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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Oct 07. 2020

양재천에 온 칸트

쾨니히스베르크 vs 칼리닌그라드

살아생전 그가 태어난 곳에서 100 마일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철학자, 그의 애향심이 강해서 그랬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떠나 당시 그의 전성기 평판이나 지명도로 봐서는 여러 도시, 여러 대학에서 방문 요청이 쇄도했을 법한데도 끝내 그는 한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이 신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고 그가 사수한 그 도시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입니다. 그는 지금 생전과 마찬가지로 사후 200여 년간 그의 고향이자 활동지였던 그 도시를 지키며 그곳의 대성당에 고이 영면하고 있습니다. 매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집 주변 정해진 루트로 산책을 해서 주민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하는 일화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그이기에 그 루틴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그의 생활 반경을 끝내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단초가 된 우리집 주변 양재천은 제가 이곳에 거주한 이래로 20여 년간 꾸준히 산책을 즐겨하는 곳입니다. 사시사철 철 따라 천과 수변 모습이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시민의 공간입니다. 10여 년 전엔 체중 감량 차 6개월간 단 하룻밤도 안 빼놓고 6개월간 양재천을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야근을 해도, 회식과 접대를 하고 와도, 새벽녘에 퇴근을 해도 와서 습관적으로 달리곤 하였습니다. 가상한 노력의 결과로 체중은 감량 목표치에 도달했으나 무릎에 이상이 생겨 이후 6개월간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무식이 부른 대참사로 이후론 거의 못 달립니다.

이 양재천에 3년 전부터 반가운 손님 한 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오~ 그 이름도 찬란한 임마누엘 칸트!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양재천 내 강남구역에서 서초구역으로 넘어가 지근거리에 있는 아주 조그만 미니섬에 앉아서 책을 펴고 사색하는 그의 멋진 동상이 생긴 것입니다. 이마가 잘 생긴 것으로 알려진 그이기에 이곳에서도 그는 예의 멋진 이마를 시원하게 뽐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전 그곳을 지나칠 때면 빠짐없이 그 미니섬 칸트의 영토에 들러 그를 만나고 가곤 합니다. 그에게 인사를 드리기도 하고, 눈도 마주치고, 때론 쓰다듬기도 하며 피곤할 땐 그가 내주는 벤치 옆자리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합니다. 그 시간은 인류의 큰 유산인 위대한 철학자와 짧으나마 시공을 초월한 교감을 주고받는 귀한 시간일 것입니다. 저 말고도 양재천을 오가는 많은 시민들도 저와 같은 심상으로 그를 대하곤 하겠지요.

이후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늘 그곳에 앉아 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 강변을 산책했던 생전의 칸트처럼 말입니다. 사진은 지난 여름 장마철 긴 비로 물이 불어나 있을 때 찍은 모습입니다. 그때도 그는 비를 피하지도 않고, 일어서지도 않고 여전히 앉아서 그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내 상념에 잠긴 위대한 철학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다행히 물이 그의 영토까지는 침범하진 못했습니다. 이렇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칸트는 단기간 내 양재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고대 그리스 밀레투스 학파 이래로 동시대에 그처럼 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독일일 것입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헤겔, 하이데거, 피히테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철학자들만 해도 꽤나 되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중 최고봉을 뽑으라면 그는 단연코 칸트일 것입니다. 영국 로크의 경험론과 프랑스 데카르트의 합리론을 비판하고 종합해낸 근대 철학의 선구자이니 말입니다. 근대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 흘러 들어갔고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 나왔다고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의 3대 비판 철학 서적을 완결함으로써 회의하고 또 회의하는 비판철학의 창시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야기하고픈 것은 칸트의 철학은 아닙니다. 철학의 문외한이기에 전혀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려고 애써 읽어도 읽어도 나오는 건 하품뿐이기에 그렇습니다. 제가 칸트에게서 글 소재로서 더 크게 느끼는 흥미는 그가 태어나고 살고 죽은 쾨니히스베르크란 도시입니다. 오늘날 독일의 뿌리인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던 그곳이 바로 칸트의 도시입니다. 독일어로 왕의 언덕이란 뜻으로 역대 프로이센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권위 있고 고풍스러운 도시였습니다. 이후 수도는 비스마르크 때 프로이센이 통일되면서 남서쪽 오늘날 베를린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비극 아닌 비극을 겪게 됩니다. 그것도 나쁘게, 더 나쁘게 말입니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로 서프로이센이 폴란드로 통합되면서 쾨니히스베르크가 있는 동프로이센은 독일과의 육로가 끊어지게 됩니다. 폴란드가 가로막은 것이지요. 그리고 2차 대전  승전국 소련이 과거 프로이센 지역의 쾨니히스베르크를 전리품으로 챙기게 됩니다. 소련은 도시명을 볼셰비키의 원로인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칼리닌그라드로 개명을 하였습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됩니다. 지도에서 보듯 이젠 러시아와의 육로도 벨라루스와 발트해 신흥 3국에 의해 끊어진 역외 영토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중국이나 러시아 건너 몽고나 카자흐스탄쯤에 우리 영토가 있는 모양새입니다. 러시아 입장에선 발트해의 겨울철 부동항인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위대한 칸트와 위대한 그의 철학과는 아무 상관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물론 칸트는 1804년 죽었으니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습니다.



전후 쾨니히스베르크를 접수한 소련은 그 도시를 해체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개시하였습니다. 군주국이었던 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입니다. 칸트가 졸업했고, 교수로 재직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칼리닌그라드 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아름답고 낭만적인 중세 도시였던 쾨니히스베르크유서 깊은 건축물들은 다 파괴되고 전형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밋밋한 일자 도시 모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같은 곳 전혀 다른 과거와 현재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대담한 문화파괴주의적 작태라 할 것입니다. 당시 전쟁으로 파괴된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인 레닌그라드의 부서진 건축물을 재건하는데 쾨니히스베르크의 자재가 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칼리닌그라드의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로 추방 성 귀환을 당하였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독일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옛 도심에 남아있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은 대성당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곳에 칸트가 잠들어 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살아생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사진 속 성당 주변 둑방 길이 칸트가 산책한 길이라고 합니다.  옛 모습과 비교하면 산책의 대마왕인 천하의 칸트라 하더라도 별로 산책하고 싶지 않았을 듯 싶습니다.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칸트는 독일인이지만 오늘날 그는 독일에선 볼 수 없습니다. 보시듯 그는 엄하게도 러시아 땅에 있습니다. 독일은 2005년 슈뢰더 총리 시절 푸틴 대통령과 협상을 통해 칸트의 동상이 있는 그의 모교 칼리닌그라드 대학을 임마누엘 칸트 대학으로 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과거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간판 스타였던 칸트의 대학으로 교명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명은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레닌그라드 등은 다들 옛 도시명으로 돌아갔는데 말입니다. 러시아 땅에 독일어로 된 도시를  수 없어 칼리닌그라드만이 여전히 그대로 쓰고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독일이 칸트의 유해 송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않는다는 점입니다. 살면서 지금까지 그런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법한 사안인데 말입니다. 이 시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살아서 한 번도 그 도시 밖으로 나간 적 없는 칸트이기에 죽어서도 그의 뜻을 존중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독일 영토 칸트가 연고 있는 지역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해를 가져와도 마땅히 안치할 자리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면 역사상 봐왔듯이 호전적인 게르만 민족의 속성 따라 언젠가 다시 그 땅을 수복하면 된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둔다고 도시와 무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날이 온다면 독일인들은 오늘날 그들의 마음의 고향인 왕의 언덕 쾨니히스베르크는 물론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근대 철학의 시조 칸트까지 온전히 되찾게 되는 것일 겁니다.



* 저작권이 체크 안 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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