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벌 2세와 헨리 8세의 이혼
역사상 혼수가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결혼은 이혼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일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의 형인 아서 왕자 포함입니다. 그 튜더왕조의 형제는 같은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불리는 통일 스페인왕국의 공주였습니다. 헨리 8세가 결혼한 6명의 왕비들 중 캐서린이란 이름이 두 명이나 더 있어 그녀들과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이름 앞에 시댁 왕국 이름을 붙여온 캐서린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1492년 통일은 됐다지만 엄마인 이사벨 1세와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가 이전부터 다스려 온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여왕과 왕으로 각각 통치했기에 아버지의 나라 이름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캐서린은 1501년 잉글랜드 헨리 7세의 장자인 아서 왕자와 16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 20주 만에 아서는 감기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은 것입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그녀는 응당 친정인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시아버지인 헨리 7세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돌아가면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오고, 그때까지 받지 못한 약속된 지참금을 받을 수 없기에 그랬습니다. 당시 헨리 7세는 장미전쟁(1455~1487)에 승리하고 튜더왕조를 개창했기에 오랜 전쟁 기간 지출한 전비로 왕가의 살림이 곤궁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캐서린의 혼수에 탐이 난 헨리 7세는 장자인 아서가 죽자 차남인 훗날 헨리 8세와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혼수를 놓고 지루한 밀당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헨리 7세의 밀당 상대는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였습니다. 그 기간 그녀는 매우 곤궁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잉글랜드의 시아버지는 물론 스페인의 친정아버지도 그녀를 나몰라라 하며 하나도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색이 왕녀인데 의식주 해결이 곤란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구두쇠로 유명한 헨리 7세는 돈 때문에, 페르난도 2세는 출가외인으로 보고 책임을 잉글랜드에게 떠민 것입니다. 결국 그 밀당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가 결혼을 서둘러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빠진 형수를 지켜보다가 반해서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혼수 밀당 7년 후인 1509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헨리 8세는 아내가 된 캐서린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다시 20대로 돌아가도 캐서린에게 결혼하겠다는 시를 쓸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캐서린을 향한 헨리 8세의 사랑은 어느 시점부터 식어갔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헨리 8세는 그의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부의 3남 3녀는 한 명만 온전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훗날 블러드 메리라 불리는 메리 1세입니다. 3명의 아들은 죽어서 나오거나 영아 사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캐서린에겐 폐경기가 다가왔는데 그 시점 애정이 식은 헨리 8세에게 한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정부가 있고 정부에게서 난 아들도 있던 헨리 8세였지만 앤 불린은 헨리 8세에게 그녀의 젊음과 미모를 무기로 정식 결혼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몸이 달은 헨리 8세는 파격적인 행동을 결행했습니다. 이혼이 불가한 카톨릭 국가의 군주가 이혼을 강행한 것입니다. 정확히는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를 주장했습니다. 본래 형의 아내였으니 성서에 입각해서 근친혼이라는 이유로 무효화를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할 때 그녀가 형인 아서 왕자와 20주간 살면서 동침한 적이 없다는 점을 내세워 교황에게도 결혼 허락을 청했기에 이것은 말이 안 되는 핑계이고 모순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유럽의 왕실엔 근친혼이 빈번했습니다. 로마의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당연히 이혼에 반대를 했습니다. 사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가 무너져 가는 시점이라 동의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유럽 최강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캐서린의 친조카였기에 교황은 그의 눈치도 봐야만 했습니다. 캐서린의 여동생인 스페인 여왕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가 그입니다. 결국 헨리 8세는 1533년 앤 불린과 결혼식을 강행하고 그것의 법적 근거인 수장령을 1534년 발동했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은 왕이라는 잉글랜드 국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혼을 당한 캐서린 왕비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 앞에 앤 불린이 나타난 후 벌어진 6년의 이혼 추진 기간 동안에도 서명 시 잉글랜드의 '여왕 캐서린(Katherine The Queen)'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수녀원에 유폐된 그녀는 생의 마지막 2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사망을 하였습니다. 캐서린에게 마음이 완전히 떠난 헨리 8세는 그녀의 보석을 빼앗아 앤 불린에게 선물했으며 유일한 딸인 메리도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1536년 1월 51세로 사망한 캐서린의 장례식엔 많은 조문객들이 모였습니다. 평소 독실한 심앙심에 예의도 바르고 자선사업에 앞장섰던 덕망 있는 왕비라 그렇게 추모를 한 것입니다. 캐서린이 죽자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은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되었다"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4개월 후에 그녀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2017년 7월 배우자의 이혼 조정 신청으로 시작된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이하 노관장)의 이혼 재판이 지난 10월 16일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8년을 지루하게 끌어온 소송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대법원에서 이혼만큼은 확실하게 결정이 되었습니다. 대법원에서 그녀 배우자의 유책사유로 인해 고등법원에서 지급하라고 한 위자료 20억원은 적법하다고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협의로는 이혼이 안 돼 재판이혼을 선택한 그 부부는 그날로 정식으로 남남이 되었습니다. 37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말입니다. 그 말인즉슨 그날까지는 법적으로는 부부였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더 이상 부부가 아닌 상태에서 고등법원이 결정해야 할 재산분할 건입니다.
이혼이 확정되고 20일 후 노관장은 그간 살던 집에서 퇴거를 알리는 '짐을 싸며(Packing up)'라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과 인스타에 올렸습니다.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사생활을 올려왔던 그녀였기에 SNS에 달라진 동정을 알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 소식에 많은 반향이 일었습니다. 그녀를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댓글이나 기호 표시는 당연할 수 있지만 때 아니게, 아니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들이 나서서 그녀의 소식을 인용해 다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쓴 내용과 올린 사진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구동성으로 퇴거하는 그 집과 집세를 물고 늘어지는 기사들까지 싣고 있습니다. 그 집에 앞서 먼저 퇴실당한 노관장의 일터인 아트센터 나비와 타작마당의 임대료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제 이 뉴스는 주류 언론까지 나서서 반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혼이 결정되어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집을 나오는 노관장이 마치 집세를 떼어먹고 도주하는 파렴치한처럼 보이게 하는 기사들입니다. 사실 그런 의도로 쓴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인문학에 기초한 인문교양 글을 주로 쓰는 저는 2023년 1월 노관장의 1심 선고를 접하고 이곳에 <헨리 8세와 어느 재벌 2세의 이혼>이란 글을 게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엔 <타작마당 사과나무의 위기>라는 글도 썼습니다. 두 글 다 그녀 편에 서서 쓴 글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법률적 견해가 아닌 제가 세상에 살며 그것이 옳다고 배워온 상식선에서 쓴 글입니다. 법은 논하고 싶어도 제가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선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위와 같은 기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집을 떠나는 노관장의 소회와는 별개로 그 기사들에 잘못된 점이 있고, 자극적이고, 무엇보다도 악의적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렇듯 같은 선상의 내용이기에 저는 전에 쓴 글과 제목의 순서만 바꾸어서 쓰고 있습니다. 제게는 이 건과 이상하게도 자꾸만 연결되는 역사적 사건인 헨리 8세의 이혼을 또 소개하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이 글은 인문교양 에세이니까요.
언론들의 기사를 보면 노관장이 살다가 나온 집은 워커힐호텔의 고급빌라인 에메랄드빌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용처와 숙박료라는 원색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 기사들을 보고 저는 언뜻 워커힐호텔에 있는 애스톤하우스가 떠올랐습니다. 럭셔리 결혼식장으로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인들의 결혼식과 고급 비즈니스와 사교 공간으로 쓰이는 호텔 내 빌라동에 있는 곳입니다. 물론 제공해주는 음식도 매우 고급스럽고 맛있습니다. 노관장은 애스톤하우스와 유사한 용처로 보이게 하려고 언론들이 애쓰며 다루고 있는 에메랄드빌라에서 1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간 쌓인 숙박료가 20억이고, 많게는 100억에 달한다고 기사에 나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현재 월 숙박료는 7천만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에메랄드빌라로 언론에서 칭하는 곳은 그 기간 노관장이 살아온 집으로서의 집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위의 애스톤하우스와 같은 대여용 이벤트 공간이나 숙박을 위한 영업장으로 사용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선 그녀뿐만이 아니라 노관장 부부 사이에서 난 3남매도 함께 살았으니까요. 두 딸은 결혼해서 나갔으니 그때부터 딸들에게 그 집은 친정 엄마가 사는 친정집으로 오갔을 것입니다. 그녀가 SNS에도 썼듯이 미혼인 막내아들은 지금까지도 엄마와 함께 살아온 집입니다. 그 글과 사진에서 보듯이 살림도 차있는 집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그 집은 지금은 작고한 그녀의 시부모도 생존 시 그렇게 집으로 살았던 공간입니다. 과거 "자가 소유한 집이 없이 사는 회장님"이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노관장 부부도 신혼 초엔 그 시부모와 함께 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사는 주거의 형태는 다양한데 노관장은 최근까지 그런 집에서 자녀와 함께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듯 언론에 나오는 문제의 그 집은 워커힐호텔을 찾는 외부 고객보다는 오너 패밀리가 살고 관리해 온 집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노관장이 2015년에 다시 입주했다고 하니 비어있던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근본적으로 영업용으로 대여해주긴 현실적으로 힘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엔 선대 회장님 부부가 사용했던 가구나 소중한 물건들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너 패밀리라고 해서 임대료를 안 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이지만 그 집의 어엿한 임대인은 워커힐호텔이 속한 SK네트웍스이니 어떤 형태로든 그곳에 임대료는 지급했을 것입니다. 언론에서 얘기하는 숙박료를 선대 회장님 부부도 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쟁점은 그간 그 임대료를 책임져주던 노관장의 배우자가 그 임대료 지급을 어느 시점부터 중지했다는 것입니다. 실제 노관장의 미납액이 100억에 달한다 하니 추정으로는 이혼을 선언했거나, 이혼 재판이 시작된 시점부터일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노관장에게 비판조로 기사를 쓰고 있는 언론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간단히, 아주 간단히, 임대 주택에 사는 일반 가정에서 부자인 남편이 이혼을 원해 나가서 살면 그 시점부터 그 집세는 여자인 아내가 내야 하는지요? 그리고 아내가 지급 능력이 안 되면 그 집에서 바로 쫓겨나야 하는지요? 그 집엔 세컨드하우스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재판에서 이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유책 사유는 남편에게 있고, 경제권도 남편에게 있으며, 게다가 그 집은 남편 사업체 소유로 되어있는 집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집엔 엄마와 함께 아이들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자녀들도 아버지가 내주지 않는 그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지요?
세상의 상식은 결혼 기간이 법적으로 유지되는 이혼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그 이전처럼 남편이고 아버지인 배우자가 그의 가족이 사는 집세를 책임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더구나 경제력이 월등한 남편이고 아버지이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강조하지만 위에서 예를 들은 그 집은 배우자가 보유한 사업체가 관할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상식이 주거의 형태가 다르다고 해서, 일반인과는 다른 재벌가의 집이라고 해서 다르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관장의 경우 만약 그녀와 아이들이 살아온 집이 일반 주택가의 자가 집이었다면 그래도 배우자 쪽에서 그 집세를 굳이 월세로 환산해서 청구했을까요? 만약에 노관장과 자녀들이 지금 그 배우자가 살고 있는 이태원의 저택 같은 곳에서 그동안 살아왔다면 말입니다.
노관장은 진작부터 그 에메랄드빌라에서 퇴거 압박을 받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집세 숙박료 운운하는 언론들이 간과하는 것은 보듯이 그 집의 임대료는 노관장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청구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엄마와 함께 살아온 집이었으니까요. 아빠가 떠난 집의 경우 아이들은 대개 엄마와 함께 삽니다. 그런데도 그것까지도 옳다고 생각하는지 언론들은 집을 나가는 노관장이 그 집에 잘못한 것처럼 기사를 써대고 있습니다. 숙박료를 청구해온 워커힐호텔이나 SK네트웍스에겐 배임죄 걱정까지 친절하게 해주면서 말입니다.
노관장은 이혼이 확정됐으므로 그 집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확정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법적으로 결혼관계가 인정되는 부부이니 본인이 그 전과 같은 신분과 자격으로 그곳에서 생활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SK그룹 계열사에 사무실을 둔 일터에선 진작 퇴실을 하였습니다. 위의 집 문제와 유사한 방법으로 법리적인 논리로 압박을 가해 사무실을 뺄 수밖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메인 일터인 아트센터 나비는 종로 서린빌딩에 입주해 있었습니다. 임대인이 SK이노베이션인데 임대계약 종료를 이유로 퇴실 압박을 받다가 버텼지만 결국은 나왔습니다. 아트센터 나비는 전신이 노관장의 시어머니가 세운 워커힐미술관으로 그녀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또한 그녀의 갤러리 겸 크리에이티브 오피스로 사용했던 장충동의 타작마당은 소유자가 SK텔레콤인데 그곳에서도 역시 퇴실 압박을 받다가 결국은 사무실을 뺐습니다. 그래서 이젠 SK그룹에 속한 모든 집과 일터에서 나온 그녀입니다.
제가 안타깝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이런 강요와 압박을 꼭 이혼 중에 진행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혼이 확정되니 노관장이 집에서 나온 것처럼 확정된 후에 진행했어도 될 일이 아니었나 싶은 것입니다. 진짜 SK그룹에서 노관장의 집과 사무실의 임대료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었을까요? 배임이 무서워서 그렇게 청구를 하고 퇴거를 압박했을까요? 배임이라면 현 정부에서 폐지를 추진하니 한시름 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결코 이혼 여론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이런 일들을 왜 그렇게 무리하게 진행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노관장은 과거 정상적인 결혼 생활 시 아트센터 나비와 타작마당 같은 일터를 본인 명의의 근사한 고층 건물로 올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재계 2위의 사모라면 그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재계 2위 사모였다곤 하지만 재판에서 법적인 재산으로 언급되는 SK그룹 주식만 보더라도 노관장은 고작 SK주식회사 8,762주와 SK이노베이션 주식 8,362주를 가지고 있는게 전부입니다. 진짜 그럴까 할 정도로 지나치게 적게 느껴지는 수량의 주식입니다. 그 주식을 팔면 청구된 숙박비나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이 주식은 이번에 이혼이 확정되며 SK그룹 특수관계인에서 제외되며 밝혀진 내용입니다.
헨리 8세는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 이후에도 결혼행진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왕비들에게는 역시나 잔혹하게 대했습니다. 앤 불린과 다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과 근친상간 혐의, 그리고 결혼 전 남자관계로 참수를 당했습니다.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는 과거 그녀와 관계했던 남자들까지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가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헨리 8세를 잇는 튜더왕조의 3대 왕인 에드워드 6세입니다. 9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6년 후인 15세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제인 시모어는 출산 후유증으로 바로 사망을 했습니다. 위의 3명의 왕비는 모두 시녀였습니다.
남은 두 명의 왕비는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그러데 그 이유가 기발합니다. 네 번째 왕비인 독일에서 온 클레베의 앤은 결혼 6개월 후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초상화를 보고 결혼을 추진한 것인데 막상 보니 실물이 마음에 안 들어 몸에 손도 안 대고 고심하다 결혼 무효화를 선언한 것입니다. 헨리 8세는 그녀에게 미안했는지 성과 영지를 비롯한 많은 재산을 주어 그녀는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습니다. 마지막인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는 그녀도 재혼이었는데 늙고 비만인 병든 헨리 8세를 3년 6개월간 수발하며 결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후 캐서린 파는 결혼 전 사랑했던 남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 건강했다면 어떤 변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1547년 56세에 사망한 헨리 8세의 묘지는 윈저성에 있으며 그의 곁엔 유일하게 아들을 낳아준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묻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