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태우면서 by 이효석

by 마하

이효석, 그가 낙엽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낙엽을 태우며 지난 9월 화려하게 핀 봉평의 메밀꽃을 연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가 학창 시절 서울에서 유학 시 평창 고향을 오가며 숱하게 보았던 그 꽃입니다. 그때 봉평은 마을 전체가 소금을 뿌린 듯이 하얀 메밀꽃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 안엔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연도 덮여 있었나 봅니다. 그 꽃이 그를 대표하는 소설이 되었으니까요. 여름을 끝낸 가을의 태양이 중추를 향해 타오르고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메밀꽃 필 무렵> 가을을 여는 소설을 썼던 작가는 가을이 끝날 무렵엔 <낙엽을 태우면서> 수필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새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토속적이고 전원적이던 메밀꽃에서 감상적이고 도시적인 낙엽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가 쓴 <낙엽을 태우면서>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커피, 백화점, 침대, 목욕실, 스키, 크리스마스트리, 색전등.. 그가 사랑했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그가 살던 망국의 시대 용품이라고는 당최 여겨지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글의 내용 중 전차만 전철로 바꾸면 그의 이 수필은 100여 년 후인 2025년에 쓴 것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백화점에서 산 커피의 향을 맡으며 전차를 타고 집에 온다"에서 교통수단인 전차를 전철로 바꾸면 현재의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모더니즘의 선봉에 서 시대를 앞서간 모던보이 이효석이었습니다.


이효석 작가는 한일합병 3년 전인 1907년에 태어나 광복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시절 불과 35년밖에 살지 못한 그가 누린 것들이라곤 너무나 호사스럽습니다. 세상 어느 왕족이나 귀족이 부럽지 않은 그처럼 보입니다. 그는 유복하게 자랐으나 성인이 되어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낙엽을 태우면서>를 발표한 1938년 즈음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시기였습니다. 그 수필 본문에서 그는 커피를 비롯한 위의 신식(?)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모던보이답게 그는 구라파 서구 문명을 매우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것들이 낙엽을 태우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 그 냄새가 좋다고 얘기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하면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그것에서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고도 했습니다. 개암은 헤이즐넛입니다. 와우, 우리가 흔히 다방 커피라 불렀던 요즘의 믹스 커피에서 벗어난 지가 불과 21세기의 시작과 함께였는데 그는 100여 년 전인 20세기 초중반에 이미 바리스타가 갓 볶아낸 것과 같은 헤이즐넛 커피를 즐긴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라고 배우인 안성기씨가 광고에서 속삭인 동서식품의 맥심 프림 커피에서 벗어나 원두커피로 우리의 커피 문화를 결정적으로 바꾼 스타벅스는 1999년이 돼서야 이 땅에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커피 볶는 것을 떠올려서인가 불현듯 타는 낙엽에서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고 얘기합니다. 타버린 낙엽 재를 가리켜서는 화려했던 초록의 기억이 사라진 죽어버린 꿈의 시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화장을 하고 장사를 마치면 가버린 사람은 잊고 그의 꿈을 기억하며 새 삶을 시작하듯 이효석 그도 그런 것입니다. 그리곤 불에 타는 낙엽의 연기와도 같은 목욕물 위에 피어오르는 김 아래로 그의 전신을 담그는데 그럴 땐 마치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기듯 천국 같은 느낌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지상 천국이 별개 아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낙엽을 태우고서 할 일을 다했다 싶어서인지 다른 삶이 있는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뜨거운 불에서 시작해 뜨거운 물로 이동한 그의 낙엽을 태우는 의식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불에 자기 몸을 태워 다시 젊어지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낙엽을 태운 그는 다시 소년이 된 듯 용감해졌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찧은 커피를 사 오고, 집에 와선 바로 닥칠 겨울에 장식할 크리스마스트리와 즐길 스키를 생각하며 즐거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도 글을 쓰는 생활인인지라 책상에 붙어 원고지를 앞에 두고서는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합니다. 작가의 숙명인 창작의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별거 아닌 낙엽을 태우는 일상의 일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뜻을 발견함에 신기해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이 준 혜택 아닌 혜택이라 생각하며 말입니다. 가을이 달리 수확과 결실의 계절이 아닐 것입니다.


마당에서 태워져 재만 남은 낙엽은 생명은 다했지만 그의 소명은 지속됩니다. 자연의 일원으로서 긴 겨울이 지나고 필연적으로 다시 돌아오는 봄을 봄스럽게 만드는 데에 그 낙엽은 일조하니까요. 지금은 겨울에 밀려 찬바람에 떨어져 나뒹굴고, 쓸리고, 태워지고, 파묻히고, 썩어서 사라지지만 새 생명을 위한 밑거름으로 대지를 기름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낙엽은 그렇게 찬란한 봄을 만드는 훌륭한 자양분으로 거듭납니다. 마치 낙엽을 태우는 의식을 마친 이효석 작가가 새로운 창작의 시간을 맞듯이 새로운 봄을 창조하고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낙엽은 희망의 낙엽이 됩니다. 대저 세상사와 인간사는 그렇게 돌고 돌 것입니다. 과거 로마제국의 현명한 철인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명상록>에서도 말했듯이 말입니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 가을바람이 땅에 낙엽을 뿌리면 /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하지만 이효석 작가와 같은 일제 말기에 함께 활동을 했지만 그 시절 낙엽을 다르게 본 작가도 있었습니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그 역시 모더니즘의 일선에 선 작가로 우리에게 <추일서정>으로 잘 알려진 김광균 시인입니다. 그는 이효석 작가가 낙엽을 태우면서 그 내음을 즐기는 동안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며 조국의 현실을 한탄했습니다. 그에게 낙엽은 희망의 오브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절망의 낙엽이었습니다.



<낙엽을 태우면서> (전문)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 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은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띄운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한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 땅속에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 태곳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의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멸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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