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엔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곳에 살던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퇴출되었기 때문입니다. 1248년 멀지 않은 세비야가 정복된 이후에도 무려 244년을 버티던 그라나다 왕국은 결국 만세를 부르고 본래 그들이 왔던 북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물러난 자는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술탄인 압둘 보압딜이었고 물리친 자는 카스티야 연합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의 페르난도 2세였습니다. 둘은 부부였습니다. 1469년 그 둘이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들 선조 대대로 800년간 꿈꾸어왔던 통일 왕국의 꿈을 마침내 실현한 것입니다. 무어인이 오기 전 이베리아의 주인은 기독교도들이라 그 통일 운동은 실지 수복을 뜻하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 불립니다. 그 이전 2백년에 걸친 지중해 반대편 끝자락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전쟁은 실패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십자군전쟁은 이렇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통일 국가의 국명은 과거 로마시대의 이름인 에스파냐로 정했습니다. 영어로는 스페인이고 라틴어로는 히스파니아라 불린 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통일 왕국 스페인은 일사천리로 직진을 하였습니다. 국운 상승, 이방인을 상대로 800년 성전을 완수한 스페니쉬에게 하느님이 큰 복을 내린 것입니다. 국운은 통일의 해인 1492년부터 바로 터졌습니다. 이사벨 1세가 긴가민가 뜻하지 않게 콜럼버스라 불리는 어떤 이탈리안에게 한 투자가 처음엔 아닌 줄 알았는데 대박을 터트린 것입니다. 그 결과 신대륙 아메리카의 대부분이 스페인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포르투갈에 이어 대항해 시대의 2번 타자로 승선한 스페인이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간 것입니다.
영토 확장의 국운은 서쪽 대서양과 신대륙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신화 속 에우로파 여신의 머리에 해당되는 스페인이 유럽 동쪽 대륙으로도 뻗어나가 그 여신의 몸통과 하체의 일부도 그들 영토에 편입시킨 것입니다. 그런 동진을 통해 16세기 유럽의 지도는 바뀌어 갔습니다. 방법은 그라나다 함락이나 신대륙 개척과도 같은 침략이 아닌 그 이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결혼을 통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하나가 되었듯이 결혼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돈은 10세기 이후 중부 유럽에서 태동해 슬금슬금 성장해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왕가로 자리 잡은 합스부르크의 패밀리였습니다. 비엔나를 수도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역시 서진을 통해 갓 통일한 스페인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온 합스부르크의 공식이 스페인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 것입니다.
통일 왕국 스페인의 시조가 된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의 후계자는 아들이 아닌 딸인 후아나였습니다. 하나 있던 아들 후안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대 스페인 왕이 된 후아나의 여동생이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첫 부인인 캐서린입니다. 6명의 부인들 중 캐서린이 또 있기에 아버지의 나라 이름을 따서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렇게 언니 후아나는 거대한 영토의 여왕이 되었지만 그녀는 남편의 거침없는 바람기로 소박을 맞은 비운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후아나 여왕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아들인 펠리페 1세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이전 막시밀리안은 부르고뉴공국의 여 대공인 마리와 결혼을 하여 오늘날 베네룩스 3국이 위치한 저지대 국가들을 합스부르크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작 딸과 결혼을 하여 북이탈리아도 합스부르크의 영향권에 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는 중부유럽의 끝 비엔나에서 결혼을 통해 서진을 거듭한 결과 스페인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너희는 전쟁을 해라. 우리는 결혼을 할 테니.."라는 영토 확장 슬로건이 있을 정도로 결혼은 합스부르크의 중요한 영토 확장 전략이었습니다.
후아나 여왕과 펠리페 1세의 결혼은 물론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천하의 합스부르크라도 백년전쟁 후 강력한 왕권 국가가 된 프랑스는 어쩔 수 없었기에 프랑스를 건너뛰고 스페인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함으로써 위협을 느낀 합스부르크가 프랑스 좌측의 신생 통일국가 스페인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서쪽 끝까지 진출했고, 스페인은 통일과 동시에 유럽의 동쪽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피렌체의 실력자 메디치 가문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18년간 추방을 당했습니다. 메디치 중 가장 강성해 위대한 자((Il Magnifico)라 불린 로렌초 메디치 사후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후아나 여왕과 펠리페 1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카를로스 1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름보다 카를 5세로 더 많이 불립니다. 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 왕이지만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에선 카를 5세 황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역사상 최고의 금수저를 뽑는다면 바로 이 카를 5세일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1500) 어머니의 땅 스페인과 아버지의 땅 신성로마제국의 킹이 예약된 인물이었으니까요. 보너스로 스페인엔 신대륙인 남북 아메리카와 시칠리아, 나폴리 왕국이 포함됩니다. 남부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전신 국가들 중 하나인 아라곤 왕국에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당시 카를 5세가 보유한 각기 다른 나라의 왕관은 족히 수십 개는 되었을 것입니다.
1516년 유럽 역사상 최고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스페인 최고 전성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자손이 끊기는 1700년까지의 185년을 압스부르고(Habsburgo)라 부릅니다. 똑같은 독일어의 합스부르크왕가(Haus of Habsburg)이지만 스페인어로 그렇게도 부르는 것입니다. 합스부르크의 중심이 오스트리아이기에 스페인에선 오스트리아왕가(Casa de Austria)라고도 불렀습니다. 아무래도 카를 5세의 어머니인 후아나는 여왕이고 아버지인 펠리페 1세가 합스부르크이기에 오스트리아를 앞세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고달팠습니다. 1556년까지 40년간의 재위 기간 중 그 넓은 영토에서 워낙 다양하고도 많은 사건들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마르틴 루터는 카톨릭을 비판하는 95개 조의 격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것이 962년 교황에 의해 탄생한 연합체 국가이기에 그는 카톨릭과 교황의 수호자로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마르틴 루터는 이단자로 선고되었음에도 독일 제후들이 반기를 듦으로써 개신교의 자유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를 통해 "그 지역 지배자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라는 룰이 정해졌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입니다. 이미 잉글랜드에선 1534년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해 카톨릭과 절연을 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종교의 자유가 아닌 이혼의 자유를 위함이었습니다.
독실한 카톨릭교도인 카를 5세는 1527년 교황과 맞서서 승리한 로마 약탈사건(Sacco di Roma)의 중심에도 섰습니다.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그의 권력을 견제하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의 반대파와 손을 잡자(코냑동맹, 1526) 교황의 도시인 로마를 공격한 것입니다. 로마를 점령한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결국 교황은 항복을 하고 카를 5세에게 배상금까지 지불하였습니다. 이래저래 카톨릭 수난의 시대가 도래하여 교황권력이 세속권력 아래에 놓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1527년의 사코디로마는 1077년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카노사의 굴욕이 역전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격세지감입니다. 피해자로 바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위에 등장한 로렌초 메디치의 조카이자 양자입니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복잡한 사건에 염증을 느낀 카를 5세는 1556년 왕좌에서 스스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동생에게 영토를 분할해서 승계하였습니다. 그게 통치에 효율적이라 생각되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겐 스페인(스페인, 신대륙, 저지대국가, 시칠리아, 나폴리)을,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겐 전통적인 합스부르크왕가의 땅인 오스트리아 중심의 신성로마제국을 상속했습니다. 마치 과거 395년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에게 동로마와 서로마를 나눠 줬듯이 이제 유럽엔 두 개의 합스부르크왕가가 들어섰습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입니다.
펠리페 2세는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겼습니다. 과거 서고트왕국과 카스티야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로 천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를 수도로 삼은 것과 유사합니다. 두 도시 모두 비슷한 시기에 역사적 기반이 없던 깡촌에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인 마드리드엔 바르셀로나, 세비야, 그라나다, 코르도바 등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유적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이슬람 유적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펠리페 2세는 1571년 특이하게도 아시아에 있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편입시켰습니다. 1521년 마젤란이 세계일주 시 살해당한 구원의 나라로 진작부터 공을 들인 결과였습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기스이지만 스페인의 카를 5세의 지원으로 세계일주 항해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서쪽 대서양으로 가도 인도가 나온다는 콜럼버스의 이론을 입증했습니다. 필리핀은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국명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국명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까지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로 복속되었니까요.
1571년 같은 해 10월 7일 유럽의 기독교도들에겐 역사에 길이 남을 승전보가 전해집니다. 그리스 앞바다에서 벌어진 레판토해전의 승리입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그의 4촌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2세가 합작해 서쪽 유럽을 넘보는 오스만제국을 궤멸시킨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슬람교에게 시원하게 승리를 하였습니다. 신성동맹을 결성했던 교황 비오 5세는 너무나도 기뻐해 그 승리엔 성모 마리아의 도움이 있었다며 10월 7일 그날은 지금도 승리의 성모축일로 기리고 있습니다. 르네상스기 <미술가 열전>을 저술한 조르조 바사리는 성모 마리아가 등장하는 그 해전을 그림으로 기록했습니다. 현재 그 그림은 바티칸 교황청의 접견실에 걸려있습니다.
1571년 레판토해전의 승리, 이때가 스페인과 압스부르고의 최절정기입니다. 그렇게 1492년 통일기부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구가했던 스페인은 그 시점부터 기세가 꺾여 내려갑니다. 역사에 영원한 승자는 없으며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보듯이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와 충돌하며 역사의 후면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대는 영국 잉글랜드였습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 해군의 무적함대는 1588년 칼레 앞바다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이 났습니다. 100년 가까이 중천에 떠있던 스페인의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와 영국과의 관계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는 네 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부인이 블러드 메리로 악명 높은 헨리 8세의 장녀입니다. 펠리페 2세에겐 후아나 여왕 할머니의 여동생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니 그녀는 5촌 이모뻘로 11세 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4년 후인 1558년 메리 여왕은 무자식으로 죽었습니다. 그 후 펠리페 2세는 부인이었던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구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결혼했다고 한 버진퀸인 그녀의 거절로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조카뻘인 스코틀랜드의 동명의 메리 여왕과도 또 결혼설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그녀를 처형해 그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펠리페 2세가 세 번이나 영국의 왕녀들과 결혼으로 연결된 배경에는 종교가 담겨있습니다. 당시 개신교 국가로 바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였지만 정통 카톨릭교도였던 그가 카톨릭 부흥의 기치 하에 그녀들과 결혼을 했거나 하려 했던 것입니다. 물론 잉글랜드의 메리와 스코틀랜드의 메리도 카톨릭교도였기에 펠리페 2세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렇게 왕가의 결혼엔 정치적 이해만이 아닌 종교적인 이해도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준 펠리페 2세의 스페인과 영국이었습니다. 종략결혼이라 불러야 할까요?
16세기말 스페인의 몰락엔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은과 금을 제대로 딜링하지 못한 경제 정책의 실패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가격혁명으로 불리는 인플레이션이 유럽을 강타해 압스부르고 휘하 국가들의 경제가 엉망이 된 것입니다. 또한 넓은 영토를 다스리느라 돈을 주고 많은 용병을 고용한 것도 몰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와 80년에 걸친 장기간 전쟁에서 피해가 컸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최절정기라 부르는 펠리페 2세 재위 기간에만 4번의 파산 선고를 하였습니다. 결국 네덜란드는 그의 사후 1648년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1516년에 시작된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1700년도에 끝이 났습니다. 합스부르크의 피가 흐르는 마지막 군주인 카를로스 2세가 그 해에 아들도 딸도 없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39세로 죽은 그의 죽음엔 지속된 근친혼으로 인한 합스부르크의 유전병이 강하게 작용을 하였습니다. 주걱턱 외모로 유명한 합스부르크가 근친혼의 중복 반복으로 신체적인 몰락도 가속화된 것입니다.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인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로 평생 그의 초상화를 그렸던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인 <시녀들>에서도 보이듯이 압스부르고 패밀리의 얼굴엔 여지없이 턱이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민족과 인종이 출입하고 살아 혼혈이 즐비했던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에서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압스부르고는 이렇게 내혼만을 주장하다가 가계가 끝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압스부르고 이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전쟁을 통해 프랑스계 부르봉 왕가가 들어와 다스리게 됩니다. 그 부르봉 왕가가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스페인의 왕실입니다. 하지만 부르봉 왕가가 다스리는 왕국이기에 -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라는 추론은 가능한 - 스페인은 훗날 최고의 시련기를 맞게 됩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 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국가가 된 것입니다.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무려 100만명이나 죽는 최악의 식민지 생활을 6년간(1808~1814)이나 경험하게 됩니다. 카를 5세, 펠리페 2세의 압스부르고 때 유럽의 최강자로 정점을 찍었던 스페인은 압스부르고가 끝나고 이렇게 유럽의 종이호랑이로 전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