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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Sep 12. 2020

수인선의 부활

1995년 죽은 수인선이 부활하였습니다. 죽은 지 25년 만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어둠에서 한 번에 벌떡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죽어있던 신체 부위를 조금씩 조금씩 새롭게 이어 붙여 최종적으로 완성한 부활입니다. 그 마지막 부위한대앞역에서 수원역까지의 노선을 이어 붙이고 생기의 숨을 불어넣어 전체를 움직이게 한 날이 바로 그제 9월 10일이었습니다. 이제 인천에서 안산을 거쳐 수원까지, 또는 수원에서 인천까지 한 번에 기차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기술 문명이 이룩한 장대한 연결 같지만 오래 전 옛날 1937년 일제시대 수인선 개통 후 1992년 철거 전까지 50년 이상 오랫동안 그래왔던 일이 다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철로가 넓어지고, 단선에서 복선이 됐으며 그위에 올라탄 기차의 성능과 시설이 좋아졌습니다. 1995년이 아니고 1992년이라 한 것은 철거도 한 번에 다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당시 인천에서 수원까지 탈 수 있는 기차가 끊어진 시점이 그때이기에 그렇습니다.


수인선의 부활이 제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펜을 들게까지 된 것은 이 뉴스를 접하고 그 기차에 대한 과거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수인선 안에 저의 고향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안산이라는 큰 도시가 되었지만 과거 시로 개발되기 전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라는 행정명을 가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태어나서 초등 취학 전까지 살다가 저희 집은 인천으로 이사하였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계신 큰집은 여전히 그곳에 있어 초중고 학창 시절 방학 때만 되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봇짐 짊어매고 방학 내내 그곳 고향 시골에 내려가서 머물렀습니다.

하는 일이라곤 그저 그 동네 시골 또래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게 전부였습니다. 방학 때에도 아이들이 학원에 얽매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탈이지만 그땐 그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할머니, 큰어머니, 큰형수 등 큰집 식구들은 방학 때마다 그렇게 내려와 있는 군식구들이 귀찮을 법도 한데 어린 제 눈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가족 시스템 하에서 흩어진 친지 동기들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대라서 그랬을 니다. 그런데 지금도 고마움이 생각나는 분들은 전부 여자분들이네요. 하긴 남자들은 딱히 귀찮을 게 없으시니..



이때 인천에서 고향역인 당시 원곡역까지의 교통수단이 수인선이었습니다. 매년 때마다 여러 차례 애용했던 고향열차였습니다. 과거 원곡역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시절 현재 안산 전철역 근처에 있던 그림같은 역이었습니다. 거기서 시골길 십리를 힘겹게 걸어걸어 들어가야 큰집이 있는 시우 부락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편하게 싯굴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입니다. 그땐 어려선가 그 길이 그렇게 멀어 보였습니다. 이윽고 저 산모퉁이 돌아 할머니집 동네 어귀 첫 집이 보일 때의 반가움이란! 당연히 제 발걸음은 빨라졌습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이니..

사실 당시 인천에서 고향역인 원곡역에 도달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인천에서 시외버스로 지금은 시흥시가 된 신천리 로터리에서 내려 부천에서 출발한 버스로 갈아타면 그 버스의 종점이 바로 원곡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버스는 잘 타지 않았습니다. 연결성이 안 좋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기차를 놓쳤을 때에만 버스를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사실 그보단 비행기를 언감생심 꿈으로만 알던 어린 시절 실현 가능한 비클 중 최고는 단연 기차였기에 그랬을 겁니다.  쓰고 보니 당시 원곡역은 시골이지만 나름 교통의 요지였네요. 교통이 열악한 시기였음에도 기차와 버스가 만나는.. 그리고 당시 단선인 수인선의 많은 역 중 중간에 위치해 상하교행이 가능한 몇 안되는 역이었습니다.

수인역이라고도 불리고 남인천역이라고 불리는 곳이 인천 쪽 종점입니다. 이곳에서 기차는 용현 남동 소래 달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 고색을 거쳐 종점인, 아니 시발점인 수원역에 도착합니다. 쓰면서도 신기하게 생각되는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당시의 수인선 노선역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지명도 있네요. 인수선이 아니고 수인선인 것은 수원이 경기도 도청소재지가 있는 중심도시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부선과 만나는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당시 수여선이라고 불리는 노선도 있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수여선은 수원에서 여주까지 운행됐던, 수인선과 마찬가지의 협궤열차였습니다. 두 기차 모두 꼬마열차였지요. 수여선도 일제시대 만들어졌고 철거는 수인선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졌지만 현재 여건상 부활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과거 일제는 여주 경기미 곡창 지대에서 수확한 쌀을 수원을 통해 서울과 항구가 있는 인천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수여선과 마찬가지로 수인선은 일제 시대엔 군자, 소래 염전 지대의 소금을 인천항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모두 불행한 식민지 시대 그들의 병참 수송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였습니다.

과거 제가 수인선을  땐 하루에 2시간 간격으로 열차가 운행되었는 데 그중 두 편은 증기 기관차였습니다. 요즘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시커먼 연기를 내내 뿜으며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바로 그 기차입니다. 화부가 석탄을 때서 움직이는 그 기차가 70년대 후반까지 수인 철로 위에선 달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시간 대엔 동차라 불리는 동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열차가 운행되었습니다. 



사진 속 수인선의 명물인 소래 다리 위를 달리는 흑백 증기기관차의 촬영일이 1978년도로 되어 있네요. 2020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인 전철이 개통된 해가 1975년이니 마치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인선, 수인선.. 당시 인천에서 기찻길에 서면 마치 시간이 인버전 되듯 현재와 과거 가지를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순행하는 열차, 시간을 역행하는 열차..



수인선은 부활했지만 제가 그것을 과거처럼 애용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사는 곳이 서울이기도 하지만 그때의 제 고향이 사라져서 그렇기도 합니다. 80년대 들어서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원시리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시동이 되면서 고향과 생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도로명 주소로 바뀌기 전 주소이니 또 바뀌었겠네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가 아닌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데없네가 된 것입니다. 물론 도시화된 고향에서 도시인이 되어 사셨던 할머니, 큰엄마를 비롯한 많은 친지와 고향 이웃분들이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이젠 인걸도 간데없고 산천도 간데없는 고향이 되었습니다.

큰집 옆에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장가가셨을 때, 큰집 마루에 걸린 사진으로만 뵌 저희 할아버지께서 큰집 옆에 땅을 사서 새로 지어주신 집이었습니다. 차자가 분가를 하게 됐으니 새집을 마련해준 거죠. 뒤란엔 쪽문이 있어 큰집 작은집이 서로 통했습니다. 아마도 그 문을 통해 큰집 작은집의 많은 것이 오갔을 겁니다. 시집살이하셨던 큰엄마와 우리 엄마의 동서 간의 애환도.. 조상묘가 있던 산과 연결된 큰집 뒷 비탈에 일찍부터 감나무들이 있어선가 우리집 뒷 둑엔 새집과 함께 밤나무들을 심었습니다.  나무들과 함께 우리집 남매들이 자랐겠지요. 큰집과 작은집, 감과 밤.. 할아버지의 뭔가의 빅 픽쳐가 있었던 듯도 하고요.


문을 열면 버드나무 이어진 기다란 둑이 보이고, 둑 아래 큰길 양옆으로 건너편 산아래 마을 둑까지 경계가 모호했던 옛 논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큰길 끝 언덕 위엔 당시 마을 사람들이 손수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인천과 수원, 서울과도 문화적으로 격리된 시골이었지만 저희 증조할아버지 형제분들이 1909년도에 세운 100년도 넘은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원시리교회, 그 교회는 현재 안산시에서 성광교회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수인선이 부활했다는 반가운 뉴스에 그때를 회고하다 보니 자연스레 선로변 고향으로 이어졌네요. 부활한 수인선을 타고 그 고향에 도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수인선은 부활해도 고향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라진 고향과 고향집이 더욱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제겐 정지용 님이 노래한 향수의 시구만큼이나 그립고 아름다운 그곳입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아래 사진은 안산시로 개발되기 전의 고향마을 모습니다. 사진 중앙 왼쪽에 보이는 그 교회가 90년 되던 해, 립자의 후손인 저희 형님이 90년 사 출간을 담당하시며 찾아낸 희귀본입니다. 논에 물이 가득 저수된 것을 보니 농한기에 찍은 사진인 듯합니다.  76년도.. 영원히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고향입니다.




* 저작권체크 안 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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