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유공존

그라나다 & 세비야 대성당 / 메스키타 / 아야 소피아

by 마하

이국적인 유럽에서 스페인을 더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그 땅에 한때 이슬람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단 그 문명의 정수로 꼽히는 알함브라 궁전이 떠오릅니다. 한때라지만 그 기간은 무려 800년 가까이 됩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근거지로 세력을 확장한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는 북아프리카를 돌아서 유럽 본토인 이베리아 반도로 북상했습니다. 그리고 711년 그곳에 살던 서고트왕국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47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며 남하한 고트족의 기독교왕국은 그렇게 이슬람왕국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 이전인 기원전 3세기 초 라틴족의 로마인은 그 땅에 살던 카르타고인을 몰아내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건설했습니다. 한니발이 대장으로 나선 카르타고는 역사상 최장 전쟁인 포에니전쟁을 치르고 그곳을 로마인에게 내어주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이렇듯 계속된 새로운 민족의 출입과 정주로 스페인엔 여러 종교와 문명이 섞여졌습니다. 이국적인 나라가 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스페인은 수도를 포함한 정중앙 마드리드주를 포함해 17개 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이들 중 이슬람 문명은 안달루시아주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보입니다. 아프리카 무슬림을 가리키는 무어인이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1492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최후의 이슬람왕국인 그라나다를 함락하면서 레콩키스타라 불린 기독교 연합국의 대업은 비로소 끝이 났습니다. 오늘날 그라나다의 랜드마크가 된 알함브라 궁전을 뒤로하고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의 술탄 압둘 보압딜은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800년 전에 출발했던 북아프리카의 모로코로 돌아갔습니다. 과거 한니발의 카르타고인이 돌아간 것처럼 간 것입니다. 그곳에서 불과 250km 떨어진 세비야는 1248년에 함락당했음에도 그라나다는 그렇게 244년을 더 존속했습니다.


이국적인 정경으로 이베리아의 꽃이라 불리는 안달루시아 (출처, 구글맵)


안달루시아엔 가장 큰 주도인 세비야를 비롯해 위의 그라나다와 우리 귀에 익숙한 말라가, 론다, 코르도바, 카디스, 지브롤터 등의 도시들이 있습니다. 세비야와 카디스는 1492년 스페인 통일과 동시에 진행된 대항해시대를 주도한 도시입니다. 콜럼버스도, 미젤란도 내륙인 세비야에서 출발해 60km에 달하는 과달키비르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대서양에 접한 도시 카디스를 거쳐 신대륙으로 나아갔습니다. 돌아올 땐 유럽 최초로 새로운 인종인 아메리카인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카디스는 탱고의 발상지로 그 부두에서 발생한 탱고가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면서 아르헨티나 탱고로 발전했습니다. 구분해서 카디스 탱고라 부릅니다. 누에보 다리로 유명한 론다는 정열의 상징인 투우의 발생지입니다. 안달루시아는 그 외에도 춤과 음악이 섞인 플라멩코와 판당고의 발생지로도 유명합니다. 이렇듯 스페인의 이국성은 상당 부분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이베리아의 꽃이라 불리는 안달루시아입니다.


통일을 이룬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는 그라나다 대성당에 묻혀 있습니다. 본래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주였던 그들이지만 당시 통일왕국의 수도였던 톨레도에 묻히지 않고 남쪽 끝 그라나다에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엔 그들 부부의 뜻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이사벨 여왕은 통일에 감읍해서 항복 서명을 받은 그라나다의 그 지역을 거룩한 믿음을 뜻하는 산타페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기 싫었고 영원히 지키고 싶었나 봅니다. 오늘날 스페인의 국기엔 당시 통일을 기념하는 그라나다의 상징이 들어있습니다. 그라나다왕국의 국화인 석류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석류는 그 알갱이들에서 보이듯 다산을 뜻합니다. 자자손손 대대로 영원한 스페인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통일 군주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잠들어 있는 그라나다 대성당의 전면부


하지만 기독교 군주가 묻혀있는 그라나다 대성당은 본래는 무슬림이 예배를 보던 모스크였습니다. 그 모스크를 허물고 그 터에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지은 것입니다. 1521년 착공해 18세기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조금 갸우뚱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를 경배하는 모스크 자리에 하느님과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성당을 지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가서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절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곧바로 기독교의 교회나 성당을 지은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같은 안달루시아 지역의 세비야 대성당이나 코르도바 대성당은 그보다 훨씬 더하니까요. 신당인 모스크의 터가 좋았나 봅니다.


세비야 대성당은 거대합니다.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드는 외관입니다. 물론 내부도 넓습니다. 유럽에서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니까요. 이 성당도 모스크와 관계가 있습니다. 아주 많이 있습니다. 모스크를 리모델링해서 완성한 성당이니까요. 리모델링이라 하는 것은 원 모습을 살린 곳이 많기에 그렇습니다. 일단 성당에 중정이 있습니다. 오렌지 나무가 심겨있어 오렌지나무의 안뜰로 불리는 곳입니다. 과거 모스크 시절 신자들은 그곳에서 손과 발, 얼굴을 씻는 우두라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예배를 드리기 전 그렇게 몸을 먼저 정화한 것입니다. 중정은 기독교의 성당에서는 보기 힘든 건축 양식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성당을 세운 기독교도는 그 양식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문화문명의 공유이고 공존입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세비야 대성당의 전면부 위용


세비야 대성당은 종탑도 그대로 살렸습니다. 히랄다라 불리는 그 탑은 105m에 달해 세비야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그 탑은 본래 모스크의 미나렛으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미나렛은 모스크라면 어디에 가든 보이는 높은 탑으로 기도와 예배 시간을 알리는 곳입니다. 과거 모스크 시절엔 하루에 다섯 번씩 무아진이라 불리는 예배 담당자가 그곳에 올라가 이제 기도합시다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시 어디에 있든 무슬림은 그가 지시하는 방향인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세비야가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니 미나렛도 모스크의 규모에 맞게 가장 높게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도시를 수복한 기독교도는 그 모스크의 히랄다 꼭대기에 종을 달아서 성당의 종탑으로 용도를 바꾸었습니다. 리모델링 작업은 1401년부터 시작해 1506년에야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1507년 축성 미사를 드렸습니다. 모스크가 대성당으로 완벽하게 문패를 바꿔 달은 것입니다. 세비야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흥망성쇠를 이어간 여러 이슬람왕조들 중 4번째 왕조인 무와히드왕조(1121~1269)의 수도였습니다. 그 왕조는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1248년 세비야를 점령하자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후퇴를 하였습니다. 위의 통일기 그라나다를 수도로 한 나스르왕조는 마지막인 5번째 왕조였습니다.


모스크의 미나렛이었던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탑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그 12년 전인 1236년 코르도바도 수복했습니다. 레콩키스타에 가속도가 붙은 시기로 보입니다. 코르도바는 이베리아에 상륙한 무어인들의 2번째 왕조인 후우마이야 왕조(756~1031)의 수도였습니다. 당연히 이슬람 문명이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코르도바에도 커다란 모스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스크는 지금도 그 도시에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에 보이는 메스키타입니다. 하지만 메스키타는 모스크가 아니고 성당입니다. 코르도바를 대표하는 주교좌 대성당입니다. 성당 이름인 스페인어 메스키타가 영어로는 모스크이기에 메스키타 성당은 모스크 성당인 것입니다. 희한합니다. 성당이름이 모스크라니요? 우리로 치면 절 이름이 성당사이거나 성당 이름이 사찰성당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무어인이 8세기 코르도바에 처음 입성했을 때 메스키타는 기독교의 성당이었습니다. 서고트왕국의 성당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무어인이 모스크로 리모델링해 사용해온 것입니다. 아니, 처음엔 절반은 성당, 절반은 모스크로 사용했습니다. 점령지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를 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엔 메스키타 한 공간에 여호와와 알라가 함께 거했습니다. 그렇게 공존의 세월을 보내다가 무슬림 숫자가 늘어나며 전면적으로 모스크로 재편된 것입니다. 그렇게 2백년에 걸친 공사 끝에 코르도바의 모스크는 987년 완성이 되었습니다. 무려 2만 5천 명의 신자들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의 큰 모스크였습니다. 1236년 톨레도에서 내려온 카스티야왕국의 페르난도 3세는 그 모스크를 보고 경탄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지구상에 그만한 크기의 카톨릭 성당은 없었을 테니까요.


코르도바에 위치한 메스키타 대성당의 전경


저는 그라나다와 세비야 대성당은 가보았지만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대성당은 가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사진으로 그 성당을 처음 보고는 "세상에 이런 성당이 있다니!"라고 감탄하며 이 세 성당을 엮어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 하나 더.. 이 글 아래 등장하는 성당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이든 실물이든 메스키타 대성당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저와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놀람은 800년 전 메스키타를 처음 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보다 더 클 것입니다. 그는 모스크의 장대함에 놀랐겠지만 우리는 그 장대함에 더해 이것이 모스크가 아니고 성당이라는 사실에도 또 한 번 놀라고 있으니까요. 누가 봐도 세상에 이렇게 생긴 성당은 없습니다. 미나렛과 중정이 있는 모스크 외관과 853개의 기둥과 아치형 인테리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성당일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메스키타 대성당은 위의 그라나다와 세비야 성당처럼 리모델링이나 리뉴얼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853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메스키타 대성당 실내


그렇다고 아예 하나도 손을 안 댄 것은 아닙니다. 제단이 없는 모스크와는 달리 성당엔 제단이 있어야 하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본래 1,200여개의 기둥들 중 300여개를 없애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대성당들은 그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십자가 형태의 통로가 있기에 그 사방의 기둥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손을 댄 곳은 없습니다. 본래 모스크와 다를 바 없는 실내이든 실외이든 원형과 차이가 없는 성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게다가 이름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물론 코르도바 산타마리아 성당(Catedral de Santa María de Córdoba)라는 정식 이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메스키타 성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모스크의 성당화 작업을 주도한 스페인의 왕은 16세기 초 카를 5세입니다. 엄마인 후아나 여왕이 합스부르크왕가와의 혼인으로 스페인 역사상 최대 영토를 보유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 시대를 연 군주입니다. 당시 이 모스크는 허물어질 운명에 처했는데 카를 5세가 이것을 보고서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고 제단 부분만 간단히 손을 보라 한 것입니다. 카를 5세는 그마저도 나중에 후회를 하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건축물을 허물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메스키타가 기독교 성당임을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 제단


메스키타가 모스크였음을 보여주는 성지 메카를 가리키는 미흐랍


한편 서유럽의 끝 스페인에서 레콩키스타가 절정으로 치달을 시 동유럽의 끝에선 스페인의 종교와 건축의 역사와는 정 반대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것입니다. 도시의 정복자는 스페인과는 반대인 이슬람 세력이고 그 도시를 빼앗긴 자는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였습니다.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성이 함락되며 동로마제국, 아니 기원전 753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형제에 의해 세워진 로마제국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서에서 시작해 동에서 끝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동방의 끝에서 서방 기독교 국가들을 20세기까지 내내 신경 쓰이게 한 오스만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왕국입니다.


역사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선 781년 이슬람왕국이 무너져 기독교화 되고, 동쪽 끝 보스포루스 해협에선 2,206년의 로마제국이 무너져 이슬람화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유럽 양끝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한 것입니다. 동로마제국을 신무기 대포와 신출귀몰한 함선 작전으로 무너트린 오스만제국의 영웅은 메흐메트 2세 술탄이었습니다. 그런데 1453년 당시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 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지금은 아야 소피아로 불리는 소피아 대성당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의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물론 그의 신은 알라입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성당에서 알라에게 기도를 드리다니요? 그리고 곧바로 모스크가 되다니요? 우리에겐 역시나 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위의 스페인에서 모스크가 성당으로 바뀐 것을 보면 그렇게 이해 못 할 일도 아닐 것입니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대성당과 반대의 경우로 바뀐 것이니까요. 물론 아야 소피아도 모스크가 되기 위해선 일부 리뉴얼을 했야 했습니다. 제단과 성물을 없애고 성화와 모자이크를 회벽으로 가렸습니다. 성지인 메카를 가리키는 방향계인 미흐랍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외부엔 예배 시간을 알리는 미나렛도 새로 건설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아야 소피아엔 4개의 미나렛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 메흐메트 2세의 지휘하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피아 대성당의 본모습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처럼 말입니다.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뀐 이스탄불의 랜드마크 아야 소피아


동로마제국의 소피아 성당과 위의 스페인 성당들에겐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같은 기독교 성당이지만 당시엔 로만카톨릭이 아닌 동방정교회 성당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1054년 교리의 차이와 자존심의 대결로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로마의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의 교황을 파문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천년의 강을 건넌 것입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야 소피아가 카톨릭 성당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곳에 가서 알라에게 기도를 올렸을 테니까요.


아야 소피아는 이후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튀르키예로 바뀐 나라에선 종교시설이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술탄 이상의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5년에 내린 조치였습니다. 물론 도시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인 2020년부터 강성인 에르도안 대통령에 의해 아야 소피아는 다시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537년 동로마제국의 최고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세운 아야 소피아는 카톨릭의 성당이었다가 정교회의 성당으로 바뀌고,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다시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아야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를 뜻합니다.


기독교의 성당이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그리고 반대로 모스크가 성당으로 바뀌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은 어디에든 있으며,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기독교의 신과 이슬람의 최고 신은 같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상당 부분 구약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간인 아브라함(이브라힘)도 섬기고 있으니까요. 물론 유대교도 구약은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난 이삭은 기독교의 계보인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져 유대인의 조상이 되고, 추방된 이스마엘은 이슬람교의 계보인 무함마드로 이어져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주장하기에 이슬람교에선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정통 적자로 보고 이삭이 아닌 그가 희생의 제물로 올려졌다고 합니다.


2020년 다시 모스크가 된 아야 소피아 실내 정경


스페인이 800년 가까이 완전한 기독교 국가 수복을 위한 레콩키스타를 이어갈 때도 매일 전쟁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는 서로 공존하며 같이 산 시절도 꽤나 길었을 것입니다. 투우의 도시 론다의 경우 도시의 랜드마크인 누에보 다리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거주하는 구역의 경계였습니다. 한 도시 안에서 각자의 신을 섬기며 혹시라도 있을 충돌을 막기 위해 그렇게 슬기롭게 공존한 것입니다. 물론 그 도시엔 유대인 지구도 따로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는 제국과 도시의 기독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계속 허용했습니다. 정교회 지도자인 총대주교직을 복원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포고령까지 내렸습니다.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등 안달루시아의 고도들엔 어디든 옛 무슬림 지구가 남아있습니다. 그들이 물러난 다음엔 주로 유대인이 살던 구역입니다. 그렇게 한 도시에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며 공존해온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어떤 국가나 지역에선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전쟁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연합 - 기독교 국가들엔 많은 무슬림이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도시인 뉴욕과 영국의 수도 런던의 시장은 무슬림입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서 어떤 종교적인 이슈가 발생한다면, 또는 종교적인 테러나 침략이 발생한다면 그 순간 그런 공유와 공존은 깨질 것입니다. 위기 없는 지속적인 평화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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