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베토벤, 벨리니

by 마하

4개월 전인 2025년 9월 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첼리스트에게 혼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첼로를 마치 일렉트릭 기타처럼 빠르게 연주하면서 때론 타악기처럼 두들기곤 했습니다. 이전에 그런 연주를 안 본 것은 아니지만 그는 훨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폭풍과 격랑의 바다를 항해한 그의 첼로는 어느 시점 고요의 바다에 둥둥 떠있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동시에 쥐어짜진 저의 가슴도 구김 없이 다시 평평해졌습니다. 할렐루야!


맞습니다 당시 그가 연주한 앙코르곡이 팝의 음유 시인 레너드 코헨이 만든 <할렐루야>였습니다. 그 곡을 연주한 첼리스트는 또한 그에 버금가는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때 그는 '모스틀리 첼로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국내 정상급 첼리스트들과 협연도 했는데 앙코르곡을 제외한 그 모든 곡들이 그가 작곡한 곡이었습니다. 첼로계의 지미 핸드릭스라고까지 불리는 조반니 솔리마입니다. 그때 그의 이력 중에 제가 눈여겨본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시칠리아 출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는 지역적으로 메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음악가로 인해 그곳은 클래식의 명부에 당당히 그 지명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음악가가 19세기 초 벨칸토 오페라를 화려하게 장식한 빈센초 벨리니이고 그의 고국이 시칠리아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첼리스트 솔리마는 훗날 어떤 평가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시칠리아는 음악적으로는 완벽하게 벨리니의 나라입니다. 당시 나폴리까지 포함해 양시칠리아왕국(1815~1861)이라 불린 그 시절 벨리니는 시칠리아 2대 도시인 카타니아에서 1801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35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카타니아 시내의 벨리니 동상. 아래는 그의 4대 오페라의 주인공들


물론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오페라 극장이 있는 팔레르모입니다. 그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은 규모도 규모지만 영화 <대부 3>의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마이클 콜레오네의 아들이 오페라 가수로 그 극장 데뷔 무대에 서는 날 딸이 그 극장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저격을 당했습니다. 총알이 빗나가 죽어야 할 죄 많은 아버지 대신 그가 사랑하는 딸이 죽은 것입니다. 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아버지는 소리 없이 오열합니다.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스토리와도 같은 비극이 영화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팔레르모 마시모 극장의 전면부


벨리니가 태어난 카타니아에도 오페라 극장이 있습니다. 과연 벨리니의 고향답게 그의 이름을 딴 카타니아 마시모 벨리니 극장입니다. 마시모(Massimo)는 그랜드(Grand)라는 뜻입니다. 카타니아시는 극장뿐만 아니라 공항 이름도 벨리니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카타니아 빈센초 벨리니 공항이 풀 네임인 공항입니다. 도시를 빛낸 벨리니를 그만큼 사랑하고 우대하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입니다.


카타니아 마시모 벨리니 극장의 전면부


6세부터 작곡을 한 벨리니였지만 그는 18세에 나폴리의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며 그의 본격적인 음악 인생을 펼쳐갔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메인 스트림이 된 벨칸토 오페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벨칸토 오페라는 무대를 장악하는 풍부한 성량에 아름답고 섬세함까지 갖춘 아리아로 악기와 주제보다는 가수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시킨 오페라를 가리킵니다.


벨리니가 1831년 작곡한 2막의 오페라 <노르마>에 나오는 <정결한 여신>이 그 오페라를 대표하는 곡으로 뽑힙니다. 아름다운 플루트의 전주에 이어 누에에서 비단 실이 나오듯 끊이지 않는 아리아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곡입니다. <정결한 여신>은 최고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가 취입한 노래일 정도로 그녀를 대표하는 아리아로 꼽힙니다. 2024년 개봉한 마리아 칼라스의 사망 전 1주일을 다룬 영화 <마리아>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정결한 여신>을 부르는 그녀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1960년 녹음된 마리아 칼라스의 <노르마>, 2023년 재발매한 4LP


세상은 두 마리 말이 달려야 떠 빠르고 높게 발전한다고 벨리니의 시대엔 또 한 명의 오페라 장인이 있었습니다.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입니다. 그 둘의 경쟁 관계로 인해 벨칸토 오페라는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도니제티는 1830년 12월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 헨리 8세 시대 비운의 여인인 천일의 앤을 소재로 한 <안나 볼레나>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흥행대박, 이 오페라로 그는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벨리니는 새로운 오페라에 매진을 했는데 그 곡이 <노르마>입니다. 곧바로 1년 후인 1831년 12월 역시나 오페라의 성지인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 초연을 했습니다. 명불허전, 그리고 이 두 천재의 오페라는 20세기인 1950년대 들어 마리아 칼라스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작곡 120년 후 비로소 임자를 만난 것입니다.


벨리니, 도니제티에게 멍석을 깔아준 이는 거장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였습니다. 화려한 벨칸토 오페라의 파이오니아가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32세부터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본래는 볼로냐를 주무대로 활동했는데 이탈리아 통일운동 시기 그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부담을 느낀 그가 활동지를 파리로 옮긴 것입니다. 그는 자국의 음악 후배인 벨리니와 도니제티를 파리로 불러들여 그들의 재능을 더욱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마치 미술에서 스페인의 피카소가 자국의 미술 후배인 달리와 미로를 파리로 불러들인 것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벨리니는 파리에서 미식가요 제작자로 변신한 로시니의 조언 하에 오페라 <청교도>를 작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곡은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1835년 파리에서 <청교도>를 무대에 올리고 그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다음 세대의 에이스가 바로 주세페 베르디입니다. 그가 1842년 밀라노 라스칼라 극장에서 올린 <나부코>는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특히 3막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왕국의 독립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기 <라 마르세예즈>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로시니는 벨칸토 오페라로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를 열었고 벨리니와 도니제티는 그 씨를 받아 꽃을 피웠으며 베르디는 그것을 기반으로 주제 의식과 드라마가 강한 그의 오페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과연 오페라 왕국다운 이탈리아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시기가 이탈리아 남북이 가장 어지러웠던 독립과 통일의 시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오페라로 먼저 하나가 된 남북 이탈리아였습니다.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에 버금가는 음악가로 평하며 그 둘을 가리켜 '음악의 2B'라 칭하였습니다. 베토벤에게는 없는 무한한 선율의 아름다움을 갖춘 음악가로 벨리니를 칭송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음악에 대해 가볍다고 박하게 평가해오던 바그너조차도 벨리니의 음악에 대해서는 감탄을 했습니다. 특히 <노르마>는 그리스 비극에 버금가는 완벽한 음악 비극이라 평하였습니다. 파리에서 죽은 벨리니의 유해는 지금 카타니아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의 고국 시칠리아에, 그의 고향 카타니아에 영원히 묻힌 것입니다.


벨리니의 묘지가 있는 카타니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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