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하 Oct 27. 2020

어느 메디치의 죽음과 그 유산

1478년 4월 부활절,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물 두오모 대성당에서 성스러운 미사 도중 세상을 놀라게 한 희대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암살입니다.  피해자는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인 로렌초 메디치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 메디치, 가해자는 메디치 가의 정적인 파치 가의 수장 야코보 파치를 비롯한 그쪽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멀리 떨어진 로마에서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치 가의 편입니다.



암살은 실패입니다. 파치 가의 음모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서 반드시 살해했어야 할 암살 1차 타깃인 로렌초는 부상만 당하고 도주에 성공했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 줄리아노는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몸엔 무려 열아홉 군데나 되는 칼자국 선명했습니다. 형제간 우애가 지극했던 지라 극에 달한 로렌초의 분노는 사건에 가담했던 피렌체에 거주하는 파치 가의 남자들과 관계자들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여 모두 죽임으로써 복수를 완료합니다. 그의 누나와 결혼한 파치 가의 남자만이 추방으로 정리되어 살생 명부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암살자를 포용하고 용서했던 그의 할아버지 국부 코시모 메디치와는 다른 방식의 결정이었습니다.


파치 가의 입장에선 피렌체에서 1대 메디치 죠반니 이후 세대가 흐를수록 권력이 공고해지는 메디치 가가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치 가는 피렌체 최고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그들 조상 중엔 1차 십자군 원정 시 예루살렘 성벽을 가장 먼저 뛰어넘어 성전에 십자군 깃발을 꽂아 그 공로로 성스러운 부싯돌을 피렌체에 가져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피렌체에선 매년 4월 부활절이면 수레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는 불꽃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개 양모업자에 불과했던 메디치 가가 해적 출신의 대립 교황을 후원하며 신용을 토대로 어찌어찌하여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피렌체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파치 가는 그 꼴을 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당시 교황인 식스투스 4세와 그의 조카 리아리오와 짜고 이런 거사를 벌인 것입니다. 교황도 금권력을 토대로 점점 다루기 힘들어지는 메디치 가 로렌초누를 필요가 있어 파치 가의 편에 서서 이 사건을 묵인하고 지원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메디치 가의 권력은 피렌체에서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도시에서 사사건건 그들을 방해하여 눈에 가시같던 경쟁 세력이 사라졌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기독교 절대주의인 그 시대에 미사 도중 칼부림을 벌인 파치 가를 피렌체 시민들은 곱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시민들은 피렌체에서 파치 가의 문장인 돌고래 표식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방패 위에 빨간 공과 피렌체의 국화인 백합이 올라탄 메디치 가의 문장만이 보이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자라 불리게 되는 로렌초 메디치, 공화국 피렌체에서 점점 군주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이 사건으로 피렌체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메디치 가의 줄리아노는 죽어서도 시민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렌초와 공동으로 피렌체를 통치했던 동생 줄리아노는 수려한 외모와 마상 경기 등에 다양한 재능을 지녀 피렌체에서 인기 만점인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려진 초상화를 보더라도 형 로렌초와는 달리 줄리아노는 핸썸 가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같은 존재로 피렌체 여인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그가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것입니다.



그가 칼로 난자당해 두오모 바닥에 쓰러졌을 때 감겨가는 그의 눈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두오모의 천정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코시모 메디치가 당시 건축 기술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르네상스 건축 천재 부르넬레스키를 통해 완성해 올렸던 바로 그 큐폴라입니다.


파치 가의 음모로 그는 그렇게 속절없이 죽었지만 그의 죽음이 빚어낸 몇 가지 유산이 있기에 이제부터 그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미혼인 그에겐 애인이 있었습니다. 인물 좋고 가문 좋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유부녀 신분이었습니다.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여인으로 그녀는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혔습니다. 이름에서 보듯 그녀의 남편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 가문의 남자였습니다. 아무튼 당시 피렌체 최고 미남미녀는 이렇게 불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시모네타 그녀가 어느 정도로 아름다웠냐면 당시 메디치 가에서 사숙했던 르네상스의 유명 화가인 보티첼리는 그녀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경탄해 마지않아 한 폭의 그림에 그녀를 담았습니다. 바로 그 그림이 그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시모네타 그녀의 모습이 곧 미의 여신 비너스가 된 것입니다. 지구 상에 여신 비너스가 있다면 그것은 시모네타일 것이라고 보티첼리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티첼리가 시모네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아래 그림은 비너스와 군신 마르스입니다. 둘은 방금 정사를 나눈 듯합니다. 그 결과로 남자는 뻗어서 잠이 들었는데 여자는 뭔가 불만에 가득 찬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남신 르스의 모델은 줄리아노입니다. 그의  여신 비너스를  살펴보면 위 비너스의 탄생 그림 속 그녀 비너스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시모네타 딱 한 명뿐이기에 어떤 작품에서 그녀의 모습은 같습니다.


보티첼리는 메디치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자라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들과 친구처럼 지내 사이였습니다. 특히 줄리아노와 가까워 그의 죽음을 몹시 애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시모네타를 연모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가슴속에서만 품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줄리아노이다보니 그가 죽은 후 한 어린아이가 메디치 가문의 문을 두드리는데 그는 가 시모네타 아닌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사생아였습니다. 아들 이름을 줄리아노라 지을 정도로 동생 줄리아노를 워낙 아낀 형 로렌초인지라 그는 줄리아노의 사생아인 줄리오를 그의 양자로 삼아 메디치 가문의 남자로 자라게 합니다.


로렌초의 자가 아니라 가업을 이을 수 없었던 줄리오서 교황이 됩니다. 아니 처음부터 로렌초가 그를 그렇게 성장시켰니다. 로마의 약탈 사건으로 유명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바로 줄리아노의 아들입니다. 파치 가의 음모 사건 때 배후에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있는 것을 본 로렌초는 자기 집안에서 직접 교황을 배출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줄리아노의 아들에게 그 미션을 부여한 것입니다. 클레멘스 7세 이전 면죄부 판매로 유명한 교황 레오 10세는 로렌초의 둘째 아들입니다. 과연 어마어마한 메디치입니다. 로렌초 메디치, 그는 교권과 왕권이 격돌했던 그 시대에 가문의 방패막이와 보험 조로 교황을 집안에서 직접 만든 것입니다.



아래 단색의 드로잉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케치한 그림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림 속 남자는 교수형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치 가의 암살범 중 하나로 가장 마지막에 처형을 당한 자입니다. 사건 후 그는 멀리 현재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로 도주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당시 피렌체와  콘스탄티노플 간 범죄인 인도 협약이 체결되어 있어 거기서 압송해 와 교수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때 처형은 일벌백계의 의미로 두오모 옆 베키오궁 고층 창 안에서 목을 밧줄에 걸어 창 밖으로 떨어뜨리는 형식으로 해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아래서 모두 볼 수 있게 진행하였습니다. 군중 모두가 탄성을 지르는 스펙터클한 장면이었을 니다. 이 군중 사이에 우리가 잘 아는 다빈치 바로 그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천재 예술가답게 그는 크로키 기법으로 빠르게 이 장면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그림 상단의 메모는 이 남자가 입은 의복에 관한 의 기술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광경을 구경한 군중 중엔 마키아벨리도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도시 피렌체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9살, 어렸을 때부터 피렌체에서 정적들 간의 이런 사건들을 보고 자란 그였기에 훗날 그 유명한 군주론이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때, 운 때가 맞지 않아 그토록 일하고픈 메디치 가를 위해 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피렌체에서 쫓겨났던 메디치 가가 재집권 시 재취업을 위해 피렌체 외곽의 움막같은 집에서 시내 두오모를 바라보며 와신상담 기회를 옅보던 그였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그는 그의 최고 명저인 군주론을 탈고하게 됩니다. 책은 우여곡절을 거쳐 당시 메디치 가의 지도자인 로렌초 2세에게 헌정되는데 는 이 책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인 위대한 자 로렌초였다면 아마도 꽤나 큰 관심을 보이며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묻힐 뻔한 이 책을 후에 세상에 출간한 이는 바로 교황이 된 클레멘스 7세였습니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그의 또 하나의 명저인 피렌체사도 의뢰하였습니다. 요절한 줄리아노의 아들 덕에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책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후 군주론은 주지하다시피 세상의 모든 제왕, 정복자, 독재자, 지도자들의 교과서가 됩니다.



줄리아노 메디치, 그는 500여 년 전에 그렇게 죽었지만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의 수려한 외모를 뽐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로렌초의 모습을 처음 봤을  생면부지일지라도 줄리아노의 모습은 보고 스치며 자라왔습니다. 보면 바로 아하! 하고 감탄하면서 갸가 갸가? 할 친근한 그가 바로 줄리아노입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 석고 데생 시 수없이 봐왔던 말 그대로 조각남 줄리앙이 바로 줄리아노입니다. 여자들의 첫 키스 상대로 가장 많이 뽑힌 남자가 줄리앙이란 확인 안 된 설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스타입니다. 줄리앙과 더불어 비너스도 꽤 유명한 석고상이죠. 이렇게 비너스와 줄리아노는 유력 석고상 패밀리로 후세에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줄리아노를 모델로 한 줄리앙은 그 시절 메디치 가문에서 먹고 자라고 교육까지 받은 또 한 명의 르네상스 대가 미켈란젤로의 품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유산을 남깁니다. 그가 가진 생전 자산이 사후 유산이 되는 것이지요. 많든 적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유산은 그렇게 후대에 남습니다. 줄리아노 메디치, 사실 살아생전 그가 남긴 자산이라 할만한 업적은 기록상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후 인류에게 위와 같은 많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 위대한 자라 불리는 로렌초 시대에 그가 살고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물값.. 과연 줄리아노 그만큼 죽어서도 이렇게 인물값을 톡톡히 하는 남자가 역사상 있을까요?


사실 줄리앙이 줄리아노라는 설은 하나가 더 있습니다. 위에 등장하는 로렌초의 아들 줄리아노가 줄리앙이라는 설이지요. 둘은 조카 삼촌 관계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활동했던 동시대에 살았던 동명이인이니 그런 혼돈이 생긴 듯합니다. 글에서 보듯 저는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를 줄리앙 석고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 더 근접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신화성을 더 부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 저작권이 체크 안 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양재천에 온 칸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