 감도는 청화백자는 거의 대저택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고 금보다도 귀해 하얀 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렇게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와 차 인기가 절정에 달한 18세기 당시 중국은 청 왕조였는데 이때 세계 무역의 거래 화폐는 은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미 대륙 식민지에서 착취한 유럽의 은이 청나라로 대거 흘러 들어가 심각한 무역 역조 현상이 생겼습니다. 남미에서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위의 버펄로 사례처럼 도자기 하나가 또 이렇게 5대양 6대륙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청나라 전성시대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엔 영토만 넓어진 것만이 아니라 차와 도자기 수출로 은 보유고가 최고조에 달아 국가의 부도 커진 시기였습니다. 유럽인으로선 참으로 배 아픈 일이였겠지요.           

     

이러한 분위기 속에 유럽은 독일의 마이센에서 도자기 자체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격차가 있던 동서 문명의 차이를 평등화한 대단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차는 로버트 포춘이라는 영국의 한 식물학자가 청나라로부터 몰래 종자를 훔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와 실론섬(스리랑카)에서 재배에 성공하게 됩니다. 훨씬 이전 우리의 고려말 사신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고 훔쳐온 것과 똑같은 초식입니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유럽인들은 더 이상 중국에 비싼 은을 주고 차와 도자기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국 이외에 일본이라는 신흥 도자기 거래처도 그 수요를 충족하는 데에 한몫을 하였습니다.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옵니다. 도시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으로 히틀러도 가장 사랑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미운 털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많은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문화 예술이 융성하였는데 도자기 공예도 그러한 측면의 일환으로 이곳에서 발전했을 것입니다. 물론 위에서 설명드린 강성왕이라 불리는 아우구스트 2세의 강한 성격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합니다.      

마이센으로 대표되는 유럽 도자기의 특징은 차이나와는 달리 매우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차이나가 단아하고 선 굵은 바로크라고 하면 마이센과 드레스덴은 섬세하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상류사회의 취향이 그대로 공예에 반영이 된 것이겠지요. 후발주자임에도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 먹혔던 것은 차이나와는 다른 화려한 색감이 어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유럽의 도자기는 집기를 벗어나 인형공예와 각종 생활용품까지 왕족과 귀족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모든 용품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되었습니다. 요즘 같은 형태의 화장실 변기가 그때도 사용됐더라면 그것도 마이센이나 드레스덴 목록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 여행 종착지가 중국 원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였다면, 그리고 그가 당시 고려자기를 보고 반해서 이것을 서양에 소개했다면 오늘날 도자기는 차이나가 아니고 코리아(corea)로 불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도자기 하면 한가락했던 최고 수준의 우리 조상이었으니 꼭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일본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또 미래를 예견해 임진왜란 막판에 조선의 도공들을 싹쓸이해서 잡아갔을 것입니다. 조선 침략 전 벌써 서구 문물을 접한 그들이었으니까요.

     

당연히 마이센과 드레스덴의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타일이나 사기가 아닌 완성된 도자기이니 말입니다. 현지 박물관에 전시된 고풍스러운 자기들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억대를 넘어가기도 하니 그들 후손이 만든 벤츠에 버금가는 고가입니다. 아래 사진의 벽화는 드레스덴 도시의 상징물인 <군주들의 행렬> 부조입니다. 드레스덴 자기 공법과 똑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그 길이가 101미터나 된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101미터짜리 도자기.. 도자기라서 2차 세계대전의 그 엄혹한 폭격에도 이 작품은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1300도가 넘는 그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고열의 불을 오래오래 견뎌내고 탄생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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