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 포화에 이지러진 /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포플러 나무의 근골 사이로 /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 한 가닥 구부린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시인의 대표작인 <추일서정>입니다. 어쩌면 이 시는 우리 국민이 가을 하면 떠올리는 첫 번째 시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교과서에 나와서도 그렇고 도입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워낙 강한 시구여서도 그럴 것입니다. 가을을 시로 쏟아내는 시인들이 많다곤 하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가을 중 가장 많은 시기는 만추일 것입니다. 이유는 그때가 되면 등장하는 낙엽이라는 오브제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낙엽은 시인, 아니 확장해서 장르를 막론하고 문인들에겐 강하고 매력적인 글감으로 사용되어 왔으니까요.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인데 그 심상에 낙엽을 올리면 비유할 것이 참으로 많아서 그럴 것입니다. 위의 시도 제목은 전체 가을을 나타내는 <추일서정>이지만 시에서는 낙엽이 있는 만추의 서정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시인은 '만추일서정', 이렇게 제목을 달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가을은 곧 만추였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김광균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이 시를 발표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는 물론 아시아 전체를 유린해가던 서슬 퍼런 시기에 그와 우리 민족의 운명을 낙엽에 비유해 시를 쓴 것입니다. <추일서정>에 폴란드를 등장시킨 것은 바로 전 해인 1939년 폴란드가 독일에 침공당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입니다. 일본은 2년 후인 1941년 그 전쟁에 참전해 누구도 예상 못했던 미국을 공습했습니다. 현실에 민감했던 시인은 세계사의 시류를 시에 넣은 것입니다. 당시 무너진 폴란드의 정부는 국외로 도피해 파리에 망명 정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 망명 정부가 발행한 화폐는 당연히 아무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낙엽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만큼 낙엽은 덧없고 쓸모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겠지요.
낙엽이 못 쓰는 지폐가 되었듯이 비유는 계속 등장합니다. 구름은 셀로판지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기차의 매연은 담배 연기가 되었습니다. 시에서 등장하는 도룬시는 폴란드의 중공업 도시인 토룬(Torun)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곳으로 과거 한자동맹 때부터 발달한 유서 깊은 도시인데 그곳에 독일군의 포탄이 날아갔으니 그 가을 하늘은 낙엽처럼 볼품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김광균 시인에겐 나라를 빼앗긴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도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알려진 안창호와 윤치호의 공활한 가을 하늘도 당시엔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 기울어진 풍경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허공에 돌 하나 던지는 것뿐이라고 자조하는 것만 같습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는 그의 <추일서정>입니다.
김광균 시인은 김기림,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봉에 선 깨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도시적인 감성과 세련된 기교가 더해져 마치 어떤 이미지를 보는 듯합니다. 그에겐 추일(秋日)보다 먼저 온 설야(雪夜)에선 밖에서 눈 내리는 소리를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비유했습니다. <설야>는 <추일서정>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38년에 쓴 시라 하니 그 시절 여인들의 옷이라곤 모두 한복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한복은 벗을 때엔 무어라 딱히 의성어로 규정하기 힘든 소리가 납니다. 요즘은 한복을 거의 입지 않으니 머언 어린 시절 엄마의 한복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시인은 그렇게 겨울밤 눈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한복 벗는 소리에 비유했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시는 곧 회화라고 하는 모더니즘이 식민지 시절 한 젊은 시인에 의해 마음껏 구현되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초월해 그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낙엽은 김광균 시인이 그러했듯 대개 절망의 오브제로 묘사되곤 합니다. 인간의 삶이 희극과 비극으로 절반씩 나눠져 있다고 할 때 변하고, 늙고, 생명을 다하고, 떨어져 나가고, 나뒹굴고, 버려지고, 쓸리고, 태워지고, 썩는 낙엽만큼 비극적인 자연 소재는 많지 않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의 등장인물은 그렇게까지 마지막 잎새를 낙엽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사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광균 시인과 같은 일제 말기에 함께 활동을 했지만 그 시절 낙엽을 다르게 본 작가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아니지만 그 역시 모더니즘의 일선에 선 작가로 우리에게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잘 알려진 이효석입니다. 그는 김광균 시인이 <추일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며 한탄할 때 그 낙엽을 쓸고 태우면서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낙엽은 절망의 오브제가 아니었습니다. 희망의 낙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